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날이 선 분위기가 아닌 것으로 따지자면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었다.
카리스와 시스테인이 마주 앉아 차를 들고 있는 것이.
리엔 황태후의 티타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리엔 황태후가 앉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상석을 차지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을 카리스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자리를 내어 주자 리엔 황태후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웬일로?”
평소 같았으면 제 황위를 노릴지도 모른다며 리엔을 의심스럽게 쳐다봤을 카리스였다.
하지만 카리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사석이니까요.”
저도 제가 왜 굳이 시스테인과 마주 앉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상석에 앉는 어머니 리엔이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껄끄럽지 않았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평소처럼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 앉은 시스테인 때문인지.
그런 것치고는 시스테인을 크게 경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폭주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무엇보다.
시스테인은 그를 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까지는. 그래, 아직까지는 그래 보였다.
그는 계속 시스테인에게 의심의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이전보다 제 시선에서 의심이 다소 거두어졌다는 것도 모르는 채.
“흐음.”
리엔은 그가 내어 준 자리에 기꺼이 앉았다.
카리스는 그 모습을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세 사람 휘하의 정보 집단.
황태후의 그림자, 황제의 시즈, 시스테인의 감찰기사단은 이번 작전으로 서로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제의 암살자들, 시즈는 그림자들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그에게 빠짐없이 보고했다.
‘굳이 정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림자에 대해 조사해 온 시즈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처음 조사할 때부터 그림자는 카리스의 정보 집단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림자는 카리스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단 한 번도 카리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카리스와 그림자, 아니 카리스와 황태후 사이에 있었던 건 카리스 제 의심뿐이었다.
“…….”
카리스는 그 사실을 이번 작전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림자는 몇 번이고 이번 전투에서 시즈와 그의 뒤를 칠 수 있었지만, 뒤를 노리지도 않았다.
제 뒤를 방어할 시즈를 남겨 놓은 카리스가 무안할 정도로.
“이렇게 모여 앉으니 좋구나.”
화창한 햇살이 드리워지는 방 안.
그 그림자의 주인인 리엔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카리스는 그녀에게서 떨떠름한 시선을 거두었다.
‘난 내 아들이 잘되면, 뭐든 좋아.’
그렇게 말했던 황태후 리엔, 아니, 어머니 리엔의 말을 생각하면서.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발아래에 엎드린 자들은 모두 제 잇속을 챙기기 바쁜 자들이었으므로.
인간은 이득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리엔 역시 그렇기에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십여 년을 담을 쌓고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달라지기 시작한 시스테인처럼.
리엔이 쏟아 내는 저 무조건적인 애정도 어쩌면,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탁.
리엔의 말을 들으며 시스테인이 잔을 들었다. 그 역시 카리스와 굳이 눈을 마주하지는 않았지만, 어색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을 드러내는 것도 십수 년만이었다.
카리스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불쑥 말했다.
“잔 드는 버릇은 여전하군.”
시스테인이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잔만 덜렁 들어 마시는 건 중앙 귀족들의 티타임 매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적에 대한 걸 잊을 리가.”
―탁.
카리스의 말에 시스테인은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아직도 적입니까?”
“그럼 날 공격한 자가 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카리스가 시스테인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듯 답하는 그는, 전보다 날카롭게 나가지 않는 말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얼어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스테인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리엔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
이전에는 이 침묵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스는 이 침묵이 기묘하게 불편했다.
그는 문밖 인기척이 시끄러워지는 걸 느끼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우리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리고 그 변화의 구심점은 빠르게 이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카리스가 어색한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네 고삐를 찾은 것 같으니, 앞으로는 조금 지켜볼 생각이다.”
카리스가 말을 끝낼 즈음에는 시스테인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달칵.
그리고 바쁜 숨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리벨이었다.
리엔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얼음장 같던 분위기가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 * *
“느느느늦어서 죄송합니다!”
리벨은 티타임에 오자마자 머리를 박아야 했다.
이 나라에서 제일 귀한 세 사람을 기다리게 한 꼴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건 리벨도 억울했다.
아니, 하필 크라이베리가 오늘 이사 갔을 게 뭐람!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괜찮으니 앉아.”
리엔이 자리를 내어 주는 걸 감사하게 받으면서도 리벨은 크라이베리를 신나게 씹어 댔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이사를 가는 게 어디 있어?
이사를 갈 거면 거래처(?)한테 이사 간다는 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물론 비밀에 싸인 기자 벨의 연락처를 크라이베리 편집부가 알 리가 없으니, 연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툭.
아잇! 리벨은 자꾸 소매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려는 두툼한 종이 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좀 들어가 있어! 세상에 나오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좀 나중에 꺼내 줄게!
그 종이 봉투는 다름 아닌, 시스테인에 대한 기사가 담긴 봉투였다.
“들를 데가 있었는데 거기가 이사를 갔다더라고요.”
