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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60)화 (160/167)

160화

몇 시간 후, 이벨라 저택 근처.

카리스는 황성 화장실보다 못한 이벨라 저택에 앉아 있을 생각은 전혀 업었다.

일단 벽부터 갈라진 저택에 들어가서 굳이 생명을 담보 잡히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가 선택한 곳은 이벨라 자작저가 잘 내려다보이는 근처의 높은 언덕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시즈들이 그에게 고개를 깍듯이 숙여 답했다.

“놈은?”

“오고 있습니다.”

문답은 빠르게 오갔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카리스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햇살이 강한 날인 탓에 천막을 쳐 놓은 곳에는, 그를 위한 차는 물론이고 다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기다리게 하는 게 괘씸하지만, 재밌는 걸 보여 줄 테니 좀 기다려 줄 순 있지.”

카리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택의 주인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덜컹!

마차 한 대와 함께 그 마차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벨라 자작이 도착했다.

마차에는 디란타 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마침 초청 손님도 같이 왔군. 길게 기다릴 필요는 없겠어.”

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 폐, 폐하?”

저택으로 가는 줄 알았던 이벨라 자작은 바로 옆의 언덕으로 끌려와서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근데 여기에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명이 있었다고 해도 직접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는데!

―털썩!

그림자들은 카리스 앞에 이벨라 자작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마차에서 내리며 그 꼴을 보던 리벨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는 마치 막장 드라마에서 시어머니한테 싸대기 맞고 쓰러진 며느리 같은 포즈로 넘어져 있었다.

어이구, 가련하기도 하지.

그러면서 리벨은 카리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카리스는 그녀와 시스테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복잡한 인사는 생략하라는 의미였다.

“드디어 왔군. 날 기다리게 한 자는 오랜만이야.”

카리스가 이벨라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리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처벌하면 될 것을 굳이 이곳으로 끌고 온 것도, 이곳에서 기다린 것도 카리스 본인이 아닌가?

대체 뭘 하려고 기다린 거야?

리벨이 눈을 깜빡이는 동안 카리스가 말을 이었다.

“도박을 했다지? 그것도 하필 아주 안 좋은 곳에서.”

그 말에 이벨라 자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그렇습, 아니, 근데 하지만, 정말 몰랐습니다. 그,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곤. 정말입니다.”

그도 제가 갔던 거물들의 도박장이 사실 영 좋지 못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는 건 오는 길에 들어서 알았다.

“정말입니다. 저는 거기서 얻은 것도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다 잃었다고 하더군.”

그는 하나도 안타깝지 않다는 얼굴로 손을 펴 보였다.

“자, 귀족이 귀족다우려면 가져야 하는 것들이 있지.”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이벨라 자작 앞에서 여유롭게 걸으며 말을 이었다.

“먼저, 명예.”

그는 흙먼지투성이로 바닥에 내던져진 이벨라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음, 이건 일찌감치 없었던 것 같고. 다음은 다스릴 권속.”

그가 저택을 돌아보았다. 리벨은 그 모습에 작게 중얼거렸다.

“한 명도 없었을 텐데.”

그야 하녀 부릴 돈으로 도박을 했으니까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카리스는 그녀의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울 저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더군, 자작. 저택에 사용인이 하나도 없던데.”

그 말에 이벨라 자작이 더듬더듬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영지민들의 삶을 위해서…….”

개뿔! 리벨이 발끈하려는 때였다.

카리스가 옆에서 건네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촤르르르륵!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지는 두루마리는 수많은 이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 이건 영지의 주인을 제발 좀 바꿔 달라는 영지민들의 탄원서다.”

리벨은 입을 떠억 벌렸다.

이벨라 자작이 비록 영 썩은 귀족이긴 했지만 귀족은 귀족이었다.

당연히 귀족가의 영지에 황제가 직접 손을 댈 일도, 황가에 영지민들이 직접 연락할 수도 없는 게 정상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황제가 직접 손을 대는 건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일이고, 영지민들이 황가에 연락하는 건…….

“……영지민들을 막을 기사들도 없었구나?”

리벨이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도박에 미쳤다고 해도 그렇지!

리벨은 이벨라 자작이 부족하나마 영지에 기사를 뒀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아무리 영지에 관심이 없어도 몬스터 앞에선 영지민이고 영주고 사이좋게 한 방인데 제 몸 지킬 기사는 뒀을 줄 알았지!

