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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62)화 (162/167)

162화

오늘 물론! 내 정체를 밝히려고 했지만!

리벨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밝히려고 마음의 준비 하고 있다가 끌려온 건 맞지만! 이렇게 모두 앞에서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다고요!

충분한 준비와! 어! 어지간하면 술도 좀 깔고! 어! 맨 정신 아닐 때……는 아니지.

맨 정신으로 사과해야지…….

리벨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슬그머니 소매에서 기사 봉투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시스테인 보여 주려고, 아니 신문에 올라간 걸 보여 주려고 했으니까.

그때였다.

―툭.

종이 봉투에서 종이 하나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필 앞면으로 떨어진 건 사진이었다.

“……?”

모두의 시선이 그 사진에 꽂혔다.

그건 분명 전투 중인 시스테인의 뒷모습이었다.

“오.”

카리스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리엔은 감탄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그러는 가운데 리벨은 꽁꽁 얼어 버렸다.

“사, 사진이―”

떠떠떠떨어졌네요! 그렇게 리벨이 뒤늦게 사진을 수습하려는 때.

슥, 시스테인이 제 사진을 집어 들었다.

리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마망했다!

준비되지않은리벨앞에갑자기닥친위기!

신이시여제게여섯시간만더달라고요마음의준비를!

“이건…….”

사진을 살피던 시스테인이 리벨을 돌아보았다.

“대공령에서 찍으신 것이군요.”

그의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카리스의 눈이 흥미로 번쩍였다.

“이번에 갔을 때?”

“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스테인 본인을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진이 아무리 마력 폭발 덕에 배경이 거의 다 가려졌다고 해도, 저 광경을 만든 건 시스테인 본인이었으니까.

“신문에 실어 드리려고 했는데…….”

이왕이면 그의 모습이 나가게 될 거, 멋진 모습으로 나갔으면 했다.

더 이상 괴물이라는 오명이 아니라 제국의 검으로서.

그때 카리스가 불쑥 물었다.

“넌 쟤 싸울 때 뒤에서 한가하게 사진 찍고 있었어?”

리벨이 움찔했다.

“한가한 건 아니었고요!”

따지려던 리벨은 어디 기어올라 보라는 듯한 카리스와 시선이 마주친 후,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었어요.”

그녀가 작게 말했다.

“싸우는 뒷모습을, 본인은 모르니까.”

얼마나 든든한지 당신은 모를 테니까.

당신이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리벨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시스테인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제가 싸우는 동안 리벨이 뭘 했든 상관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리벨은 새삼 미안해졌다.

남 바쁜데 사진 찍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기사…… 올리려고 했거든요.”

그 말에는 리엔과 카리스의 눈에서 광채라도 나는 것 같았다.

리벨은 그쪽으로 차마 시선을 줄 수가 없었다.

그그그렇게부담스럽게쳐다보지말아주실래요?

분명 우리가 결혼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신 거다! 안 그럼 저렇게 눈에서 광채가 날 수가 없어!

내가 벨인 게 까발려지길, 아니면 까발리기만을 기다리신 거죠!

리벨은 속으로 절규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그때였다.

“리벨, 이 사진은 당신의 의지로 찍으신 겁니까?”

시스테인이 물었다. 그가 묻는 건 수습 기자로서 사진을 찍었느냐 묻는 것일 터다.

“…….”

리벨은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평소와는 달리 많은 의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줄곧 길을 헤매고 있던 그가 지금은 길을 찾은 것처럼.

다시 말해, 정답을 알고 묻는 것처럼.

리벨은 입을 오물거렸다.

시스테인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수습 기자라 한들, 죽고 사는 전장 한가운데까지 가서 사진을 찍어 오라 요구당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이번 일이 잘못될까 끝까지 긴장했으니까.

아닌 척하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테인이 다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 마음속 마지막 퍼즐 조각을 뒤집을 때가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은, 누구의 이름으로 신문에 실리게 됩니까?”

정답 바로 앞이었다. 리벨은 이번엔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튀긴 옥수수 가져와.”

그리고 그 타이밍에 카리스가 불쑥 시종에게 손짓했다. 리벨이 무릎에 짚고 있던 팔을 삐끗했다.

여기도 구경할 땐 팝콘 먹냐고!

