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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47)화 (147/167)

147화

필레 공작의 병력이 시스테인에게 신명 나게 박살 나는 사이.

롤란드 디엘렌은 디엘렌 영지의 감시용 첨탑 중 하나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안달 나게 기다리면서.

그의 망한 두 번의 연애(?)에도 이런 간절한 기다림은 없었다.

“왜 안 오는 거야?”

분명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에 이 앞을 지나간댔는데?

롤란드는 벌써 다섯 번이나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물들이 롤란드 경을 공격할 일은 없을 것이오.’

마사제는 그렇게 자신했지만, 마물 마음을 마물이 알지 사람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무리 마사제들이 조종한다고 해도 삐끗 실수하면 내 모가지는 없는 거 아냐?

그답지 않게 합리적인 생각을 한 롤란드는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마물이 이 앞을 무사히 지나가면, 악전고투를 한 척 기사를 분장시켜 황성에 보고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필레 공작의 집사가 전해 준 필레 공작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 덕에 그 짧은 명령조차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냥 아랫놈들 시킬 걸 그랬나?”

하지만 저보다 더 덜덜 떠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랫것들을 시켰다간 일이 꼬일 것 같았다.

“에이씨.”

마사제는 분명히 나 공격 안 한다고 했다고!

그는 애써 자신을 가라앉히며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 갔다.

“이쯤이면 분명 온댔는데.”

이 일만 끝나면 난 새 시대의 영웅이 된다!

처음 필레 공작의 계획을 듣고, ‘길만 내주면 된다’는 이야기에는 크게 당황했다.

공작은 수도 근처의 주요 영지 중 힘 있는 가문 몇몇이 협조하기로 했다 해도, 아직은 마물이 지나다닐 길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런데 디엘렌이 길을 내준다면 그 앞은 마물에 대항할 힘도 없는 영지들뿐이니, 디엘렌만 길을 내어 주면 된다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제 영지는 황가의 특별관리대상입니다. 길을 내 드리고 싶다고 해도…….’

‘그렇기에 내가 롤란드 디엘렌 경을 꼭 보고 싶었던 걸세.’

이 일은 명백하게 반역 모의다. 그런데 황가의 특별관리대상인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의문을 가졌던 롤란드는 곧 필레 공작의 계획에 무릎을 탁 쳤다.

‘자네의 영지에는 황가의 기사들이 와 있지. 우린 최대한 황가의 기사들을 밖으로 끌어내야 하고.’

‘계획이 시작되기 한 달 전부터 자네의 영지엔 몬스터가 끓을 걸세. 그 몬스터를 잡으러 황가의 기사들은 점점 더 자네의 영지에 내려가게 되겠지.’

‘물론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거사가 시작되면, 미리 자네의 영지에 풀어 놓은 자들로 기사들을 제거할 테니.’

한자리에 모인 자들을 습격해 없애는 건 쉬운 일이다.

그렇게 황가의 기사들을 최대한 디엘렌 영지로 빼는 한편, 롤란드는 제 영지에서 움직이는 황가 기사들의 움직임을 필레 공작에게 보고한다.

그들이 혹시 이쪽의 계획을 알아채고 움직임이 달라지진 않았는지.

‘이건…… 저만이 할 수 있는 거군요.’

‘그래. 자네가 중요해.’

필레 공작과의 대화를 생각하며 롤란드는 침을 꼴깍 삼켰다.

황가 기사들의 움직임은 이미 보고했다. 그러니 이 일만 해내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마물이 오기로 한 길에는 마물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올 때가 다 되었기에 기사들을 시켜 동물의 내장을 죽 늘어놓은 길이었다.

“…….”

햇빛 받은 내장들이 솔솔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도 마물들은 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지? 설마…….”

롤란드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일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럼 길바닥에 내장 늘어놓고 있던 걸 누가 보면 뭐라고 해명하지?

사실 내가 내장 관찰하는 취미가 있다고?

그런 말을 했다간 사교계에서 따돌려지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게다가 십중팔구 수상한 꼴이니 다시 감찰기사단에 끌려갈 터였다.

“아냐,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그가 고개를 휙휙 저었을 때였다.

―타닥, 타그닥!

멀리서 뭔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온, 온다!”

롤란드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한데?

마물이 말을 닮은 모양인가?

고민하던 그가 첨탑에서 고개를 쭉 내밀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타닥, 탁…….

그리고 말발굽 소리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그가 인상을 썼다.

“뭐야, 기사들이었나?”

그냥 지나가는 기사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득 뒤에서 질문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저 내장들을 따라서 마물들이 간다는 말씀이십죠?”

이건 오늘 그가 화장실 간 횟수만큼 들은 질문이었다.

롤란드가 얼굴을 팍 구겼다.

“그렇다니까.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러자 뒤에선 떨리는 목소리가 거듭 들려왔다.

“그, 그럼 저희들을 해치지는 않겠죠?”

“안 그런다잖아. 그냥 우리 영지는 지나갈 뿐이야.”

