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석호 부근.
"저 가증스러운 놈들이···."
사정거리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프랑스군을 약 올리는 오스트리아군을 노려보며 뒤무리에가 이를 갈았다.
또, 또였다.
부딪히면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물러나고, 그래서 라벤나의 마세나와 합류하기 위하여 이동하면 또다시 따라붙고만 있다.
모로 봐도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주공이라기보다는 조공으로서 견제에 충실한 모습.
그리고 포병 위주의 뒤무리에군으로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얕은수였다.
"···차라리 군을 둘로 나누시죠."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부사령관 니콜라 술트가 입을 열었다.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된 차륜전에 울화가 치밀어오른 것일까.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그가 이미 일전을 각오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제가 남아서 저 양파튀김도 못 먹는 놈들을 붙잡아두겠습니다. 그동안 사령관께서는 어서 라벤나로 향하십쇼."
"버틸 수 있겠나?"
"20분만 주십시오."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소리.
뒤무리에는 보면 볼수록 이 술트라는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대단한 기교나 교활한 책략보다는 정석적인 군략과 화력으로 승부를 보는 뒤무리에.
그리고 예하 부대의 규율과 보급을 항시 만전으로 유지하다가 그 모든 준비를 잿더미로 돌릴 용기가 필요한 순간 주저 없이 아껴둔 한 방을 날리는 술트.
"좋아, 그럼 15분 주겠네."
"거 허세 좀 떨었기로서니 너무하십니다."
"어허. 그러게, 누가 허세 떨라고 했나? 자네도 사나이라면 기사답게 제가 꺼낸 말은 지켜야지."
"하여간 옛날 사람 아니랄까 봐 기사 타령은."
"이 친구가 그래도?"
뻔한 너스레에 뒤무리에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래, 이게 군인이지.
본인 머릿속에 지도가 다 들어있으니 그까짓 정찰도 필요 없다는 나폴레옹 놈이 아니라 이런 게 진짜 군인이 싸우는 법이지.
뿌우우-.
우렁찬 군악대의 연주 소리.
그리고 사령부의 변화를 전하기 위한 전령들의 뜀박질 소리.
하지만-역시나.
"···젠장할."
아군이 뒤무리에 군단과 술트 군단으로 갈라서기가 무섭게 적 또한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대치상태가 길어지면서 화약 매연이 걷히는 바람에 너무도 쉽게 아군의 수가 읽힌 것이다.
'이를 어쩐다.'
지금 라벤나에 있는 마세나에게 가장 급한 건 보병이 아니라 포병대일 거다.
아군이 동쪽 고지대에 있는 라벤나 시가지를 선점한 이상 그 위에서 포격만 제대로 퍼부어줘도 서쪽에 진을 친 적들은 줄행랑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술트도 보병 위주의 술트 군단이 시간을 끌고, 뒤무리에가 마세나를 구원하도록 역할을 분담한 걸 테지만.
"아직도 기병대를 저리 아껴두고 있었나···."
뒤무리에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물론 아군도 기병이 없는 건 아니라지만, 애초에 적 기병대의 목표가 아군에게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라벤나로 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것일게 뻔하잖은가.
그럼 굼뜨디굼뜬 뒤무리에 군단으로서는 끊임없이 측면과 후방을 경계하면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고, 그들이 라벤나에 도착할 즈음이면 해가 저문 뒤일 거다.
'뮈라에게 급히 파발을 보내봐야 하나?'
아니면 술트에게 미안하지만, 기병들까지 붙잡아둘 수 있겠냐고 주문해볼까?
그냥 여기서 화약을 모조리 탕진할 각오로 불바다를 만들어봐?
뒤무리에의 셈이 어지러이 뒤얽히던 찰나.
"···응?"
느닷없이 적진에서 동요가 일며 전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측면이나 후방에서 아군이 급습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현란한 선회였다.
"뭐지?"
설마 볼로냐에 있던 우군이 코사크들을 밀어내고 벌써 여기까지 달려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얼핏 망원경으로 살피기엔 으레 보일법한 흙먼지나 깃발 같은 게 도통 보이질 않았다.
저쪽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석호와 갈대숲밖에는-.
'잠깐, 갈대숲?'
그제야 뒤무리에의 망원경에 갈대숲 쪽에서 이따금 번쩍이는 불빛이 관측되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데다가 날씨까지 흐리다 보니 화약 매연이야 갈대숲에 가려도 불빛까지 가릴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민병대···?"
불현듯, 뒤무리에는 언젠가인가 라파예트가 대륙군은 정면승부에 고집하지 않고 언제나 영리하게 싸웠다며 자랑스레 떠벌리던 걸 떠올렸다.
그들은 비록 오합지졸이었으나 고향을 지킨다는 대의가 있었기에 제아무리 적이 많더라도 겁먹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항군으로서 제 본분에 충실했다고.
그때는 겉으로는 별말 하지 않아도 군인이라는 놈이 불명예스레 싸운 게 자랑인 줄 알고 떠벌린다며 내심 흉보았지만-.
타타탕!
지금 이 순간, 그들을 구한 건 저 갈대숲에 숨어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찌른 용감한 자경단이었다.