근데 저놈은 상상 이상의 도박 중독자였던 모양이다.

분명히 기사 관련 경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보던 자작가의 얄팍한 장부에도 ‘영지 치안’에 관한 경비가 분명히 쓰여 있었다.

하지만 영지민들이 직접 황가에 연락을 하러 가는 걸 몰랐을 정도라면.

당연히 기사는 없었다는 소리고, 그럼…….

“장부도 가짜였냐!”

하여간 쓸모있는 짓 말고는 다 하는 놈이었다.

그러는 사이 카리스가 말했다.

“이걸 보니 다스릴 권속 하나 없어 보이는군.”

―툭.

그는 묵직한 두루마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벨라 자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럼 다음으론 귀족다운 품위를 지킬 저택이라도 있어야겠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언덕 아래의 저택으로 향했다.

품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저택이었다. 이미 무너지기 직전의 저택.

“저, 저택은 있습니다. 모습은 낡, 아니, 빈티지하지만 곧 리모델링할…….”

빈티지가 그런 데 쓰는 단어가 아니라니까? 리벨이 환장할 때였다.

카리스가 씩 웃었다.

저 사람 왜 웃어? 리벨이 불길함을 느낀 순간

―퍼퍼펑-!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

리벨은 입을 떠억 벌렸다. 시스테인은 흙먼지가 날릴까,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카리스 주변 역시 기사들이 미리 준비한 천을 들어 날리는 흙먼지를 막아 냈다.

“쿨럭! 에취!”

당연히 먼지를 뒤집어쓴 건 이벨라 자작뿐이었다.

그는 굉음과 함께 한순간에 무너져 흔적만 남은 저택(이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멍한 표정이었다.

“저, 저택, 저택이…….”

그를 보며 카리스가 손을 툭툭 털어 버렸다.

“자, 너는 이제 귀족으로서 가진 게 하나도 없군.”

턱을 매만진 그가 허망한 표정의 이벨라 자작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난 내 제국에,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없는 놈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카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네놈도 마찬가지고.”

그 말에 이벨라 자작이 어버버거렸다.

“폐, 폐, 폐하?”

그러거나 말거나 카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네게서 이벨라라는 성을 박탈한다. 이 영지는 황가로 귀속될 것이며 영주의 멍청함에 시달리던 영지민들은 황가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카리스가 이벨라 자작을 가리켰다.

“이놈을 끌어내라. 가장 치안이 개판인 영지에 던져둬.”

“폐, 폐하!”

이벨라 자작이 기겁했다.

치안이 개판이면 당연히 수도 근처는 아니다. 게다가 돈도 없고 신분도 없고 다스릴 권속도 없다면?

그는 그저 평민이었다.

그것도 치안이 개판인 영지 한가운데에 집도 연고도 없는 평민!

죽으란 거나 마찬가지였다.

“살려 주십시오! 앞, 앞으론 도박 따위 안 하겠습니다!”

그 말에 카리스가 어깨를 답했다.

“안 하게 될 거야. 먹고살려면 도박할 시간은 없을 거라.”

“폐하아아아아아아아!”

언덕에 이벨라 자작의 절규가 울렸다. 리벨은 그 꼴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살려는 드렸네.”

그녀는 황당한 얼굴로 저택을 보았다. 폭발로 깨끗하게 무너진 저택, 그 위로 해가 보였다.

제국에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이제 전후 처리는 거의 다 끝났다.

처형당할 자들은 처형당했고, 제국은 이제 재정비의 기간이었다.

황제 카리스는 수도에서 직접 말을 타고 행진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수도 한복판을 말을 타고 행진하겠다고?”

같이 행진하자며 연락을 받은 리벨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떠억 벌렸다.

아니, 얼마 전까지 이 제국에 반란 모의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무슨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제국 수도 한복판을 오픈카(?)를 타고 행진해?

담대한 거야, 미친 거야?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하지만 그 행진은 무사히 끝났다. 아무 일도 없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시스테인이 옆에 있었으니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리벨은 카리스의 담대한 정신머리에 혀를 내둘렀다.

[필레 전 공작, 반역죄로 처형]

[제국 치안의 사각지대에 드리운 햇살…… 기사단 목격담 전격 취재]

그러는 사이 신문도 시끄러워졌다.

