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시스테인이 거듭 물었다. 리엔은 곤란함에 몸부림치는 리벨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손을 펴 보였다.
“너희가 결혼한다고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체…….”
시스테인이 이마를 짚었다. 그는 결혼 전 리벨에 대해서 수없이 조사했지만 중요한 정보는 전혀 손에 쥘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눈앞에 둘이나 앉아 있었다.
“왜 안 알려 주신 겁니까?”
왜 제가 정보를 얻는 걸, 차단하신 겁니까? 그가 묻는 건 리엔과 카리스에게였다.
“그야 처음에는.”
그런데 그 말에 리벨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스테인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지만, 눈을 가리고 있던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찔리니 뱉었을 뿐이었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다시 리엔과 카리스가 흥미롭게 두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죽일 것 같았거든요.”
리벨이 슬그머니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스가 그때 이야기를 하면 괴로워했잖아요.”
그 말에는 시스테인과 리벨 둘 다, 폭주하던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리벨만은 몰랐지만 둘 사이의 갑을 관계는 뒤집혀 버렸다.
시스테인의 입매가 아주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녀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었든, 그녀가 그날 밤 그를 품어 주고 안아 주면서 그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 주었기에.
그리고 그가 어릴 적부터 원하던 가족과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기에.
그는 마냥 리벨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탓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정답을 피하지 않았다.
“다 그 기사 때문이었습니까. 떠나려던 것도, 거짓말쟁이라고 했던 것도.”
그 말에 결국 리벨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럼 어떻게 그걸 쓰고 옆에 있어요!”
사람이 염치가 있지!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리던 리벨이 결국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박아 버렸다.
“아니, 그―”
“완전 거짓말로 기사를 썼는데!”
시스테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시스테인이 멈칫했던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그야 오해할 만하기는 했습니다. 라이아 약초는 애초에 그런 용도로 쓰인다고…….”
촌극이 따로 없었다. 화낼 줄 알았던 시스테인은 오히려 멀쩡했고, 리벨에게 화내는 건 리벨 자신이었다.
시스테인은 오히려 그녀의 변명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그리고 당황하는 시스테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 리엔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아주, 아주 만족스러웠다.
“……계획은 제대로 이루어졌군요.”
카리스는 그 꼴을 보면서 감탄했다. 처음 ‘시스테인의 감정 되돌리기 작전’ 같은 계획을 리벨의 입에서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다 개소리인 줄 알았다.
근데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다니.
무서울 정도의 변화였다.
“응. 아주 제대로.”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관객들이 만점을 주는 가운데 촌극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팩트로 기사를 쓴 게 아니잖아요! 내가 슈랑 다를 게 뭐야!”
―퍽! 퍽!
리벨이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박아댔다.
“슈레기야, 슈레기!”
슈 같은 쓰레기! 리벨이 머리를 마구 박아대자 시스테인이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감쌌다.
“그때는 저에 대해 모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충분히 할 만한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밤일 능력을 증명했으니 화가 안 난다?”
카리스가 튀긴 옥수수를 먹다 말고 끼어들었다.
그 말에 리벨의 머릿속은 아예 새까매져 버렸다.
부끄러움과 곤란한 마음과 미안함과 온갖 감정이 뒤섞인 것이 머릿속을 펑 터뜨려 버렸다.
“알자마자 정정 기사 냈어야 했는데! 늦기 전에 정정 기사 냈어야 했는데!”
내가 왜 기사 낼 생각을 못 했지?
물론 벨 기자의 이름으로 <[단독] 사실 디란타 대공 밤 능력 뛰어나……> 같은 기사를 썼다간 엄청난 스캔들이 터졌겠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런 개연성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첫날밤에는 딴 놈 이름 부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고자라고 기사 쓰고! 대체 나랑 왜 결혼했어요!?”
나 같은 쓰레기가 세상에 또 어딨냐!
리벨이 다시 이마를 박아 대기 시작했다. 시스테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리벨의 입에서는 의식의 흐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나 이혼당해도 괜찮아요! 준비됐어요! 이런 쓰레기랑 사는 건 다시 생각해 봐요!”
으아아아아아! 리벨은 결국 소파에 철퍽 엎어져 버렸다.
한 나라의 황제와 황태후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으므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소파에 널브러지든 바닥에 널브러지든 다른 데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첫날밤에 뭐?”
리엔과 카리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보력이 좋은 그들이었지만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야 당연했다. 첫날밤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속삭였는지까지 보고받진 않으니까.
덕분에 엄청나게 흥미로운 정보를 들은 두 사람이 모자답게 나란히 입을 벌렸다.
“첫날밤에 딴 놈 이름을 불렀어?”
“누굴?”
“설마 롤빵인가 뭔가 하는 걔?”
나란히 쏟아지는 말에 리벨은 발광하던 몸을 우뚝 멈춰 버렸다.
내가 뭐까지 씨불인 거지?
사실 없어져야 하는 건 이놈의 손모가지가 아니고 입이 아닐까요?
