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리벨의 말에 카리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뭐?”
섬뜩한 기운이 들었다. 하지만 리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시스는 대공령으로 가기 싫어했어요, 어릴 때부터.”
“가겠다고 자진한 건 시스테인이었다.”
카리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리벨이 생각했다.
카리스는 시스테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원작에서 잠깐잠깐 드러난 그의 모습 역시 그랬으니까.
카리스, 그는 제 어머니 리엔의 사랑도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믿었다. 제 논리 속에서 완벽하게 성립되는 것만 믿었다.
그랬기에 시스테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폭군 황제 카리스가 감정적이고, 얼음 같은 시스테인이 이성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리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 말에 카리스는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리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시스는 두 분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황성에 함께 있기에는 두 분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고요.”
“나와, 어머니가?”
카리스가 되물었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분이요.”
그녀가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가 말했다.
“시스는 두 분 옆에 있고 싶었지만, 두 분께 해를 끼칠까 봐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수도도 아니고 디란타령도 아닌, 수도 근처에 머물게 된 거고요.”
최대한 황성에 들르는 것을 자제하면서.
리벨이 곧은 시선으로 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보고는 싶은데 오진 않는다……, 왜, 언제 괴물이 될지 모르니까?”
카리스가 손을 펴 보였다.
“그럼 지금은?”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리벨이 재차 시스테인을 보았다.
“지금은 괜찮아요. 제가 있으니까.”
리벨은 시스테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다소 차가워진 손이었다.
“시스의 폭주는, 감정이 날뛸 때마다 마력이 반응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감정?”
“네. 분노하거나 슬픈 것처럼 격한 감정일수록 더더욱, 마력을 빠르게 끓어오르게 했다가 폭발하게 만드는 거죠.”
리벨이 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시스테인은 지금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괜찮다는 뜻으로 리벨이 거듭 손을 매만져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 왔다? 내 얼굴을 보면 살심이 들어서?”
리벨은 그 말에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든 사람이 죽이고 싶은 사람과 살리고 싶은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닙니다, 이 양반아!
그때 시스테인이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손에서 힘을 풀지 못하면서도 침착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는 듯이.
“두려웠습니다, 제가.”
잠시 말을 끊은 그가 거듭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폭주할 것 같아서. 그럼 두 번 다시 폐하를 뵙지 못할 것 같아서.”
“흐음.”
카리스가 팔짱을 끼었다.
시스테인을 보는 눈에는 여전히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데. 떨어지지 않고 싶었다…….”
시스테인이 말하는 이유는 카리스의 머릿속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시스테인의 지금까지의 행동은 납득이 되었다.
자진하여 디란타 고개를 제 땅으로 삼았으면서도 그곳에는 자주 들르지 않은 것.
어머니 리엔이 아무리 황성으로 오라 불러도 응답하지 않았지만, 황성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입궁해서 꼭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갔던 것.
하지만 카리스는 그 모습을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시스테인의 얼굴은 시종일관 차갑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리벨의 말대로 어머니와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면?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욱여넣은 기분이었다.
잘 맞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더 많은 조각을 맞춰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이것이 정답인지.
“그렇다고 치지.”
카리스가 긴 침묵 끝에 입을 뗐다.
“반란은 혼자 일으킬 수 없지. 필시 세력이 필요하고 그 세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필레 공작의 세력을 직접 잡아다 바친다면…….”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마지막 의심을 그는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국, 필레 공작의 반역이 실패하여 너를 뒷받침할 세력이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죽으면 너는 황제가 된다.”
그가 손을 펴 보였다.
“뒷배 하나 없는 허울 좋은 황제겠지만 저 구석의 디란타 대공보다는 나은 위치가 되겠지.”
그가 의자 끝에 걸터앉아 물었다.
“네가 어릴 때처럼, 다시 한번 나를 노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폭주를 빌미로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지?”
그가 거듭 물었다.
“마력을 제어할 방법도 찾았잖아. 그 마력으로 내 뒤를 친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한 너를 내가 어떻게 믿어야 할까?”
그 말에는 리벨이 답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약 시스가 반역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이런 말들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카리스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리스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이건 명백한 시스의 약점이잖아요. 마력이 있는 시스는 몰라도 전 그냥 일반인이고…….”
그 말에 시스테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리벨은 카리스의 신뢰를 얻기 위해, 폭군 앞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 위험 때문에 시스테인이 말하지 않으려던 부분을 기어이 말하려는 것이었다.
제 행동에 따라, 카리스는 그가 아닌 그녀를 타깃으로 삼게 될 수도 있기에.
“……”
말리고 싶었지만, 리벨은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달라는 것처럼.
“시스테인이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저 때문이고, 만약 마력을 제어해 폐하를 해치려 한다면 저를 죽여 버리시면 그만이잖아요.”
리벨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카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깔끔한 생각이긴 해.”
