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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21)화 (121/167)

121화

어린 시스테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폐허뿐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 황성 본관 동쪽 복도가 보였다.

보이지 않아야 할 하늘과 흙먼지, 그리고 그 사이에 흩어진 핏자국들이 보였다.

평화로운 황성에선 보여선 안 될 것들이었다.

「아…….」

시스테인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느낌, 이 상황은 익숙했다.

그때와 같았다. 별장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와.

다른 점이라면 앞에 카리스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어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이건,」

시스테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제 손끝에서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건 제 것이 아니었다.

제 앞에서 웃던 남자의 것이었다.

「아…….」

그때였다.

「이쪽이다!」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군홧발 소리. 기사들이 오고 있는 거다.

‘괴물.’

‘둘째 황자님이 괴물이셨다는 소문이…….’

안 그래도 소문 속에 휩싸여 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 모습까지 보인다면?

어린 시스테인은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사람이 오는 소리가 온통 머릿속을 메워 제대로 된 생각을 방해했다.

다시 한번 시야가 붉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안 돼.」

어린 시스테인은 떨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눈앞에는 이미 숨을 쉬지 않는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스테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의 손에 들린 단검에 닿았다.

이번에도, 내가 멀쩡한 모습으로 발견된다면 난 괴물로 완전히 낙인찍힐 것이다.

‘괴물.’

그렇게 말하던 카리스의 목소리가 점점 울려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변하는 것 같았다.

시스테인의 손이 떨렸다. 그조차 자신이 두려웠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괴물이고 싶지 않아.

괴물로 취급받고 싶지 않아.

그 두려움과 반쯤 날아간 이성은 그에게 기이한 용기를 선사했다.

―푸욱!

시스테인이 든 단검이 제 몸을 찔렀다.

어린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검은 그의 복부를 깊이 관통했다.

―챙그랑!

그걸 다시 뽑아낼 힘까지는 또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스테인의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암전이었다.

*  *  *

「경계를 강화하라!」

「침입 통로를 반드시 찾아내!」

어린 시스테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황성은 물론이고 제국 전체에 동쪽 복도에서의 사건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시는 마물이 침입하지 못하게 해라!」

마물의 소행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어린 시스테인은 그 사실에 마음을 놓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혐오했다.

그날 그는 괴물을 보았다.

카리스가 다쳤을 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동쪽 복도가 날아가고 나서는 알 수 있었다.

괴물은, 정말 자신이었다.

시스테인 자신 안에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이 있었다.

「시스.」

그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머니인 황후 리엔이 그의 방에 들렀다.

황가 주치의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방이었지만, 리엔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시스테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리엔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얼굴이 금세 혐오로 일그러질 것만 같아서.

또는 카리스처럼, 공포로 일그러질 것 같아서.

멀어질 것만 같아서.

「괜찮니?」

리엔의 말에 어린 시스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당기고 아팠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동쪽 복도의 일.」

그런 그의 앞에 리엔의 말이 떨어져 내렸다.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그것 때문에 네게 마물의 씨앗이 붙은 건 아닌가, 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단다.」

「마물의…… 씨앗이요?」

시스테인은 짧은 삶을 살면서 그런 물건의 존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리엔이 차게 웃었다.

「헛소문이지. 하지만 우리에게 나쁜 소문은 아니란다.」

그녀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 현장에서 네가 또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퍼진 소문 같더구나.」

「…….」

시스테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후 리엔은 웃었다.

「괜찮아. 소문은 내가 잠재울 테니. 그보다……, 난 진실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그 말에 시스테인은 이불을 꽉 쥐었다.

「기억이 나니, 그때의 일?」

시스테인은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었다.

두려운 얼굴로 저를 보던 남자와, 죽어 나가던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제 손짓 한 번에 무너져 내리던 동쪽 복도의 모습.

괴물 같던 자신의 모습.

「……아뇨.」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걸 말할 수가 없었다.

제 안의 괴물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답에 리엔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래……, 그래도 상관없단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방 안으로 마법사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아이를 진찰해 보렴.」

「어머니?」

시스테인은 다가오는 마법사를 보면서 몸을 움츠렸다.

리엔이 말했다.

「의사는 네 몸에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봐야 할 것 같거든. 금방 끝날 거란다.」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평소에는 포근하게만 보였던 그 미소가 오늘따라 무서워 보였다.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긴장한 건 마법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나 긴장도 잠깐. 그의 이곳저곳을 한참 살펴보던 마법사는 놀란 얼굴로 변했다.

