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리벨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싸, 싸우셨습니까?”
황당해하는 헬리아와 사용인들의 시선이 방 안의 풍경을 쭉 훑었다가 리벨을 향했다.
그들 역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친 건 리벨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건 가주님의 일방적인 폭……력……?
리벨은 그들의 눈에서 생각이 읽히는 것 같았다. 리벨이 손을 내저었다.
“괜, 괜찮아요.”
흠흠. 목을 가다듬은 리벨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물려 봐야 상황이 더 이상해지니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볼 수밖에 없었다.
간다, 임기응변!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싸울 수도 있고, 그,”
리벨은 때마침 옆에 터져 있는 베개를 불쑥 집어 들면서 말했다.
“의의견이안맞을수도있고! 뭐그런거죠하하하하!”
리벨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베개를 두드렸다.
“하지만베갯속이너무딱딱하다는이유로싸운건좀아닌것같네요! 하하하하!”
그리고 헛소리를 시작했다. 임기응변이고 뭐고 없었다.
지금 내가 뭐라고 하는 거냐?
하지만 이렇게 격렬하게(?) 싸운 이유를 당장 만들어 내라니 너무 어려운 문제 아니냐고요!
리벨은 그래도 시스테인보다 훨씬 나은 연기력으로 울상인 얼굴만은 완벽하게 감추었다.
“…….”
“…….”
시스테인과 리벨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시스테인조차 리벨의 베개를 보고 좀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기, 지금 당신이 이거 보고 당황하면 안 되거든요?
리벨이 살짝 눈에 힘을 줘 보이자 시스테인은 곧 표정을 폈다.
마! 내 남편이 연기력이 없지 눈치가 없나!
“……앞으론 유의하겠습니다.”
방 안에 시스테인의 굳은 목소리가 울렸다. 눈치는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연기력은 문제였다!
아니 뭘 유의해? 베개가 안 딱딱해지게? 혹시 베개 직접 사십니까? 쇼핑하세요? 네?
하지만 여기서 따질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공범이었으니까.
“…….”
“…….”
아무튼 우린 부부 싸움 한 거다. 리벨이 나름 맹렬한 시선으로 시스테인을 쏘아보고 있을 때였다.
헬리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베개는 당장 푹신한 것으로 바꾸라 이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휴. 리벨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나가서 베개를 당장 푹신한 것으로 구해 와. 그리고 이 베개를 관리하는 하녀를 당장 데려와. 이 참상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것이다.”
헬리아의 엄한 목소리에, 그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 두 개가 동시에 튀어 나갔다.
“됐어.”
“그만둬라.”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 아무튼 우리 싸웠다고!
“…….”
“…….”
문도 안 열린 방 안에 찬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듯했다.
* * *
시스테인과 리벨은 낮 동안 집무실에 있기로 결정했다.
“마님의 집무실을 따로 정리해 두었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헬리아는 싸운 두 사람을 잠시 격리 조치(?)하려고 했지만 리벨은 한사코 반대했다.
“이제 화해했어. 괜찮아. 그렇죠?”
“그렇습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딱딱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는 뭐야? 남의 얘기 하세요?
리벨은 속으로 머리를 붙잡았지만, 다행히 헬리아는 더 따지지 않았다.
주인 부부의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사용인이 더 따지기도 뭐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해도 두 사람이 괜찮다면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침실이 엉망이 된 것과, 리벨에게 상처가 났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저택의 분위기는 며칠간 살얼음판이었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시던 분이 왜 이런 짓을…….”
“그것도 마님께…… 손을 대셨다고?”
기사들도 사용인들도 그들의 변명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시스테인의 말도 안 되는 연기력을 아는 감찰기사들은 더했다.
“확실히 부부 싸움은 아니야.”
“그럼 뭐지?”
하지만 진실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으니, 사용인들이 아무리 짐작하려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사이에 두고 ‘부부싸움이 났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몬스터가 침실 한가운데에 떨어져 내렸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다’라는 소리가 저택을 세 바퀴쯤 돌았을 때.
리벨은 그때까지도 시스테인의 집무실에 있었다.
“따갑거나 열감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그녀를 시스테인은 평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대했다.
리벨은 그가 손수 붕대를 감아 주는 팔을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이 좋은 건지, 시스테인 손이 약손인 건지 몰라도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훨씬 통증이 덜한 듯했다.
시스테인은 상처 때문에 금세 더러워진다며 붕대를 하루에 두 번씩 갈아 주었다.
그때마다 리벨의 몸 이곳저곳에 그의 손이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앗,”
리벨은 그때마다 볼을 붉혀야 했다. 다행인 건, 살얼음판(?)인 두 사람 분위기를 의식하여 사용인들이 집무실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탁.
이번 ‘치료’도 끝낸 시스테인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다소 흐트러진 리벨의 옷매무새를 직접 다듬어 주었다. 그의 시선이 붕대가 감긴 팔과 손끝을 향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이랬다. 상처를 볼 때마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하다가, 상처를 한 번 더 보았다가, 결국 시선을 돌려 버리는 것.
