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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20)화 (120/167)

120화

“디란타에서 뱀 문양을 쓴 적도 있어요?”

황가의 피가 이어지는 디란타다.

그곳에서 굳이 불길함의 상징인 뱀 문양을 쓸 이유가 없는데?

리벨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시스테인이 말한 건 디란타 대공가의 문양이 아니었다.

대륙의 많은 사람들이, 그저 ‘불길함’만 남기고 잊어버렸을 저 뱀에 대한 것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디란타 대공령, 그것도 디란타령에 쏟아져 나오는 마물을 막는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디란타령의 게이트 뒤, 비석에 새겨져 있는 문양입니다.”

그 게이트가 무엇인지 리벨은 곧바로 알아챘다.

디란타령에 마물을 쏟아 내는 그 게이트를 말하는 거다.

“그럼 정말,”

리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게이트가 인간의 것이 아닌 방식으로 세워졌다고 했을 때만 해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100년 전에 사라진 마족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나 싶었는데.

“예. 정확히는 이건, 마신전의 문양입니다.”

리벨은 그 말에 입을 떠억 벌렸다.

“그들은 마신전의 사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족과 관련된 것들은 100년 전에 모두 불태워져 버렸다.

그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당연히 당시 친마족 성향을 보였다는 마신전과 마신전 사제들도 대가 끊겨 버렸다.

……고 원작에 나와 있었는데?

그랬는데?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마신전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됩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방식으로 게이트를 여는 것도,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것도요.”

그야 존재 자체가 사형이니까, 비밀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원작의 필레 공작은 그냥 쥬리 백작 영애와 힘을 합쳐서 그냥 인간의 힘만으로 반역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마신전이요?

쥬리 백작 영애가 힘을 보태지 못하도록 원작의 내용을 비틀어 버렸으니 변화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근데 그것도 필레 공작의 세력이 약해지는 쪽으로 나타날 줄 알았지!

갑자기 여기서 마신전이 왜 나와???

*  *  *

감찰기사단의 서류에 실을 자료가 문제가 아니었다.

시스테인은 리벨의 사진에서 마신전의 문양을 확인하자마자 서류 제출 일정을 미뤄 버렸다.

그리고 감찰기사단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마신전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찾아낸다. 그리고 마신전이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위치를 중심으로, 마신전의 흔적을 추적한다.’

감찰기사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생각도 리벨과 비슷했다.

100년 전에 망한 마신전은 갑자기 왜 찾으신단 말인가?

‘이 사진에 있는 문양을 중심으로 찾아봐. 그리고 이 위치를 가장 우선적으로 조사하도록.’

그러면서 시스테인이 지도에 표시해 준 건, 대공령 남쪽에 있는 숲과 수도 남서쪽의 한 지점이었다.

‘이곳은……?’

‘이전에 봤던 수상한 자들의 흔적이 끊긴 곳이다.’

정확히는 시스테인이 그들에게 부착해 둔 마력이 소멸되어 버린 지점이었다.

그는 아쉽게도 GPS가 아니었으므로, 정확한 지점을 지도 위에서 짚어 낼 순 없었지만 조사 범위를 좁히는 건 가능했다.

‘알겠습니다.’

그 명령은 늦은 밤에 곧바로 전달되었다. 시스테인이 사진에서 그 문양을 발견한 직후에.

“…….”

리벨은 곤히 눈을 감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만큼, 리벨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잠들었을까?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오늘 그는 피곤해 보였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대공령과 제도기사단의 서류는 물론이고 감찰기사단의 서류까지 정리했으니까.

“…….”

리벨은 다소 흐트러진 그의 금발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 솔직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울렸다.

누가 욕망을 더러운 것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리벨이 속으로 뇌까렸다.

욕망이 묻어나는 그의 말은, 그 어느 것보다도…… 순수해 보였다.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남들보다 더. 그건 질투 같기도 했고 소유욕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아플 뿐이지.

“…….”

건드렸다가 잠 깨면 안 되는데.

리벨은 결국 슬그머니 손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였다.

잠들어 있던 시스테인의 숨이 천천히,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은.

