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리벨과 나인을 포함한 몇몇 그림자, 그리고 시스테인은 2층의 시종 숙소에 있었다.
―우우웅!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까 시스테인이 들어갔다 나온 게이트였다.
그들이 저것을 넘어가면 이제 이 계획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모든 마물의 근원, 디란타령의 마물 게이트를 없앤다.
그리고 지금쯤 남하하고 있을 디란타령의 마물들을 모조리 처리한다.
그로서 마물과의 긴 전쟁을 마무리하고, 필레 공작의 잔당과 마신전을 처리한다.
“준비되셨습니까.”
시스테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테인은 그녀를 보면서 다시 말했다.
“괴물과, 괴물들의 땅으로 함께 가는 겁니다, 리벨.”
그 말에 리벨은 그를 돌아보았다. 곧게 뻗은 그녀의 검지가 그의 입술 위에 얹어졌다.
“그 표현 금지.”
그녀의 말에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그는 아까의 자신을 떠올렸다. 불과 조금 전. 필레 공작을 없애 버리려던 자신의 모습을.
왜 없애면 안 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이 날아가 버렸던 자신의 상태를.
그는 저를 더욱 믿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그 안의 괴물은 순식간에 그의 이성을 밟아 버리고 몸을 차지했다.
잠시간 평정을 잃었다는 이유로.
이런 내가 리벨을 지킬 수 있을까.
시스테인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거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리벨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에요.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시스테인은 그 웃음이 묘하게도 자조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짓말쟁이라 잘 알아요.”
그녀의 이어진 말에는 더더욱 그랬다.
리벨 역시도 제가 저도 모르게 덧붙인 말에 놀라 버렸다.
하지만 그건 정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와의 사이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건 늘 리벨 자신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의 침묵 끝에 리벨이 말했다.
“아까 내 목소리 듣고 멈췄죠?”
시스테인은 잠깐의 텀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시스가, 시스의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시스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리벨이 해낸 겁니다.”
“아뇨, 시스가 한 거예요.”
리벨의 자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전 조금 도와준 것뿐이고요.”
자전거 처음 배울 때 뒤에서 잡아 주는 것처럼.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잡아 주는 척하면서 안 잡아 줘도, 자전거는 굴러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마력을 스스로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스는 저도, 카리스 폐하도, 리엔 폐하도 해치기 싫은 거잖아요.”
그래서 멈춘 거고.
리벨은 그의 볼을 손으로 감싸 주었다.
피가 조금 묻어 있지만 그의 피는 아니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리벨이 말을 이었다.
“그 마음 하나면 돼요, 시스. 난 시스를 믿어요.”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두 분도 시스의 비밀을 알잖아요. 더는 억누르고 숨길 필요가 없잖아요.”
뿐만 아니라 계획에 동참한 많은 감찰기사들과 그림자, 암살자들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끝나고 다 같이 모이면, 그분들 앞에서 웃어 주세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눈을 크게 떴다.
“리엔 폐하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시스가 웃는 얼굴.”
그 말에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어 버렸다. 리벨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저도요.”
리벨이 굳은 그의 입꼬리를 엄지로 살살 만져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어요.”
그녀의 속삭임이 시스테인의 머릿속을 메웠다.
리벨도 떨렸다. 안 떨린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이 자신을 해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마물들의 땅에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일 뿐.
그러니 할 수 있었다.
“가요.”
리벨은 그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떨려도 떨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리벨 자신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을 것은 시스테인이기에, 리벨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탁.
그의 손을 잡은 리벨의 발걸음이 게이트로 향했다.
―후욱!
그리고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싼 풍경이 바뀌었다.
* * *
두 사람과 네 명의 그림자가 디란타 대공령에 서게 되었다.
리벨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웬 바늘을 꺼내는 것이었다.
“후우.”
이번 일의 가장 막중한 임무였다.
그녀는 바늘로 손끝을 쿡 찔렀다.
“아야.”
그래도 칼보다는 익숙했다. 속 안 좋으면 손을 땄던 한국에서의 기억이 크게 도움 되었다.
물론 피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피를 이끌어 내는 건 시스테인의 마력으로도 충분했다.
―파앗!
그리고 리벨의 피가 연둣빛 빛을 흩뿌리며 허공으로 떠오르자, 게이트는 금세 반응했다.