리벨은 난감한 얼굴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시스테인은 바쁘게 뛰어온 것 같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차 대신 목을 먼저 축일 미온수였다.
“고마워요.”
리벨은 미온수를 마시면서 숨을 돌렸다.
아니, 두 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신문사 특성상 이사를 가게 된다면 오래전부터 어디로 이전한다고 써 놓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안 그러면 거래하던 기자들이 죄다 갈 곳을 잃을 테니까!
근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사를 간다고?
아니, 무엇보다 애초에 크라이베리 정도 규모의 신문사는 이사를 잘 가지 않으려고 할 터였다.
옮기기도 힘들 거고, 수도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자리 잡았으니까.
뭐지? 갑자기 웬 이사?
혹시 거기만 마물의 습격을 받았나?
그런 것치고는 건물 외관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아예 건물주가 바뀌었다던데요?’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어보니 행인도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크라이베리 신문사를 통째로 샀다고요?’
그 말에 행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건물만.’
대체 누가 크라이베리를 쫓아내고 저 건물을 차지했단 말인가?
그것도 신문사 건물로 온갖 사람들이 다 오간 건물이라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도 없을 텐데?
‘대체 뭐에다 쓴대요?’
‘별장으로.’
‘네???’
다른 행인을 붙들고 물으니 답은 가관이었다.
수도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을 샀으니 어지간한 재력의 귀족은 아닐 텐데, 그런 사람이 수도 한복판 건물을 별장으로 써? 왜……?
“늦을 줄 알고 있었으니 괜찮다.”
카리스가 그때 불쑥 입을 열었다. 웬일로 그렇게 자비로우십니까?
의문을 가졌던 리벨이 멈칫했다.
잠깐만.
‘별장으로.’
별장이란 단어와 함께 카리스를 보니 묘한 데자뷔가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이벨라 저택도 별장으로 쓴다면서 사지 않았나?
물론 이벨라 저택은 별장이 되는 대신 폭발해 버렸지만.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설, 설마…….”
“맞아. 내가 샀어.”
카리스는 주어도 안 듣고 답했다.
“아니, 거길 왜요!?”
리벨은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그들 사이에서 시스테인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서 다시 리벨의 소매에서 탈출하려 애쓰고 있는 두툼한 종이 봉투를 보았다.
그는 리벨의 또 다른 직업과, 최근 팔린 물건이나 건물 중에 리벨과 황제 카리스 두 사람과 관련 있는 건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대화가 무엇인지 특정하는 데에는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크라이베리 신문사에 다녀오셨습니까.”
시스테인의 말에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이사를 갔더라고요.”
말도 없이! 누군가가 건물을 사시는 바람에!
건물이 멀쩡한 걸 보니 당연히 군사(?)로 민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리벨은 이 황가의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카리스는 무지막지한 돈을 내밀었을 것이고, 크라이베리는 수도 건물의 이점이고 자시고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하면서 갔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리벨이 차마 카리스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지 못할 때였다.
리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보낸 드레스는 마음에 드니?”
“아.”
리벨은 유독 소매 주머니가 작은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리벨이 평소에 입는 활동성 있는 드레스와는 달리, 장식이 많고 주머니 따위가 별로 없는 완전한 사교계용 드레스였다.
그래도.
“네, 엄청 예뻐요!”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진분홍빛 머리카락과 하얀색 베이스의 드레스는 그녀 자신이 보기에도 잘 어울렸으니까.
주머니가 작은 게 문제지만!
리벨은 다시 소매 주머니로 종이 봉투를 쑤셔 넣으며 뒷말을 삼켰다.
그때 리엔이 웃었다.
“그건 좀 꺼내 놓지 그러니. 답답해 보이는데.”
리엔이 그 종이 봉투를 가리켰다. 리벨이 멈칫했다.
“아니, 그게요…….”
누가 봐도 신문 기사인 걸 꺼내놓으라고요?
바닥에 내려놓는 것도 이상하니 내려놓으면 티타임용 테이블 한가운데에 내려놓게 될 것이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고.
리벨이 멈칫했을 때였다.
“응?”
리엔이 해사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리벨이 소매 주머니에 종이 봉투를 다시 쑤셔 넣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림자 나인도 캐치하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게 매각 처리된 크라이베리 신문사 건물.
게다가 하필 오늘, 티타임에 꼭 입고 오라며 주머니가 없는 드레스를 보내온 리엔 황태후.
리벨의 시선이 리엔과 카리스를 오갔다.
“설마…….”
“아가, 왜 그러니?”
리엔의 밝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카리스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뻔뻔한 반응은 리벨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이이이분들이, 오늘 작정하신 거다!
리벨은 엄청난 위기를 느꼈다.
그녀의 소매에는 그녀가 ‘벨’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기사가 꽂혀 있었으니까.
그녀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