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C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자코뱅의 영수이자 공포정치의 상징.
독재자가 된 혁명가의 원형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
딱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의 전부였다.
이 이상은 공부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공부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대학 시절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루맛 소주도 먹어본 적 없는 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반골 행세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차라리 루소의 저서를 읽었지, 로베스피에르에 관해 공부해본 적은 없었다.
난 사학도가 아니었거든.
따라서 마부가 건네준 로베스피에르의 저서는 어찌 보면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이래로 로베스피에르 사상과 나와의 첫 번째 만남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허름한 셋집에 홀로 틀어박혀서 이 로베스피에르 사상에 대하여 간만 살짝 본 시점의 내 심경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게 혁명사상이라고?"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린다.
완성도가 부족하다,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사형제 폐지, 법 앞에서의 평등, 서얼제 철폐, 인종평등과 종교의 자유, 연좌제 금지, 보통선거권 실시, 공무원 자격제한 철폐.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온 반골청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무슨 혁명사상인가, 싶어질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적어도 사유재산 철폐, 직접민주주의 실시, 국가권력 해체 세 가지 중 하나는 꼭 들어있을 거라고 믿었던 내겐 자못 실망스러운(?) 서적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아니지."
로베스피에르의 사상이 혁명적이 아닌게 아니다.
당장 불과 우리 교수님 세대만 해도 위에 로베스피에르의 주장 중 실제로 국정운영에 반영된 주장이 몇이나 되던가?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최루탄 걷어차고 다녔기보단 뿌리고 다녔을 양반이었지만 학생들 앞에서 스스로 반골이라고 우쭐댈 정도니 그 시대 대한민국에 교수님 대신 로베스피에르가 태어났다면 교수님 보단 훌륭한 혁명가가 되었을 것이다.
고로 이건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신이 부족한 게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만큼 민주주의가 훌륭히 안착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 이 자리에 선 건, 이 혼란한 프랑스에 민주주의를 안착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타고났기 때문일까?
""국왕을 죽여라!"""
"···내 주제에?"
창 너머에서 들려온 폭도들의 외침에 저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프랑스는 내가 태어난 나라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로베스피에르가 된 건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무언가 신적인 존재가 나를 이 자리에 옮겨놨다고 가정하더라도 차라리 교수님이면 모를까 대학 졸업하고 하릴없이 탱자탱자 놀고 있던 나 같은 날백수를 가져다 놓은 건 그가 민주공화정을 증오하는 왕당파이기 때문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나 혼자 사명감에 불타올라 우국충정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랑으로 목숨을 걸어봐야 괜히 아까운 내 목숨만 낭비하는 꼴일 게 뻔하단 말이다.
"일단 살고 보자."
응, 그게 맞다.
내 주제에도 맞고, 프랑스를 위해서건 대혁명을 위해서건 이게 최선이다.
자고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법.
앞으로의 방향성을 대강 정한 나는 저서 한 귀퉁이에다가 만년필로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우선 플랜 A는 폐기."
찌익.
아쉽지 않다, 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허나 나는 로베스피에르, 급진 공화파의 유명인.
아직 자코뱅의 영수나 독재자라고 추앙받을만한 정치 거물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나 혼자 살겠다고 내빼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을 거다.
당장 국왕까지 파리를 버리고 도망친 와중이니 오히려 추가적인 도망자가 나오기 전에 본보기를 보이려고 들 가능성이 더 크겠지.
최악의 경우엔 루이 16세와 함께 반란군을 일으키려고 한 왕당파의 프락치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플랜 B는···지금으로선 아직 판단이 안 서네."
톡톡.
분명 나쁜 생각은 아니다.
허나 내가 로베스피에르라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비록 아직 공화국의 독재자나 자코뱅의 영수는 아니라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좋게도 나쁘게도 급진 공화파의 유명인사.
설령 내가 살아서 나폴레옹 제정을 맞이하더라도 그가 나와 함께하려고 할지, 무릎 꿇리려고 할지, 아니면 아예 죽이려고 들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최악의 경우엔 내가 키워준 나보가 나와 내 패거리를 몰아내려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으로선 며칠에서 몇 달 정도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게 올바를 듯했다.
"그럼 이제 플랜 C인데-."
뭐가 좋을까.
혁명이고 프랑스고 다 내주더라도 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각하고 망명하기?"
가장 무난하다.
단, 실각 직후 단두대로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트로츠키, 부하린 등등 혁명기에 실각했다가 목이 달아난 유명인사들의 말로를 생각하면 최후의 탈출전략이면 모를까 앞으로의 목표로 삼기에는 이래저래 하자가 많은 전략이었다.
