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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24)화 (124/167)

124화

시스테인은 리벨의 손안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가 도와 쓴 벨의 기사 때문에, 시스테인 자신이 저택에 다시 갇히다시피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실제로 그는 그때 폭주의 위험을 여러 번 겪었다. 단순히 그 기사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문 한가운데에 던져진 어린 시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그때, 무력감과 분노와 싸워야 했다. 정확히는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야 했다.

디란타 별저에서 폭주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리벨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시스테인이 말했다.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치 않았다고 해도 명백한 가해였어요.”

리벨은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손으로 눈을 가린 탓에.

하지만 그렇기에 차라리 말을 편히 이을 수 있었다.

“물론 전 시스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그건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그저 설명 한 줄로 지나갔던 것 같다. 어두운 어린 시절을 가졌노라고.

하지만 시스테인에게서 직접 들은 그의 어린 시절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깊은 고통에 갇혀 있었다.

그도 저 자신이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가족과 떨어져야 했고, 그는 저를 억누르지 않으면 가족과 영원히 떨어져야 한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형인 카리스는 그를 적으로 대했고, 황가인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제 폭주를 막을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어떻게든, 오로지 혼자.

리벨은 그가 마음을 닫을 때까지,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 기사가 떴던 날.”

리벨이 속삭였다.

“어렸을 때, 소문이 났을 때, 그때의 기억이 났을 거잖아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스테인은 입을 닫아 버렸다.

그런 그에게 리벨이 말을 이었다.

“시스 기사가 났을 때, 반응하지 않은 거…….”

리벨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왜 디란타 대공가에서, 시스테인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는지.

물론 아무리 대공이라도 규모 있는 신문사를 함부로 대할 순 없다.

그랬다간 제국민들의 입을 틀어막는 폭정이라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하지만 황족모욕죄라면 달랐다.

현 황제의 동생인 그라면 황족모욕죄를 들어, 신문사에 리벨의 신원을 요구할 수 있었다.

신문사를 뒤집어엎어서라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신분을 감추는 데에 능숙하지 못했으니, 그때 수색당했다면 리벨도 틀림없이 정체를 들켰을 터였다.

당시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디란타 대공 전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황가에서 노하실 걸세.’

하지만 대공가에서는 물론이고 황가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번 기사는, 황가에서 신문사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수를 쓴 게 틀림없어.’

황태후 리엔과 현 황제 카리스의 폭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했다.

신문사를 없애면서 이슈를 일으키는 대신, 마치 없는 사람처럼 침묵했다.

그렇게 알음알음 말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 정도로.

그때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벨은 이제 그게 아님을 알았다.

시스테인은 그때 최대한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제가 참는 것이 최선임을 알기에.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황가에 폐를 끼치기 싫어서, 폭주할까 봐 침묵했던 거잖아요. 어릴 때처럼.”

자신만 참으면 모든 것이 조용하게 지나갈 것임을 알기에, 그는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으니까.

리벨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엔 폐하께서는 그때 시스가 저택의 의자 몇 개를 부쉈다고 했는데…….”

그녀는 엉망이 된 침실을 둘러보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화가 나서 물건들을 박살 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겠지.

“그때, 폭주하기 직전이었던 거죠?”

디란타 별저는 수도에서 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억누르고 억눌러서 간신히 저를 잠재웠을 것이다.

리벨의 말에, 결국 시스테인의 무거운 목소리가 답했다.

“……예.”

리벨은 그의 눈을 가린 손을, 아주 천천히 떼어 냈다.

시스테인은 눈을 뜨고 있었다.

마력이 가라앉아 빛은 나지 않지만, 푸른빛의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는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벨은 그를 보다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를 감싸 안았다.

이제 그의 주변에 일렁이던 빛과 마력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미안해요.”

리벨이 속삭였다.

이 말로 끝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건 알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고 해도, 제게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그 문제의 기사를 쓴 건 이 사람에게 명백한 가해였다.

“리벨.”

“제 탓이 아니라고 하지 말고요.”

내 탓이니까.

리벨은 그를 토닥여 주었다.

피로 얼룩진 얇은 슈미즈에, 그의 숨이 닿아 몸이 살짝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직도 그의 숨은 거칠었다. 리벨은 한숨을 삼켰다.

확실히 그가 악몽을 꾼 건, 자기 전의 대화와 관계가 있다.

그날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악몽을 꾸고, 폭주할 정도라면.

그는 정말 내가 수습 기자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리벨이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혹시나, 나중에.”

그녀가 속삭였다.

“제게 실망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는,”

등을 토닥이는 손을 그녀는 멈출 수가 없었다. 마력이 온몸을 스쳐 났던 상처가 지금만큼은 따갑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에, 반응에 온 신경이 쏠려서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마저 울렸다.

“얼마든지 화내도 돼요.”

분노는 폭주를 피해야 하는 그가 제일 억눌러야 하는 감정일 터였다.