“그 일은 잊었습니다, 리벨.”
잊었으면 아는 척을 하지 마!
시스테인의 위로는 리벨의 양심을 땅에 묻고 비석까지 세우고 있었다.
“으아으아아!”
흘러넘치는 업보 사이로 헤엄치는 동안, 시스테인이 이마를 짚었다.
“저 진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짧은 침묵 후에 리벨이 발광을 멈췄다. 그리고 작게 뇌까렸다.
“밤에 사과하려고 제가…….”
마음의 준비도 하고, 기사도 준비하고, 혹시 폭주하면 막아 주려고 사용인들도 다 나가 있으라고 했는데!
이래서야 발광만 한 꼴이었다.
리벨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차마 시스테인을 보지 못한 채 말했다.
“제가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데 찬 바람 조금만 쐬고 오면 안 될까요? 정말 제정신으로 와서 사과하고 싶거든요?”
리벨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폭소한 리엔과 카리스는 나란히 손짓했다.
“가.”
“나가 봐.”
그러자 리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시스테인도 막을 수 없는 대단한 속도였다.
“…….”
그렇게 리벨이 사라진 자리에 애매하게 손을 뻗은 시스테인과, 쿡쿡 웃는 두 사람만이 티타임 자리에 남았다.
리벨이 발광하던 흔적이 선명했다.
시스테인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엎지른 찻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멍하니 그녀가 나간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민 중이었다.
따라…… 나가도 되는 건가?
혼자 계시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녀가 곤란해하는 건 시스테인 자신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리벨이 한 일 때문이었지만 그걸 풀어 줄 수 있는 건, 용서해 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표정 걸작이다.”
카리스가 그런 시스테인을 보면서 감탄했다.
“시스에게도 이런 표정이 있었지. 그래.”
리엔도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의 계략 아닌 계략에 당했다는 걸 알아차린 시스테인이 이마를 꾹꾹 눌렀다.
곤란한 얼굴의 그에게 리엔이 물었다.
“뭐 해, 안 쫓아가고?”
“……따라가면.”
시스테인은 리엔을 보았다가 다시 리벨이 나간 문을 돌아보았다.
“곤란해하실 것 같아서요.”
“아니지. 너희 일이잖아.”
리엔은 그 말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대로 두면 아가는 우리 앞에서 너와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걸 더 곤란해하지 않겠어?”
리엔의 말에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재밌는 건 다 봤으니, 이제 나가 봐.”
리엔의 말에 시스테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벨이 밤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그녀의 정체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리벨에게 유독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리엔이 흥미로워할 이야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예 형 카리스와 함께 크라이베리 건물을 사는 것도 모자라 드레스까지 치밀하게 보낼 줄은 몰랐다.
“장난이 심하셨습니다.”
시스테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엔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는 손을 펴 보였다.
“오랜만의 티타임인데 이런 이벤트도 있어야지. 무엇보다.”
그가 바깥을 가리켰다.
“쟤 꼴을 보니까 너희 둘이 얘기했으면 한 삼 년은 땅 파고 있었겠다.”
그건…… 그랬다. 결국 시스테인이 몸을 일으켰다.
리벨을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밤의 화원은 조명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벨은 최대한 조명이 없는 쪽에 처박혀 있었다.
얼굴은 아직도 달아오른 채였다. 얼굴에 달걀 깨뜨리면 익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뭐뭐라고하지?
아니, 애초에 도망칠 게 아니었는데!
찬 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아까 곤란해하던 건 오히려 시스테인이었다.
“왜 당한 사람이 더 곤란해하고 있어?”
시스, 그렇게 안 봤지만 호구죠? 그런 거죠? 리벨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지?
리벨이 머리를 싸맬 때였다. 어떻게든 정상적인 정신머리로 가서 사과해야 했다.
얼버무리며 넘어가긴 싫었다. 그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근데 이게 뭐람. 리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치겠네…….”
부끄러운 짓도 제가 다 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과해야 할 자리에서 튀기까지 했다.
나는 노답 쓰레기다!!!
소리 없이 외친 리벨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사락.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났다. 리벨이 움찔했다.
주변을 감싼 풀잎을 헤치고 보니, 화원의 은은한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이 보였다.
“리벨?”
시스테인이었다. 리벨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제 앞을 스치는 익숙한 푸른색 꽃을 발견했다.
또 하필 그녀가 숨은 곳은 라이아 약초 화단이었다.
이 풀때기는 나랑 연이 안 좋나 봐! 리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리벨.”
그때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정확히 돌려졌다.
백 미터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사람인데, 그녀의 기척을 놓칠 리가 없었다.
―탁.
시스테인이 다가올수록 리벨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눈 마주치면 뭐라고 하지? 죄송해요? 밑도 끝도 없이? 그게 진짜 마음을 담은 사과로 들릴까?
리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다가오던 시스테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말했다.
“저와 마주하기 싫다면, 마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리벨은 기겁했다.
“사람이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제가 시스를 싫으읍.”
저도 모르게 답한 리벨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