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카리스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순간이었다.
―쌔액!
시스테인의 검이 베어 낸 건 필레 공작의 기사였다.
카리스는 시스테인의 푸르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그 잠깐 사이, 어릴 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날의 시스테인도 저랬다.
‘너 눈이…….’
카리스가 그의 푸르게 빛나는 눈이 기이하다고 느낀 그다음 순간부터, 시스테인은 괴물이 되었다.
‘전하!’
이상함을 느낀 기사들이 카리스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건 헛된 희생에 불과했다.
‘커억!’
그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나동그라졌고, 카리스는 괴물 앞에 서 있었다.
‘―퍼억!’
그날 시스테인이 휘두른 손에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 했다.
그 공포, 덮쳐 오는 해일을 보는 것 같은 그 무력감은 아직도 카리스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
그래서인지, 시스테인의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릴 때도 저런 푸른빛이 나는 눈으로 자신을 보았고, 그건 천재지변처럼 자신을 덮쳤으니까.
어린 카리스는 몸을 틀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게 고작이었다.
“…….”
카리스가 주먹을 꽉 쥔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돌려졌다.
“죽어라!”
달려드는 필레 공작의 기사들에게.
―쩡!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시스테인의 검에 맞닿은 기사들의 검은 깨져 나갔다.
“!”
시스테인은 놀라는 기사의 가슴에 검을 꽂고, 돌아서서 뒤를 치려는 자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휙!
하지만 이제 남은 자들은 제법 실력자들뿐인지, 그의 검을 피해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세 명이 한 조로 뭉쳐 그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
시스테인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불쾌하다.
물론 저런 전술이야 디란타의 기사들이나 제도기사단도 쓰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그건 거대한 마물이나 상대하기 힘든, 괴물을 상대할 때 쓰는 전법이었다.
괴물을 상대할 때.
그 사실을 상기하는 순간 그는 시야가 붉어지는 걸 느꼈다.
진정하자.
“하.”
그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붉어진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괴물.’
그 단어가. 방금 마주친 카리스의 두려움에 질린 시선이 자꾸 생각나서.
‘…….’
담담하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듯했던 카리스의 시선은 아주 잠깐 떨렸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어린 시절의 시스테인이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시스테인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흥분해선 안 된다.
안 되는데.
―퍼억!
그는 점점 상대를 검으로 베어 내는 게 아니라, 짓뭉개고 있었다.
마력을 폭발시켜 거칠게 제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시스테인은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힘, 힘을 숨겨 두었다니……!”
필레 공작의 기사들이 경악했다.
힘을 숨긴 게 아니라 지금까지 쓰지 않으려 억누른 것이 터져 나오려는 것이지만, 그들이 시스테인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쨍!
이성적인 검로에서 벗어나 기이하게 꺾인 시스테인의 검을, 기사 한 명이 본능적으로 쳐 낸 순간이었다.
―퍼억!
시스테인은 마력이 담긴 손으로 그자의 몸을 쳐 내 버렸다.
그는 단말마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
그 모습에 기사들의 대열이 흐트러지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시스테인의 검과 마력이 춤추듯 기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악!”
―콰쾅!
비명과 폭음이 전장을 뒤덮었다.
시스테인의 머릿속을 그 순간 지배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없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슬리는 것을 치우려는 순간이었다.
“시스.”
문득 청량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시스테인의 붉은 시야가 거짓말처럼 맑게 개었다.
그리고 그는 제 앞에서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의 필레 공작을 발견했다.
그는 시스테인이 든 검에 꿰이기 직전이었다.
“……아.”
짧게 숨을 터뜨린 시스테인이, 필레 공작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 버렸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필레 공작이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스테인이 검을 갈무리했다.
이자는 아직 죽여서는 곤란했다.
왜?
왜냐면…….
반쯤 돌아온 시스테인의 이성이 길을 헤맬 때, 리벨의 목소리가 보다 가까이에서 울렸다.
“시스, 이제 그만.”
그녀의 목소리에 시스테인의 이성은 완전히 길을 찾았다.