「이건……, 황자님의 온몸에 마력이 산재해 있습니다.」

「마력이 산재해 있다?」

리엔이 되물었다.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얼굴이었다.

「아직 몸이 어리셔서 감당하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성장해 마력을 제어하실 수만 있게 된다면, 황자님께선 엄청난 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마법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리엔이 물었다.

「마력을 제어할 수만 있게 된다면, 말이지?」

마법사가 멈칫했다. 리엔은 그런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지금은 제어할 수 없다는 의미로구나.」

시스테인은 그 말에 멈칫했다.

다시 말해 그 괴물은, 제가 마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만 깨어난다는 뜻이었다.

보다 더 어렸을 때, 그의 첫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이미 그의 친구였던 마나는 더 이상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

「예.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신 것 같습니다. 일종의 광증……이지요.」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래 머리까지는 마력이 퍼지지 않아 광증이 될 일은 없는데, 선천적으로…… 그런, 체질이신 것 같습……니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선천적인 문제라.」

리엔이 뇌까렸다. 그녀가 곧 해사하게 웃었다.

「알겠어. 나가 보렴.」

「알,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덜덜 떨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목은 두고 가야지.」

「예, 예?」

어린 시스테인의 눈앞을 리엔의 손이 덮었다.

「으아악!」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시스테인에게는, 리엔의 손 틈으로 눈앞의 모습이 보였다.

마법사가 목숨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아…….」

그는 또, 저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였다.

「네 마력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리엔은 그런 그에게 말했다.

「내 아가에게 더 이상, 헛소문이 따라붙어서는 곤란할 테니. 그렇지?」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둘째 황자 시스테인은 당시 주인이 없던 디란타 고개로 떠났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이러했다.

둘째 황자가, 제 몸에 붙은 ‘마물의 씨앗’을 떼어 낼 때까지 몬스터들이 들끓는 땅에 머물겠노라 했다고.

더 이상 제국민과 황성에 피해가 없도록, 자청했다고.

*  *  *

그날 후로도 시스테인이 괴물이라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떠드는 자들이 워낙 많으니 리엔도 그들의 목을 모두 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바람잡이를 심어, 소문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 갔다.

어차피 사람과 사람 사이로 퍼지는 소문이니, 단어를 조금 바꾸어 소문의 방향을 트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으셨으니, 그야말로 괴물이시지.」

「숙련된 기사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던데, 비록 중상을 입으셨지만 살아남지 않으셨나?」

물론 그런 소문들 사이로 시스테인의 좋지 않은 소문 역시 돌고 있었다.

[금주 사교계 보고]

그리고 그런 소문에 대해서, 시스테인은 알 필요가 있었다.

불붙여도 될 좋을 소문에는 불을 붙여야 했고, 좋지 않은 소문은 가라앉도록 입을 다물고 자중해야 했으니까.

[마물의 씨앗이 붙은 게 아니라 그냥 괴물인 거겠지.]

[황가에 광증의 피가 흐른다는 소문이 있어.]

[어차피 둘째 황자잖아. 이대로 황성에 들어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리엔 폐하께서는 그러길 원하실걸? 카리스 전하께서 다치신 것도 다 둘째 황자 때문이잖아.]

[괴물을 황성에 들여 봐야……]

[제도의 안위가 걱정되는군.]

그리고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지나갔다.

시스테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그런 그를 가장 무섭게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어린 황자가 마물의 씨앗을 제 손으로 떼어 낼 수 있을까?]

[디란타 고개는 마물들의 땅이잖아. 거기서, 마물이 되어 돌아오는 거 아냐?]

[아예 디란타 고개에 격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가 제도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게 하려는 소문들.

어린 시스테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난 방법을 찾을 거라고.

마법사도 그랬다고. 제가 크면, 이 마력을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럼 내가 그렇게 폭주할 일도, 괴물이 될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그저 견뎌야 했다.

「이대로 괴물이란 소문이 퍼지는 걸, 내버려 둬야 한다고?」

몇 번이고 사교계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 리엔이 보낸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가 낫습니다. 여기서 모습을 보이시면 더 소문에 불이 붙게 됩니다.」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것이 행운이란 것도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떠드는 소리입니다. 무시하십시오.」

가만히 있을수록 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시야가 붉어지면서 의식을 잃곤 했기에.

그렇게 일 년. 폭주로 날린 시간이 그의 반에 다다를 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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