하지만 앞에서 귀하신 두 분이 팝콘을 뜯든 콜팝을 뜯든 이 순간을 피할 순 없었다.

모든 게 끝나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했으니까.

“벨이라는 이름으로요.”

결국 리벨이 답했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게 혹시, 리벨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입니까.”

그 말에, 리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머릿속은 아수라장이었다.

으어어어어! 올 게 오고 말았어! 리벨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해? 뭐라고 해야 시스가 배신감이 덜할까?

“제가, 이 기사를 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시스테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리벨보다 훨씬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가 가리킨 건 접힌 채 놓여 있는 신문 기사 기고용 용지였다.

“네.”

거부할 수 없는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감출 수 없다. 이참에 밝힐 건 다 밝혀야 한다.

―사락.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스테인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자자잠깐.”

그때 리벨이 저도 모르게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와삭와삭.

리엔과 카리스가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리벨은 그쪽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리벨은 시스테인을 보다가 말했다.

“……이 기사, 제가 쓴 거예요.”

당연한 말이다. 시스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리벨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보고…… 나서요.”

뒷말을 기다려 주는 그에게, 리벨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화가 나면, 화를 내요.”

그녀의 말을, 시스테인은 움직임을 멈춘 채 듣고만 있었다.

오히려 반응한 건 맞은편의 카리스였다.

‘화를 낸다’면 말이 좀 달라지지 않는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직도 ‘화난 시스테인’, 다시 말해 폭주한 시스테인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손을 들어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던 때였다.

―툭.

리엔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그건 어머니 생각이죠.”

카리스가 싸늘하게 맞받아쳤다.

“이 자리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먼저 죽는 건 네가 아니라 나란다.”

그런데도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면, 모르겠니? 리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아들과는 달리 그녀는 검 따위는 수련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시스테인이 폭주한다면 이 자리에서 사망할 터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담담했다.

“…….”

카리스는 시스테인의 목줄이나 다름없는 리벨을 보다가, 결국 어깨에 힘을 풀었다.

“배신감이 들면, 화를 내요.”

그사이, 리벨이 다시 한번 말했다. 시스테인은 종이를 펴려던 자세 그대로, 리벨을 돌아보았다.

리벨이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슬퍼하지 말고요. 슬프다고 감정을 삼키지도 말고요.”

시스테인의 푸른 눈동자가 리벨을 살폈다.

그는 리벨의 말에서 이미 정답을 찾았다. 종이를 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가 일부러 피해 왔던 정답이 무엇이었는지를.

리벨은 이미 말해 주고 있었다.

수많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도 그가 애써 시선을 돌렸던,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스테인 자신도 마주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답한 시스테인이 천천히 종이를 폈다.

[벨 기자]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벨 기자의 사인이었다. 멈칫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

리벨은 그런 그를 살피고 있었다.

역시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짐작만 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는 사이 시스테인은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제국의 검, 시스테인 폰 디란타]

제목과 함께 쓰인 내용은, 그에 대한 욕도 칭찬도 아니었다.

그가 이번 반역 진압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벨 기자’라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쓰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사진은 리벨밖에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사에는 벨 기자가 ‘직접 취재’했다고 쓰여 있었다.

시스테인은 벨 기자의 기사를 주목해 왔기에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문장을 수많은 기사 중 단 하나에도 넣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문장을 굳이 넣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있었다.

[벨 기자]

그는 익숙한 글씨체를 내려다보았다. 글씨 끝에 힘을 주어 끝내는 독특한 방식의 필체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필체였다.

“…….”

그의 머릿속으로 리벨의 수많은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직업을 감추려던 모습.

나중에는 감추려 하지 않으셨지만, 제가 감찰기사단의 조력자라고 오해했고, 그러다가 그녀의 변신 능력에 대해 알았을 때는…….

“…….”

시스테인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가 종이를 접었다.

달라진 건 리벨뿐만이 아니었다.

불과 1년 여 전까지만 해도 벨 기자를 보면 불쾌하기만 했다.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려서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건드린 그 기자가 속을 끓게 했기 때문에.

만난다면 왜 그런 기사를 썼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물론 기자들 중에 사실 확인도 안 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로 돈을 벌고 사는 자들도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화가 나고, 혐오스러웠다.

그런 자에게 말려든 자신이 어리석고 화가 났다.

그랬다. 그랬었다.