“폭주해도 돼요. 오늘처럼. 제 옆에서는 그래도 돼요.”

“다칠 겁니다, 리벨.”

시스테인이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요.”

그녀는 시스테인을 토닥이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속삭였다.

“나만 가라앉혀 줄 수 있다면서요.”

그를 품에서 놓아준 리벨이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두 손으로 시스테인의 양 볼을 감쌌다.

“그러니 내 앞 아니면 어디서 화낼 수 있겠어요. 내 앞에서만 화내야지.”

리벨이 웃어 주었다. 피 섞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침실 안은 이미 난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리벨의 몸 이곳저곳에는 상처가 심하게 났다.

“이 정도 다치는 건 괜찮아요.”

좀 깊은 상처들도 있지만 별수 있겠는가.

다 내 업보 아니겠는가?

리벨은 도 닦는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치료는 그렇다 쳐도.

내일 이 꼴을 볼 사용인들에겐 뭐라고 한단 말인가?

“으으으음…….”

리벨이 머리를 싸매는 사이에도 착실하게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탁.

시스테인은 방 안에 있는 구급상자로 리벨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지막 붕대를 감아 준 그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의사를 불러오는 게 낫겠습니다. 어차피 꾸준히 치료해야 하고, 상처를 숨길 수는―”

“치료는 시스가 해 주세요. 오늘처럼.”

리벨은 나가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의사는 상처가 왜 났는지 분명히 알아내려 할 거예요.”

그럼 상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특히 화상은 왜 입었는지 궁금해할 터였다.

그러다 보면 마력에 의한 상처라는 걸 알아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시스의 비밀이 들통날지도 몰라요.”

그녀가 속삭였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어차피 들킬 일입니다.”

“아니에요.”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시스테인을 이끌어 풀썩, 침대 위에 걸터앉게 했다.

“시스가 준비될 때까진, 들키지 말아요.”

그가 폭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황제 카리스도, 리엔도, 다른 사용인들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런 그를 배척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들 때.

또는, 그들에게 거부당하더라도 혼자 굳건히 설 수 있을 때. 그때 말해요.

리벨이 그리 속삭이며 두 손으로 시스테인의 볼을 감싸 주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시스테인은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리벨은 엉망이 된 방 안을 돌아보았다.

깨진 침대 머리맡 조명은 일도 아니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은 대체 언제 어떻게 날아다녔는지 방구석 엉뚱한 곳에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었고, 화병도 제자리를 벗어나 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리벨 자신까지.

이 방 안에 멀쩡한 건 시스테인 하나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죠?”

사용인들에게 이걸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간밤에 암살자가 침입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방은 엉망이었다.

물론 암살자였다면 들어오지 말라는 얘긴 안 했겠지, 내가!

리벨이 머리를 싸맸을 때였다.

―쿵쿵.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주인님, 마님.”

헬리아의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긴장되니? 나도 긴장된단다.

결국 변명을 생각해 내는 데에 실패한 리벨이 문 쪽을 돌아보았다.

―달칵.

그렇게 문이 열리고, 엉망이 된 방 안과 이곳저곳을 붕대로 감은 안주인을 본 헬리아는 입을 떠억 벌렸다.

“이…… 이게 무슨…….”

“괜찮으십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동한 것인지, 헬리아의 뒤에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방 안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헬리아는 다급하게 돌아서려고 했다. 리벨은 일단 그녀를 막았다.

“의사는 필요 없어.”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입단속하고.”

알려져 봐야 좋을 것 없는 모습이었다. 최대한 기사들과 헬리아까지만 아는 것이 나았다.

기사들과 헬리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방 안만 좀 치워 줄래?”

리벨의 말에 헬리아와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달칵.

결국 문이 닫히고, 방 안으로 들어온 자들이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이 무거운 하녀 몇이 불려 와 방 안을 정리한 것은 물론이었다.

방이 다시 멀쩡해지는 동안, 헬리아가 두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말에는 방 안의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리벨은 인생 최대의 난제에 부딪힌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하지?

문 열고 잤더니 폭풍우가 들이닥쳤어? 하필 운대가리 더럽게 없게도 우리 방에만 닥쳤지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불쑥 말했다.

“부부 싸움이었다.”

“네?”

그 말에는 리벨도,

“예?”

헬리아도,

“예???”

방을 정리하던 자들마저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사이로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간밤에는 미안했습니다, 리벨.”

“…….”

“…….”

방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연기에 어색한 그의 말투가 지나치게 딱딱한 거야 어젯밤에 싸웠으면(?) 그럴 수 있다고 치고…….

그 전에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아무도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왜냐고?

리벨은 제 몸을 새삼 살폈다. 상처투성이인 자신과는 달리 시스테인은 아주 멀쩡했다.

이게 부부싸움이고 다친 게 리벨 자신뿐이라면…….

“용서해 주십시오.”

시스테인이 다시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면, 너무 시스가 쓰레기 같잖아요!!!

리벨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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