그렇게 믿고 싶은 거지만. 긴장을 안 한 척 대범하게 답한 롤란드의 목에, 불쑥 검이 들이대어졌다.

“????”

날카로운 검은 첨탑에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그럼 그 얘기 아주 상세하게 듣고 싶은데.”

아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롤란드가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이기도 했다.

설……마…….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서 있는 건 감찰기사단의 시엘이었다.

또 이놈이냐!

결혼식 때도 왔었잖아! 롤란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또 뵙네요. 우리 자주 보면 안 좋은 사인데.”

여상스럽게 말한 시엘이 감찰기사단 신분증을 흔들어 보였다.

“잠시 본부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옆에는 이미 디엘렌의 하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하인인 척 말한 건 시엘 옆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흠흠, 그 기사가 몸을 가다듬었다.

“제 성대모사 어땠습니까?”

롤란드는 몰랐지만, 그 기사는 다름 아닌 감찰기사 레오였다.

연기로는 감찰기사단에서 탑을 달리던 그였지만 최근 단장님 내외와 함께 잠입한 이후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사라진 그였다.

“속았잖아. 잘했네.”

그 말에 시엘은 가볍게 답했다. 그러자 레오의 얼굴이 확 폈다.

“저 아직 은퇴 안 해도 되겠죠?”

시엘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레오를 돌아보았다.

이놈이 요즘 대체 왜 이래?

“헛소리할 거면 수갑이나 채워.”

자신감을 조금 회복한 것 같은 레오와 시엘은 롤란드를 가볍게 체포했다.

―철컥!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허망한 표정을 짓는 롤란드에게 시엘이 말했다.

“최근 황성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세력의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감찰에서는 자수하는 자들에게 그나마 나은 형벌을 내리시도록 황가에 청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그러니 부디 이번 사건의 증인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롤란드 디엘렌 경.”

그 말에 롤란드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무무무물론이다. 내, 내가 이번 계획의 주주, 중심이거든.”

그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망한 거야? 나만 들킨 건가? 내가 뭐 실수한 건가?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 감찰기사단에게 체포되었으니, 걸린 이상 증인을 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모처럼 자수하면 선처한다고 하지 않는가?

롤란드가 눈을 반짝였다.

리벨이 그 꼴을 보았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터였다.

그 선처는…… 살려 준다는 게 아니고 그나마 곱게 죽여 준다는 거야……. 하면서.

*  *  *

“컥…….”

바닥에 널브러진 건 모두 필레 공작의 기사들이었다.

이제 필레 공작이 데려온 기사들은 1/3 정도만 남아 있었다.

“항, 항복이…… 커억!”

시스테인은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어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미 한번 반역에 몸담고, 카리스에게 검을 겨눈 자들이었으니까.

감히 태양에게 검끝을 겨눈 대가는 치러야 할 터였다.

“…….”

그리고 3층 테라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벨은, 어느 순간부터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주고 있었다.

손에는 하얀 손수건을 꽉 쥔 채였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

그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손수건.

‘피를 싫어하시니, 이걸로 눈을 가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이 건물에 리벨을 데려다주면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기엔 참 애매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손수건으로 눈을 가려 버리면 시선을 받을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다.

―팍!

“쳐, 쳐라!”

“막아!”

그렇게 외치는 필레 공작의 기사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스테인에게 신나게 썰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

리벨은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 있어 몰랐지만, 카리스의 눈에는 현장이 명확하게 보였다.

시스테인의 강대한 마력이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땅의 흙먼지가 팍 튀어 올라 피 묻은 시신들을 가리는 모습을.

“…….”

카리스는 그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흘끗 옆을 돌아보니 리벨은 한참 전부터 전장에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피를 무서워하나 보지?

어차피 제 피부 아래에 흐르는 것이 피인데 뭐가 무섭단 말인가?

카리스는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싸우는 중간중간 시스테인의 시선이 리벨을 향하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스테인은 마력으로 바닥을 내리쳐,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명백히 리벨을 위한 행동이었다.

“…….”

카리스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아무리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무딘 그라지만, 피를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피를 덮어 주는 것이 시스테인의 배려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 ‘배려’를 하는 사람이 시스테인이라는 점이었다.

“시스테인…….”

그가 제 동생의 이름을 뇌까렸다.

그가 지난 십수 년간 본 것은 동생의 차가운 벽안뿐이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눈은 얼음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그 눈 아래에 무슨 감정이 숨어 있는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시스테인이, 저렇게 드러나게 리벨을 감쌀 줄은 몰랐다.

“약점이라고 했던가.”

폭발음과 비명,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그의 뇌까림은 흩어져 버렸다.

확실히 리벨 폰 디란타는 시스테인의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시스테인은 보란 듯이 제 앞에 드러냈다.

‘신뢰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다.

카리스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순간이었다.

“……!”

아래에 있던 시스테인과 카리스의 눈이 마주쳤다.

카리스는 저도 모르게 테라스 난간을 꽉 쥐었다.

시스테인의 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잠깐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열기마저 느껴지는 푸른빛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날처럼.

―파앗!

그 순간 시스테인의 검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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