*  *  *

「황태자 전하께서 크게 다치셨다는 거, 알아?」

「모를 리가. 근데 그 자리에 2황자 전하께서도 계셨다던데…….」

「쉿, 조용히 해.」

시스테인은 이 목소리들을 아주 오랜만에 들었다.

그건 황성의 외진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가 아직 황성에 머물던 시절에.

마력을 가진 어린 둘째 황자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때.

「2황자 전하께서는 아무런 상처 없이 나오셨다던데.」

「두 분께서 함께 계셨던 거 아냐?」

「맞는데 그랬대.」

「뭐?」

그건 황성의 시종들 사이에 오가던 이야기였다.

「사고가 있던 별장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 근데 마물이 나타난 현장에 있던 모두가 죽었는데, 둘째 황자 전하만 살아 계셨다는 거야…….」

「뭐? 진짜?」

시종들은 놀란 얼굴로 떠들어댔다.

복도를 걷던 어린 시스테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목소리들은 계속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럼 마물도 둘째 황자 전하께서 처리하신 건가?」

「아니.」

「그럼?」

이어지던 목소리는 아주 작아졌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시스테인의 귀는 좋았다.

「마물 사체는 없었대.」

「뭐라고?」

「괴물이 따로 나타난 게 아니라, 둘째 황자 전하께서 괴물이었다는 거지.」

「뭐? 말도 안 돼!」

시종들이 떠드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때 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근데 별장에 아는 사람도 있어?」

「응, 거기 관리인 동생이 내가 아는 사람이거든.」

시종도 아는 얼굴인지 자연스럽게 답했다.

「와, 인맥 좋다. 근데 이런 얘기 막 해도 되는 거야? 자칫하면…….」

끼어든 목소리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주도하던 시종 목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아무 데나 말 안 하지. 나도 여기서만…… 근데 잠깐.」

시종은 그제야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에게서 이질감을 느낀 듯했다.

「넌 동쪽 복도 소속 시종이 아니잖아? 누구―」

그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파악!

시스테인이 숨어 있던 기둥 바로 앞까지 피가 튀었다.

「으아악!」

「살, 살려 줘!」

어린 시스테인은 그 너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보지 않아도 보였다.

비명과 함께 튀는 핏방울들이 그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게 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자리에 있던 시종들이 처리되는 데에는 수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자들은?」

그때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어린 시스테인의 숨이 멈추었다.

「별장 관리인과 그 동생에게서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복도에서 시종들을 「처리」한 자가 답했다.

「그자들과 주변인들까지 모두 처리해.」

「알겠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이 오가는 명령이 가볍게 내려졌다.

어린 시스테인이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을 때였다.

그가 숨어 있던 기둥 앞으로, 누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

시종 차림의 그자의 소매며 옷에는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툭.

그리고 그자가 역수로 잡고 있는 단검에서는 아직 굳지 않은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웃었다.

「둘째 황자님은 염려 마세요. 저런 자들은 모두 깨끗이 처리되고 있으니.」

「그…….」

말을 잇지 못하는 어린 시스테인에게, 남자가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명하셨답니다. 그날의 일은, 없는 일로 만들라고요.」

쿵.

피 칠갑이 된 채 웃는 남자의 얼굴이 기괴해 보였다.

이마에서 흘러내려 미간을 타고 내려오는 핏방울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어린 시스테인이 느꼈던 건 공포였다.

제 ‘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죽은 사람, 혹은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죽은 사람이 벌써 백이 넘었다.

제 손으로 죽인 수십 명의 사람도 모자라 그 배가 넘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괴물.’

시스테인은 사고가 있던 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듯했다.

어린 카리스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말하고 있었다.

너는 끔찍한 괴물이라고.

그 말대로였다. 그는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물이었다.

어린 시스테인에게, 괴물이란 단어는 낙인처럼 날아와 새겨졌다.

―툭.

웃고 있는 남자의 검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계속, 계속.

「윽,」

어린 시스테인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툭, 툭……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듯했다.

죽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적막이, 공포가, 죄책감이 짓쳐 들어올 때마다 심장은 더욱 거칠게 날뛰었다.

언젠가처럼.

그 며칠 전 언젠가처럼.

어린 시스테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온통 붉어진 시야와, 웃음이 사라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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