나는 진짜로 물러나고 싶어서 도망가는 거지만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지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거든.
그렇다면 역시-.
"어영부영 버티기."
다른 말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오늘 하루만 무사히.
쉽게 말해 공무원식 생존전략이다.
막상 공무원 시험은커녕 공부도 해보지 않은 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방안 중에선 생존만 따지면 이게 가장 나았다.
그래서 잘 안 풀리면 언제건 실각 후 망명 전략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렵구만."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딱 중간만 하자, 월급만큼만 일하자.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이 세상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극락정토였을 거다.
"일단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아무튼 시간은 많다.
지금 이 혼잡한 파리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나 한 사람뿐이겠지만, 최소한 나는 국왕 부부의 탈출극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탈출에 실패했으니 단두대까지 끌려간 것 아니겠는가.
그럼 적어도 국왕 부부가 붙잡혀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는 생각할 여유 정도는 있겠지.
똑똑똑.
[목욕물 다 데웠어요-.]
"예, 예! 곧 나갑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셋방 주인집 아가씨가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정성스레 준비해준 저녁 목욕을 고대해보자.
나름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양반이 셋집에서 세들어 살고 있다는 게 퍽 우습긴 하지만.
'뭐 어때.'
자랑스러운 21세기 대한민국의 긍지 높은 날백수 반골청년 박민혁도 본디 셋방에서 세들어 살며 쓸개를 핥던 효웅이였다.
그리고 괜히 알지도 못하는 귀족예법 같은걸 신경 쓸 바에야 보는 사람도 없는 허름한 셋집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나쁠 건 없잖은가.
'···잠깐, 이러면 앞으로도 난 쭈욱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기껏 출세해도?'
아마도 그럴 거다.
괜히 사치와 허영에 절어서 편한 것만 찾으려 들면 곧장 내가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박민혁이라는걸 다들 눈치채게 될 테니까.
뭐, 구태여 거기까지 헤아리지 않더라도 그냥 서민의 골수를 빨아 사치하는 놈이라고 단두대로 끌고 갈 수도 있고.
꼬르륵.
썩 깨끗하다고 보기는 힘든, 그러나 불평하기에는 민망한 목욕물에 가라앉으며 내심 투덜거렸다.
하필이면 이런 혁명하는 기계에 빙의할 건 또 뭐였냐, 고.
***
이튿날, 정오가 조금 안된 시간.
"국왕 부부가 붙잡혔다고?"
"그래."
마차도 없이 터벅터벅 파리 시내를 걸어서 다소 늦게 국민의회에 출근한 나를 반긴 건 예상은 했으나 한심하기까지 한 소식이었다.
"마부들이야. 언제나 그래왔듯이 자유를 열망하는 민중의 자유의지가 압제자의 숨통을 끊어놓은 거지. 참으로 역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누구보다 존귀한 이가 누구보다 낮은 이에게 붙들리다니 말이야."
껄껄껄.
자코뱅-아니 코르들리에 클럽(Club des Cordeliers)의 실질적인 영수 조르주 당통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게는 뜻 밖의 정보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자코뱅은 급진 공화당파라기보단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사교회 같은 모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현시점에서 자코뱅은 입헌파, 온건공화파, 급진공화파 등이 한데 모인 거국동맹 쯔음.
오히려 나와 당통이 속한 코르들리에 클럽은 자코뱅과 회원을 공유하면서도 엘리트 우선의 자코뱅과 대중 우선의 코르들리에로 반목하는 관계라고 했다.
아니 그것보다.
'···고작 하루만에 붙잡힌거야?'
나름 국왕이라는 양반이 궁지에 몰려 쥐어짠 최후의 한수가 고작 하루만에 막혔다고?
이미 붙잡힐거라는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왕가의 명운을 건 결사적인 도주가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이튿날 새벽에 붙들리다니.
추하다 루이야.
암만 무능해도 그렇지 진짜 괜히 혁명을 당한게 아니구나.
"자네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 눈치군."
"그야 당연히 붙잡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호오?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당통이 눈초리를 빛냈다.
괜히 꼬투리 잡아서 끌어내리려는 듯 보였다면 피해망상이었을까?
차마 미래지식 덕분이라고 답할 수 없었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자네가 어제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분명 무언가 수를 썼겠거니, 했지. 그러지 않고서야 내게 마차까지 빌려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국민의회로 출근하는 길에 혼자 생각해봤다.
지금 프랑스는 현직 국왕이 적국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를 향해 도망친 대사건 와중이다.
그렇다면 이 대사건 와중에 국민의회의 의원이며 제3신분의 유력인사 로베스피에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일단 셋집은 아니야.'