필레 공작은 반란의 주동자였다.
황제인 카리스가 직접 처단해야 했다. 많은 자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으……!”
필레 공작은 어차피 도망칠 힘도 없는 듯했다.
순식간에 전력을 모두 잃은 그는 두 다리에 힘이 다 풀린 상태였다.
시스테인은 그런 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리벨을 돌아보았다.
“리벨.”
원래 리벨이 이 전장에 내려오는 건 계획에 없었다.
위험하니까.
그녀는 마력이 난무하는 전장에 겁도 없이 뛰어든 것이었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리벨이 있던 3층 테라스를 훑었다.
리벨이 저곳에서 뛰어내렸을 리는 없으니, 제가 날뛰기 시작했을 시점부터 리벨은 계단을 달려 내려와 제 앞에 선 것이었다.
그 증거로 리벨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만, 많이 지쳤어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멈칫했다.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지친 건 리벨이었고, 그는 오히려 마력이 들끓는 상태였다.
하지만 리벨은 거듭 속삭였다.
“화를 풀 곳은 따로 있잖아요.”
그녀는 눈이 아직 푸르게 빛나는 시스테인에게 다가가, 그 눈을 두 손으로 가려 주었다.
안온한 어둠이 시야를 잠시 가리는 순간.
시스테인의 눈에서 푸른빛이 사라졌다.
“…….”
날뛰는 시스테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테라스 위의 카리스는, 검을 도로 집어넣어 버렸다.
“제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완전히 짐승을 꿴 목줄이 아닌가?
카리스가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의 호위를 위해 조용히 나타난 암살자들도 보고했다.
“살기가 없어졌습니다.”
카리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 있어.”
암살자들은 나타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리벨.”
그러는 사이, 시스테인은 숨을 골랐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스테인이 다시 숨을 내뱉었다. 리벨은 흘끔 필레 공작을 살폈다.
저놈 튀진 않겠…… 쓰러졌네?
목전까지 다가온 목숨의 위협에 심박동이 재정렬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벨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시스테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가요.”
그가 화낼 곳. 진짜 힘을 보여 줄 곳으로 이제 가야 했다.
필레 공작의 병력을 처치하면 곧바로 가기로 했으니까.
“…….”
“…….”
리벨과 시스테인이 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시스테인의 벽안에는 기묘한 푸른빛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평소와 같이 가라앉은 이성적인 눈동자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시스테인이 입을 뗐다.
그 말에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타탁!
검을 갈무리한 시스테인은 리벨을 안아 든 채 도약했다.
“꺅!”
안길 줄 몰랐던 리벨이 지르는 작은 비명이, 카리스의 귓가를 스쳐 금세 멀어져 갔다.
카리스는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보면서 팔짱을 끼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혼자는 반란이 불가능하다.
권력을 즐기려면 그를 모셔 줄 다른 자들이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방금 이 나라에서 반란이 가능한 유일한 세력을, 시스테인은 제 손으로 처리해 버렸다.
게다가 조금 전 보여 준 힘은, 황성의 모든 기사가 덤빈다 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이었다.
리벨, 단 한 명의 목소리만이 그를 막을 수 있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거지.”
카리스가 뇌까렸다.
반란을 일으킬 힘은 있지만 시스테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카리스로서는 아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필레 공작을 가리켰다.
“저거, 끌고 가.”
기분이야 기묘했지만 하나는 확실해졌다.
시스테인이 카리스 자신을 죽이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주변에 대(對)마물 마법진은 물론 암살자까지 모두 빠짐없이 대기시켜 놓았다.
계획상 강대한 마물이 쳐들어올 경우 발동시키려는 것이었지만, 마력에 민감한 시스테인은 알았을 것이다.
그게 여차하면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마법진은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예!”
그의 명령에 암살자들이 필레 공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으, 으어어!”
끌려가다 말고 정신을 차린 필레 공작이 미약한 저항을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떠도 그대로인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가 멍청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카리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웃기는 계획을 세웠더구나, 내 사촌이.”
그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