벨 기자와 리벨의 연결 고리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리벨과 벨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그의 마음속에서는 기이한 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괴물.’

그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제 뒷이야기가 퍼지고 퍼져 나가 기정사실화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일방적인 가해였고 그는 그저 침묵해야 했다. 그들에게 분노하고 반박하다가 폭주하면 모든 게 끝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그는 제 기억을 건드린 벨 기자를 생각하면 악몽을 꿀 정도로, 저를 제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벨이 그 사람이라면.

벨 기자의 정체가 정말 리벨이라면.

그는 분노하기보다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리벨은 그 질문에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에 팝콘은 한 통 더 날라져 오고 있었다.

리엔과 카리스는 이쪽이 심각하든 말든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이었다.

이 사람들 이거 직관하려고 크라이베리도 사고 드레스까지 보내서 이 상황 만든 거잖아!

“그건.”

판이 깔렸으니 도망칠 수도 없다. 아니, 도망치면 안 된다.

여기서 모든 걸 말할 수밖에.

“고의는 아니었어요.”

리벨의 마음속 비밀의 병이 열렸다.

“아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변명부터 하면 안 되지.

“기자 일을 막 시작했을 때 편집국장이 제 능력을 알게 됐거든요.”

리벨이 말을 시작했다.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그때는 잠입 취재에 익숙하지 않아서, 능력 없이는 취재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럼 저택에선 당연히 무로 끓인 수프도 못 먹는 처지가 된다. 정말 말 그대로 생업이었다.

“편집국장은 제 능력을 숨겨 주는 대가로 대박 기사를 요구했고요.”

물론 당연히 기사 고료는 찔끔이었지만.

“그래서 수도의 온갖 이슈를 늘어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리벨은 슬그머니 리엔을 보았다. 이제 그 편집국장이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크라이베리는 물론 온갖 신문사에 이미 그림자가 심어져 있었으니, 그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딱 라이아 약초를 꼽더라고요. 이걸 쓰면 대박이 날 거라면서요.”

시스테인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회상하던 리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대했어요. 일단 확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이냐도 떠나서 사실.”

그녀는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시스테인이 제 안의 어떤 날것의 욕망을 늘어놓든, 시스테인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스테인 앞에 날것의 저를 늘어놓는 것은 부끄럽기만 했다.

“본심은, 제가 대공 전하를 건드려서 어떻게 살아남겠느냐였어요.”

한마디로 라이아 약초를 시스테인이 어떻게 썼는지는 상관없이, 그냥 제 목숨이 중해서 그의 기사를 쓰고 싶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 기사 내용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제 알량한 목숨이 소중해서.

혹시나 그가 실망할까 싶어서. 리벨은 그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서 안 쓰려고 했는데, 편집국장이 그럼 제 변신 능력을 신문 1면에 실을 거라고 협박하더라고요.”

그야말로 밥줄 대위기였다.

이벨라 자작의 소비는 엄청났고, 리벨은 반드시 크라이베리 같은 신문사에 주목받을 만한 기사를 어떻게든 기고해야 했다.

주목받을 기사라면 당연히 귀족가의 기사였고, 그 기사를 쓰려면 변신 능력은 필수였다.

그래야 잠입했다가 쓱싹당하지 않을 거 아니야?

“라이아 약초에 대해 쓰지 않으면 다 소문내겠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편집국장 놈도 도박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탕 하려다 모가지도 한 방에 탕 날아간 모양이었다.

하여간 도박하는 놈들이 문제야!

리벨은 도박하는 놈들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진 꼴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쥘 때였다.

“그래서 기사를 내셨습니까.”

시스테인이 확인하듯 물었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시선이 시스테인을 살폈다.

벨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날 밤. 폭주했던 그가 생각나서.

하지만 그는 평온해 보였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벨 기자라…….”

놀라진 않았다. 배신감은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리벨이 걱정하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그럼 기사나 다른 인터뷰들도?”

“제가 썼죠.”

혼자. 리벨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혼자 1인 2역 소설 쓰느라 애 좀 먹었을걸.”

카리스가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시스테인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흥미로워하다 못해 웃음을 참고 있는 리엔과 카리스는 여유로워 보였다.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배신감을 느낀 건 그 부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지금껏 리벨에 대해 가장 모르고 있었던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

그게 그에게 가장 큰 배신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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