나야 어차피 잡혀 올 거라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마음 편히 딴생각 중이었지만, 어젯밤까지만 해도 여기선 정말로 오만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을 거다.
설령 국민의회는 해산했더라도 다들 사교회니 영수의 저택이니 수도원이니 등 오만가지 장소에 모여서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겠지.
허나 나는 홀로 셋방에서 속편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었으니 이런 모임에서 쏙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름 아닌 눈앞의 당통 덕분에 말이다.
"물론 우리 프랑스 국민들이 저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고 말이야. 자네도 그렇잖은가?"
"···자네는 참으로 짓궂군."
당통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하루종일 넋이 나가 멍하니 있었던 게 누군데 지금 내 탓이나 하려는 것인가?"
"내가 그랬었나?"
"그랬다네. 그래서 국왕에게 버림받아 실성해버린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었지."
아. 물론 내가 아니라 에베르 그 바보 놈이 한 말이야.
당통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설마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이제와 국왕을 동정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안 그런가?"
···이 새끼가?
지금 나보고 왕당파냐고 떠보고 있는 건가?
순간 욱할 뻔했지만, 앞서 당통이 내가 어제 넋이 나가 있었다고 지적했던 걸 애써 떠올리며 참아냈다.
물론 날 단두대로 보내려고 떠보는 걸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내가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마차와 요양할 시간을 내준걸 수도 있잖은가.
어쩌면 본인의 친절을 의심당하니 괜히 꽁해져서 일부러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하여 나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는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영락없이 얼빠진 얼굴.
나는 그런 당통을 향해 일부러 정색하고 답했다.
"시민 루이씨는 적전도주를 택했네."
"허."
"비겁한 사내지. 무능한 사내고 말이야. 머지않아 민중이 위임한 헌정질서의 이름으로 죄인은 제 비겁함과 무능함을 단죄받게 될걸세. 허나 동정이야 할 수 있지 않겠나."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니까.
누구도 손해 보고 싶어서 사회계약을 맺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손해가 사유재산을 넘어서 목숨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 사람이 죽어 마땅한 인간인가와 그를 개인적으로 동정할 수 있는가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고로, 시민 루이씨는 외세를 끌어들여 파리 시민을 도살하려 한 민중의 적이지만 나는 객체로서 그를 동정한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당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자네는 혁명하는 기계가 맞아."
"칭찬으로 듣지."
"그야 물론 칭찬이고 말고. 파리의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그렇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자네에겐 당연히 칭찬 아니겠는가?"
···이 자식이 아까전부터 자꾸 살살 긁네.
정정한다.
역시 이놈은 날 단두대로 끌고 가고 싶어서 일부러 떠본 게 맞는 것 같다.
"아무튼, 그럼 이만 나는 자리로 돌아가 보겠네."
후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당통이 체념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참, 그리고 에베르 그 바보 놈이 어제부터 벼르고 있더군. 괜히 화병 나지 않게 고막 조심하게."
"그게 조심한다고 될 일인가?"
"···그래, 아니었지. 빌어먹을. 마라에 에베르에 여기가 무슨 꼴통 소굴도 아니고."
그래서 에베르가 누군데 이 씹덕아.
마라는 확실히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에베르는 암만 기억을 헤집어봐도 기억이 없다.
차라리 지금쯤 지방의회에서 활동하고 있을 바뵈프는 알겠는데 말이지.
"아무튼 몸조심하게."
툭.
당통이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멀어져갔다.
또 이렇게 보면 영락없이 악우를 걱정해주는 호인이라 내가 괜히 피해망상에 빠져 있었던 건가, 싶기도 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두대로 보낸 건지조차 모르는 나로선 괜히 적을 늘려서 좋을 것 하나 없을 테고.
'그보다 혁명하는 기계라.'
내가?
아니, 내가 연기한 로베스피에르를 일컫는 거겠지.
이 경우엔 그만큼 내가 연기를 훌륭히 잘했다, 고 해석하는 게 맞을 거다.
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시민 박민혁이니까.
저 골수 혁명가가 나보고 혁명하는 기계라고 하진 않았을 거다.
"그럼 다들 모인 듯하니 이만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상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용히 내 자리를 찾아나섰다.
따로 내 자리라고 들어두진 않았지만,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알아서 내 자리까지 길이 열리니 구태여 멀리까지 찾으러 나설 필요도 없었다.
좌익.
훗날의 정치당파를 구분하는 좌우 구분의 시초가 되었다던 바로 그 자리.
털썩.
일부러 뒷짐을 진채 위풍당당하게 의원석에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의석은 꼭 내게 맞추어 설계된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