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설명+
소화 7년 1월 8일. 조선인 이봉창이 왜왕을 도살하다.
작가 : 리첼렌
전작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대통령 각하 만세, 한국 독립 전쟁 외 다수 https://namu.wiki/w/리첼렌#s-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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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좆됐다.
모 우주비행사만큼 심사숙고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좆됐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명제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왕이 파리를 버렸다고?!"
"이 사람아. 아직 확실한게 아니라고 말했잖나. 아직 의회에선 아무런 공식발표도-."
"염병하고 있네. 언제부터 개나리들 말씀을 그리 철떡같이 믿었다고. 자네 설마 왕당파인가?"
"그, 그럴 리가 있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국왕 부부를 죽여라!"
"그 오스트리아 갈보년과 더러운 족속들을 작년에 바스티유에서 갈가리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덜컹덜컹.
"···하핫."
길거리에서 이런 흉흉한 소리가 오가고 있는데 바로 그 옆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내가 무사할 리 없잖은가?
나는 좆됐다.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죽을죄라도 진 거겠지.
'대체 여긴 어디야?'
아니 그보다도, 지금 나는 대체 누구지?
아직 이 기괴한 곳에서 눈을 뜬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나를 포함해서 황인종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분명 21세기 대한민국의 희망(?) MZ 청년이었을 나조차 생전 처음 보는 옷에 내 것이라기에는 다소 병적으로 창백한 거죽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비록 거울을 보고 직접 확인한 건 아니라지만 지금 내가 저 길거리의 불온한 폭도들처럼 백인종일거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리, 라고 했었지.'
빛의 도시 파리.
그렇다면 지금 여긴 프랑스란 말인가?
···글쎄. 아무리 후하게 쳐줘 봐야 유행이 지난 지 1세기는 지났을 거적때기를 입고 다니는 저 불온분자들이 패션에 죽고 사는 파리지앵이라기에는-.
"의원님."
깜짝이야.
급작스러운 마부의 호출에 나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답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정말로 국왕 폐하께서 파리를 버리신 겁니까?"
이름 모를 마부가 슬쩍 나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 앞쪽! 전방주시!'라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당초 나도 아는게 없는데 대꾸는 무슨.
아니 그보다도.
'국왕이 파리를 버려?'
어딘가 기억이 날듯, 말듯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의원님이라는 호칭.
전기차와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21세기와는 영 동떨어진 마차와 마부.
그렇다는 건-.
"···긍정하신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하아-.
마부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며 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딴생각만 하고 있으니 도저히 제겐 털어놓을 수 없는 기밀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닌데···.'
정말로 그냥 혼자 멍때리고 있었던 건데.
하지만 이로써 몇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는 지금의 내가 의원님 소리까지 들을 만큼 높으신 양반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이 높은 확률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가 휘몰아치던 파리라는 것.
"의원님."
"말씀하십시오."
"폐하께 한 번만 더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이러한 내 추론을 확신으로 바꾸어준 건 마부의 뒤이어진 청탁이었다.
아니, 청탁이라기보다는 인정에 호소하는 애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쪽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축 늘어진 어깨로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는 둥, 양파도 먹을 줄 모르는 오스트리아 놈들이 납치해간 거라는 둥 온갖 장광설을 늘어놓는 마부의 모습은 어딜 봐도 나를 거래상대가 아닌 까마득히 높으신 양반으로 존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국왕과 대립하는 공화파라는 것까지도.
'···좆됐다.'
돌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지금은 프랑스 대혁명기고, 나는 그 프랑스 국민의회의 의원이며, 일개 마부조차 내가 공화파임을 알 정도이니 꽤나 유명인사거나 빼도 박도 못하는 골수 공화파거나 둘 중 하나다.
쉽게 말해서, 자코뱅이라는 말이다.
'아니 뭐, 자코뱅이라는 게 아직 없는 시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국회의원씩이나 되었으면서 왜 지지레 궁상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프랑스 대혁명기의 의원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두대.
그래, 단두대.
그놈은 소위 혁명에 반대하는 왕당파와 수구반동의 목만 자른게 아니다.
왕당파만큼이나 자코뱅 목도 시원하게 설겅설겅 잘라버린 게 그놈의 단두대고, 꼭 단두대가 아니라도 암살자에게 칼에 맞아 죽거나 문민 통제한답시고 의원씩이나 되는 양반들이 직접 전쟁터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하는게 혁명기의 의원님이라는 부평초 인생이다.
원래 권력이라는 게 부채도 없이 외줄타기라지만, 이건 밑에서 식인 악어들이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와중 기름칠까지 되어있는 밧줄을 부채도 없이 건너기라는 미친 짓이다.
부모의 원수가 의원님이 되겠다고 해도 한 번쯤은 말려줄 그런 자리란 말이다.
'···미국으로 도망칠까?'
그래, 그게 맞다.
내가 프랑스인이어도 열에 아홉 번은 망설일 자리인데 심지어 나는 직전까지 누워서 낮잠이나 자려던 대한민국의 희망 날백수였다.
도망칠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면 모를까, 도망칠 기회만 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메리칸드림이 기다릴 미국으로 도망치고 보는게 정답인게 당연했다.
'아니면 나폴레옹 라인을 타 봐?'
그리고 미국행 망명이 최선이라면 나폴레옹 라인은 차선.
아직 국왕 부부가 살아있는 시대다.
내가 비록 이 시대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건 아니지만 루이 16세가 먼저 죽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까지 무너진 다음 비로소 나폴레옹에게 기회가 돌아온다는 것쯤은 기억하고 있다.
고로 루이 16세가 아직 살아있는 지금 나폴레옹은 그저 보잘것없는 코르시카 촌놈일 터.
나름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내가 나폴레옹 코인이 떡상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그 뒷배가 되어준다고 하면 제아무리 야심만만한 나보라도 날 내칠지언정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거다.
'좋아, 그럼 일단 아메리칸드림을 플랜 A로. 나폴레옹 드림을 플랜 B로 두자. 도대체 낮잠이나 자다가 이게 뭔 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다 보면-.'
"도착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네?
누구요?
"아, 그리고 여기 이 책은 이만 돌려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책이라는 건 알겠는데, 쇤네는 도통."
마부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통님께서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푹 쉬라고 하시더군요."
달그락달그락.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늘어놓은 채 멀어져가는 마차와 마부.
짐짝처럼 홀로 허름한 셋집 앞에 내버려진 내가 섭섭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날 사로잡은 건 야속한 마부를 향한 섭섭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뭐?"
내가 로베스피에르다?
날 태워준 마차는 자코뱅의 거두 당통이 보내준 거고?
아메리칸드림이고 나폴레옹 드림이고 뭐고 내가 바로 그 혁명의 나이트메어다?
"씨발."
욕지거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허나 내 흘러넘치는 김치소울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낯설기만 한 불어.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무튀튀한 우울함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마부가 건넨 책-이라기보다는 원고에 가까운 종이 뭉치를 펼쳐보았다.
「사형제 철폐」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이 몸의 본래 주인-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손수 정성스레 눌러쓴 혁명가로서의 이상이자 의원으로서의 정책.
이 양반의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헛웃음과 비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는 헛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 미래 말이다.
나는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