―우우웅! 우우우웅!
불안하게 흔들리던 게이트에, 핏방울이 가까워질수록 구멍이 송송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지직!
게이트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시스테인은 게이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리벨의 손을 지혈해 주었다.
새하얀 손수건에는 피가 아주 찔끔 묻어 나왔다.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괜찮죠.”
그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피를 낸 자신보다 오히려 시스테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제가 아무리 여기 온 사람 중에 최약체라도 피 열 방울 뽑았다고 쓰러지진 않아요.”
그녀가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싸울 순 없어도 이건 자신 있다!
이 중에 헌혈 경험은 내가 최강이다!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의 당당한 시선과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깃든 한숨이었다.
이거 조금 피 뽑았다고 그렇게 놀라면, 큰 게이트 없앨 땐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물었다.
시스테인의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예. 아까 왔을 때 미리 파악해 두었습니다.”
사실 파악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마물이 들끓는 이 땅.
그가 10대부터 한없이 맴돌았던 디란타 대공령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거대한 마물 게이트를 지우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저쪽으로 직진하면 됩니다.”
시스테인의 말에, 리벨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
유독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언덕이 보였다.
잡초가 무성했지만, 잘 보면 수도 없이 밟힌 듯 앙상해 보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잡초를 밟은 흔적은, 무슨 거대한 공룡이라도 왔던 것처럼 거대했다. 땅이 파인 곳도 있었고.
아마 거대한 발톱이 파낸 것이리라.
“…….”
리벨은 새삼 긴장감에 어깨를 굳혔다.
저런 것들과 상대하러 가는 것이다.
리벨은 시스테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도 할 수 있다. 시스가 있고 내가 시스를 믿으니까.
“그럼, 끝내러 가요.”
리벨이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시스테인은 다시 한번 마물 게이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가 게이트를 봤다는 언젠가와는 달리 게이트를 없앨 방법을 가지고.
무엇보다 이성을 유지한 채로 갈 것이다.
―우우웅!
시스테인이 마력을 일으켜, 일행의 몸을 천천히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
그림자들은 멈칫했지만 곧 마력에 순응했다.
시스테인은 걷는 대신 땅을 미끄러지듯 이동하려는 듯했다.
하늘로 날아가면 빠르기야 하겠지만, 마물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까.
“마음껏 마력을 써요. 제가 잡아 줄 테니까.”
서서히 몸이 움직이는 걸 느끼며, 리벨이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벨의 눈은 시스테인에게 말하는 듯했다.
당신이 괴물이 아니란 사실을, 이건 당신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이란 사실을 내가 알려 주겠다고.
리벨은 시스테인이 지금껏 살며 만나 본 어떤 사람보다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어떤 상태가 되었든 제 옆에 있어 주었으니까.
“……예.”
그러니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스테인의 마력이 일행을 빠르게 움직였다.
―크오오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반응한 마물들이 곧 몰려오기 시작했다.
평온한 여정은 아닐 거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 * *
한편 인간들이 복잡한 일을 벌이는 사이, 디란타 대공령에 살던 마물과 몬스터들은 환호했다.
“크아아!”
평소와는 달리 자신들을 가로막는 인간들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쯤 되면 원래 인간들의 저택에서 저 귀찮은 기사들이 나와 그들을 가로막아야 했다.
제 목숨은 아깝지도 않다는 것처럼 몸을 던져 가면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퇴, 퇴각하라!”
인간 기사들은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꽁지 빠지듯 달아나 버렸다.
그만큼 마물들은, 아군은 많았다.
“더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기사들이 물러나는 꼴을 보며, 마물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크르르!
그들은 기사들을 비웃으며 전진했다.
처음엔 저 기사들을 씹어 먹을까 했지만, 그들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 마력 가득한 땅을 벗어나면, 저 밖엔 먹을 것이 더 많을 거야.」
마물 중 누구도 이 땅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들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아니, 본능을 이끌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마물들에게 계속해서 속삭였다.
「좋은 것을 줄게. 바깥으로 나가자.」
「밖에 더 맛있는 것들이 있어.」
「그러니 저것들은 나중에 즐기자.」
목소리는 끊임없이 마물들을 유혹했다.
―크아아!
―크릉!
마물들은 그 목소리에 제각기 괴성으로 환호하며 대공령을 내달렸다.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 남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