[감찰기사단, “반역자 처리 마무리 수순”]

기사가 줄줄이 뜨는 가운데, 리벨은 시스테인의 감찰기사단 업무도 슬슬 끝나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후우.”

오랜만에 돌아온 대공저에는 아직 리벨뿐이었다.

시스테인은 오늘 치 업무만 끝나면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밤에,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있어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건입니까.’

곧바로 반응하는 걸 보면 그는 출정하기 전날의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은 듯했다. 리벨이 제 비밀을 다 밝히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시스테인은 리벨의 말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시간을 내겠다고 답했다.

리벨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머리를 볶아 댔다.

“다 끝인데!”

필레 공작도 때려잡고 마물 게이트도 없앴고 다 끝났으니 편해야 하는데!

리벨은 집무실에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햄보캐야 하는데 햄보칼 수가 업써!

그녀에겐 딱 하나, 가장 큰 위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좋아.”

하지만 그녀는 곧 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약속했던 거잖아. 그리고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잖아. 그치?

리벨은 결국 종이와 펜을 꺼냈다.

[벨 기자]

가장 아래에 기자의 이름을 먼저 쓴 그녀는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주저하는 건 처음 잠깐뿐, 결국 막힘없이 써 내려간 기사의 마침표를 찍은 건 십여 분 후였다.

“마지막으로 이거.”

리벨은 서랍에 넣어 둔 사진을 꺼냈다. 미리 인화해 둔 사진은 시스테인의 뒷모습이었다.

시스테인이 대공령에서 싸울 때.

그의 마력이 주변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디인지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시스테인 본인은 알 것이다. 이곳이 디란타 대공령이고, 그가 게이트로 나아가는 전투를 할 때라는 것을.

“내가 찍은 건 당연히 알겠지.”

싸울 때 몰래 사진 찍어서 미안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강한 몬스터가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가 싸우는 뒷모습이 얼마나 든든한지 보여 주고 싶어 찍었던 것이었다.

설마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또 수습 기자 썼다고 하겠지?”

이상한 데에서 눈치가 없는, 아니 눈치가 없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그는 또 수습 기자를 운운할 것이다.

리벨은 그 논란 아닌 논란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다.

모든 게 끝나고 무사히 돌아오면, 그녀의 마지막 비밀, 제 정체를 밝히기로 했었으니까.

그녀는 기사의 첫 줄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테인 대공은 수습 기자의 방문을 거부했다. 때문에 직접 방문해 취재한 그의 모습은…….]

그가 거부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쓰면 그도 알 것이다.

벨이, 나라는 걸.

“후우.”

리벨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렇게 안 들키려고 애썼는데!

하지만 오늘 밤엔 밝힐 것이다. 그녀는 신문 기사 제목을 보았다.

[제국의 검, 시스테인 폰 디란타]

괴물이 아니라, 제국을 지키는 검. 앞으로는 이게 그의 별명이 될 것이다.

리벨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때였다.

“전하, 황태후 폐하께서 티타임을 준비하셨답니다.”

나인이 불쑥 나타나 보고했다. 리벨은 그 말에 움찔했다.

“설마 그게 오늘 저녁은 아니지?”

“오늘 저녁입니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는 나인은 그녀에게 리엔의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사랑스러운 내 아가들, 오늘 오후에 보자.]

분명 리엔의 글씨였다. 리벨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저녁엔 바쁜…… 응?”

그리고 그 순간, 편지가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무심코 편지 두 번째 장을 읽어 보았다.

[비밀 이야기는 같이 하자. 네 정체를 밝힐 때의 시스 표정이 아주 궁금하거든.]

“으악!”

리벨은 편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분명 약속한 게 오늘 아침이었는데!

“마차를 준비할까요?”

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벨은 반쯤 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갑자기 차가 막 마시고 싶네…….”

막 땡기네…… 목이 타네…… 리벨이 아련하게 말했다.

“이건 크라이베리 앞에 갖다 놓고 와야겠다.”

그녀는 신문 기사를 챙겨 들었다. 당장 오늘 저녁 티타임이면 기사를 기고하고 오기도 바빴다.

“그럼 크라이베리 앞을 들렀다 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응. 시스는?”

그도 저택에 왔다가 가려나? 리벨의 질문에 나인은 짧게 답했다.

“감찰기사단 본부에서 바로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헉, 그럼 빨리 도착하시겠네?”

더 서둘러야겠다. 리벨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눈앞에 차려진 재앙의 만찬을 보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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