그는 리벨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가 계속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럼 다시 시스는 마력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거고, 다시 대공령과 별저만 오가게 될 거예요. 제가 아무리 디란타 별저에 있어도 폐하께서 제 목숨을 거두려 하신다면 막을 수 없을 거고요.”
리벨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즉, 시스는 자신을 조종할 카드와 함께 폐하께 적을 토벌하겠노라, 말씀드린 거예요. 만일 폐하께서 좋은 선택을 하신다면.”
그녀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폐하께서는 마력을 조절할 수 있는 이 시대 최고의 마검사를 얻게 되실 거예요. 그것도 폐하께서 손안에 두실 수 있는.”
카리스는 그 말을 듣다가, 입꼬리에 미소를 띠었다.
날카로운 침묵이 생겼다고 생기는 순간.
“하하하하…….”
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릎까지 치면서 웃던 그가 리벨을 가리켰다.
“그래, 아까 그 가족 운운보다 훨씬 신뢰가 가는 말이야. 일리 있어.”
그는 조금 얼굴에서 서늘함을 걷은 채였다.
“그러니 그 카드인 리벨을 들고 신뢰를 얻으러 왔다. 어렸을 때의 일을 사과하고 싶고.”
이 부분만은 이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원해 시스테인이 제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은 리벨의 말대로 ‘최강의 마검사’를 조종할 패를 손에 쥐게 된다면.
카리스 제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저들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는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예, 그렇습니다.”
의심의 눈길 사이로, 시스테인이 명확하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괴물로 살고 싶지도, 홀로 가둬지고 싶지도, 홀로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카리스가 웃었다.
“디란타령으로 가라는 말이 그리도 싫었나 보지?”
“예, 싫었습니다.”
시스테인의 답은 빨랐다.
“그곳에 갈 때마다, 괴물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만 같아서.”
그 말에 카리스가 차갑게 웃었다.
“좋아. 이번 사건이 끝나면……, 너희들이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지.”
내게 쓸 만한 약점을 쥐여 주었으니.
마력을 조절하는 데에 정말 리벨이 쓸모 있는가는 둘째 치고, 카리스가 보기에 리벨은 아주 쓸모 있는 패였다.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 굴던 시스테인을 일희일비하게 하는 유일한 여자.
그것만으로도 시스테인을 쥐락펴락할 패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대신.”
카리스가 시스테인을 쏘아보았다.
“완벽한 성의를 보여.”
그 말에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의 말과는 다른, 확실하고 시원한 말이었다.
리벨은 순간 카리스를 번쩍 올려다보았다가,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일단, 대화에 진전이 있는 거죠, 이거?
리벨의 밝은 얼굴과는 달리, 시스테인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시스테인의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럼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
카리스는 알현 요청서 뒤에 붙어 있던 서류철을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반역 세력에 대해 정리한 자료였다.
“쓰여 있기로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던데. 내가 이 서류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볼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쓴 것이라 해석해도 되나?”
그 말에 리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전에 황성에도 수상한 자가 잠입했다고 들었어요.”
“맞아.”
카리스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자가 오간 곳을 모두 수색했지만 없어진 것도, 새로 생긴 것도 없더군.”
그가 손을 펴 보였다. 리벨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마신전 사제가 와서 게이트를 설치한 게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교묘하게 숨겨 놓았다든지, 해서.
리벨이 그 말에 고민할 때였다.
카리스가 서류를 다시 흔들어 보였다.
“이 서류에 따르면 우린 근시일 내에 몬스터도 막고 필레 공작도 막고 제국민도 지키면서 대공령에서 남하하는 마물을 처리할 병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스테인이 그 말을 받았다.
“새로 수색해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의 말에 카리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다. 정확한 마신전 사제들의 수나 병력 등은 아직 파악되지도 않은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마물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없지.”
디란타령에 가 본 자들이거나 실력이 월등한 자들이 아니면 마물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탁!
카리스가 의자 옆의 협탁에 소리 나게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디란타령의 마물은 디란타와 네가, 황성의 경비는 저들이.”
카리스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주변 영지의 경계는 황가의 기사들이 한다고 치면……, 마신전에 대한 자료 수색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번 일은 믿을 만한 이들과만 진행해야 했다.
정확히 누가 필레 공작 측에 포섭되었는지, 포섭될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저쪽의 움직임을 알아챈 티를 내 봐야 저들은 숨어들기만 할 테니.
그렇다면 감찰기사단과 황제 카리스 휘하의 인력 외에도 신뢰할 만한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건.”
그때 알현실에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작게 말해서 소리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말하는 사람이 멀리에 있어 그런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쿠우웅…….
거대한 문을 직접 열어젖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연하늘빛 드레스에, 목에는 성직자들의 영대 같은 새까만 천을 걸친 자의 모습이 문틈으로 서서히 드러났다.
“내가 도와주지.”
그건 다름 아닌 리엔 황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