지금처럼.
―탁.
리벨은 몸을 돌리려는 시스테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벨?”
시스테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벨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말해 봐요.”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리벨은 그가 앉았던 자리를 퉁퉁 두드려 주며 말했다.
“상처 볼 때마다 하려다가 못 한 얘기요.”
그 말에 시스테인의 입이 살짝 열렸다가, 다물어졌다.
“그건―”
쉽게 입을 뗄 것 같지 않기는 했다. 리벨은 팔짱을 꼈다.
“궁금해서 왠지 더 아픈 것 같은데…….”
이래도 말 안 하면 비기를 쓸 생각이었다.
드러눕기!
리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반쯤 떴을 때였다.
결국 시스테인이 착석했다. 만세!
“오늘은 말해 주실 거죠?”
리벨은 곧바로 바른 자세가 되어 자리에 앉았다. 시스테인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
그녀가 쓰러질 만큼 아프진 않다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리벨이 힘을 풀고 소파 위에 몸을 늘어뜨리는 순간 심장이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가 혹시 아픈가 싶은 가능성 때문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를 아프게 한 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앞에 그는 죄인이었으니, 그녀가 원하는 걸 내어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리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네?”
갑자기 여기서 그건 왜요? 리벨이 몇 번 더 눈을 깜빡이자, 시스테인이 말을 보탰다.
“며칠간 여쭙고 싶었던 게 이겁니다. 무섭진 않으셨느냐고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때.”
“아…….”
리벨은 그가 며칠 전 밤의 일을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걸 물어볼까 말까를 며칠간 고민한 거야?
그것도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시스테인은,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늘 했던 것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내 상처에 신경 쓰고 있었다는 의미다.
리벨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안 무서웠다면 거짓말이죠.”
아무리 내가 시스보다 연기를 잘한다지만, ‘안 아팠으니 한 번 더 해 보시지! 하하하하하!’ 같은 소리는 절대 못 하지.
리벨은 그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마력 파편이 튀어 나갔던 그날을 떠올렸다.
온몸을 스치던 마력도.
자칫해서 치명적인 곳을 스쳤다간 큰 사고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깨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리벨이 말했다. 다…… 업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건 시스테인의 상태였다.
“시스야말로 괜찮아요, 지금은?”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는 리벨의 얼굴을 살피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통증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표정에서 통증을 감추기가 어렵다.
십여 년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저를 억눌러 왔던 시스테인이기에 알았다.
그 자신조차도 어렸을 때에는 고통을 참기 위해, 고통을 참는 표정조차 지워 내기 위해 통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으니까.
시스테인은 어릴 때 보았던 수많은 피와 상처를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행히도, 리벨은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두 번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터였다.
“리벨 덕에 괜찮습니다.”
그날은, 저를 유독 억누르지 못한 날이었다. 그는 리벨이 옆에 있는 만큼 더욱 조심하고 있었다.
제 안의 괴물이 날뛰지 않도록.
다행히도 지금은 잠잠했다.
리벨이 아예 철썩 옆에 붙어 있으니 마력이 끓어오를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리벨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날 밤 이후로는 그의 어린 시절의 악몽이나, 기사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게다가.
“이렇게 업무를 보고 있으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서요.”
시스테인이 낮게 웃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그들이 보던 서류가 높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하지만 리벨은 팔짱을 끼었다.
저 서류가 다 무엇인가?
반란에 관련된 서류가 아닌가?
반란 하면 황제 카리스요, 카리스 하면 시스테인의 어린 시절인데.
또 폭주하는 건 아니겠지?
리벨이 그를 걱정스럽게 보다가, 새로운 서류를 집어 들었다.
“혹시 몸 이상하면 말해야 돼요.”
“물론입니다.”
시스테인이 가볍게 말했다. 그러면서 리벨을 살폈다.
그 말을 할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며칠간 진전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리벨이 서류를 두드려 보며 입을 열었다.
저택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며칠간, 두 사람은 중요한 정보를 몇 개나 접했다.
“일단 위치도 알았고.”
리벨이 아까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 위에는 시스테인이 붉은색으로 표시해 준 원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근처에서 그들의 마력이 끊겼다고 했죠? 그 수상한 자들.”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리벨이 말한 건 아스테아 백작가에서 게이트를 고치던 수상한 자들이었다.
시스테인은 그들에게 마력을 부착해 위치를 추적했고, 한참을 집중한 끝에 그들이 머무는 장소를 지도상에서 특정해 냈다.
‘제 마력 민감도로는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당시 시스테인은 지도 위에 꽤 큰 원을 그려 보이며 난감한 듯 말했지만, 리벨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완전 인간 GPS 아니야?
게다가 그가 특정한 위치로 파견한 감찰기사단은 그곳에서 놀라운 걸 발견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