고향을 위하여, 새롭게 태어날 조국을 위하여 의로이 나선 해방구의 해방군이었다.
둥, 둥, 둥-!
우렁찬 북소리.
오스트리아군이 후방으로부터의 총격에 당황한 나머지 진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 술트 군단이 속보로 적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족히 두배,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적들을 향하여 두려움 없이.
"···전군, 라벤나를 향하여 전속 전진하라! 추격대는 더는 신경 쓸 것 없다!"
상황판단은 그거면 족했다.
휙.
뒤무리에는 그 즉시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명예가 우리의 후방을 지켜줄 것이다!!!"
낡은 군인이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였다.
***
라벤나시.
타타탕!
"···어처구니가 없군."
조금 전 허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바리케이드를 흘겨보며 수보로프가 중얼거렸다.
"대체 왜 저런 방어선이 설치될 때까지 내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이대로는 꼼짝없이 요새전을 치를 판이잖은가."
"그, 그게···아무래도 마세나가 만들었나 봅니다!"
"이 멍청한 놈이."
야전 원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당연히 적장이 만들었겠지. 그런데, 저놈이 그사이 뭔 수로 저 나무산을 창조했느냐는 말이다."
지금 적들에게 저럴 병력이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다들 전선에서 아군이 달려들지 못하게 견제하거나, 아니면 잠시 교대하여 예비대로서 힘을 비축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이미 시체나 부상자가 되어서 널브러져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저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냐는 말이다.
그것도 이번이 처음 세운 것도 아니고 벌써 바리케이드만 세 번째 무너트리고 재건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원.
'···설마.'
그제야 늙은 원수의 머릿속에 라벤나 시민들이라는 가능성이 스쳤다.
마세나 군단이 즉석에서 저들을 징용하여 노역에 동원했다는 가능성.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를 않았다.
아무렴 징용이라는 게 그냥 다짜고짜 사람을 긁어모으면 끝이던가?
저 시민들도 어떻게든 노역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숨어다닐 테니 그들을 찾아다니고 또 끌고 갈 부대를 편성해야 하고, 그렇게 끌고 가도 툭하면 태업을 벌이거나 도망치려 드니 이를 관리할 부대가 새로 편성해야만 한다.
한데, 지금 마세나군에게 그럴 인력이 남아있던가?
'아무래도 보고가 잘못되었나 보군.'
결국 수보로프는 애당초 적군의 규모를 잘못 파악했던 거라고 단정 지었다.
처음부터 수천 명에서 만 명 정도 적들이 마지막까지 숨겨둔 예비대가 있었던 거라고.
그래, 모로 봐도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선에서는 말이다.
"뮈라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또인가.
이제는 따로 지시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뛰쳐나가는 아군 기병 군단을 바라보며 수보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지형 자체가 저지대에 있는 아군이 고지대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돌격해야 하는 구조라 시간이 지날수록 지칠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날파리 같은 놈들이 후방을 휘젓고 다니다니.
'슬슬 결정해야 할 차례인가.'
후방의 뮈라냐, 전방의 마세나냐.
이대로 계속 시간만 끌다간 승부가 나기 전에 병사들이 먼저 지치고 말 터.
그럼 꼼짝없이 기력을 온전한 적군에게 선수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군, 저 시건방진 날파리를 쏘아 떨어트리게."
결단은 신속했고, 대응은 그보다 재빨랐다.
타타탕!
곧 후방을 휘젓던 뮈라의 기병 군단을 향해 총알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마세나를 등진 보병대와 포병대가 아군 기병대를 돕고 나선 것이다.
그럼 제아무리 뮈라 혼자서 탁월한 용력을 선보여도 아무 소용 없었다.
뿌우우-.
결국 집중사격을 견디다 못한 뮈라가 퇴각 나팔을 불 무렵 바리케이드를 친 마세나군에서 아군의 퇴각을 원호하기 위해 하나둘 뛰쳐나오기 시작했으나.
"역시나 느리군."
수보로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애초에 주변의 가구나 건물 따위를 허물어서 급조된 바리케이드이다 보니 이를 넘나들 때를 위한 통로를 따로 준비해놔야 한다는 고려가 거의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보병이 재빨라 봤자 보병인 법.
뮈라의 기병 군단이 꽁지가 빠지라 멀찍이 도망칠 즈음 마세나군은 이제 고작 절반 정도가 바리케이드를 건너왔고.
"전군, 반전."
둥, 둥, 둥-!
그렇다면 수보로프의 러시아군도 그리 급할 게 없었다.
물론 여유롭다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걸로 앞뒤를 동시에 찔릴 걱정은 덜었으니까.
이제 뮈라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전선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마세나군 또한 허겁지겁 그들이 내려온 고지대를 다시 기어 올라가고 있을 터.
이렇게 몇 번 정도 아군의 동선은 최소화하면서 적들을 기진맥진하게 소모하게 한다면-.
콰콰쾅!
순간,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렸다.
"뭣···."
늙은 원수는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의 포격에 당했다는 걸 몰랐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군의 살점이 튀기고, 피가 강처럼 흐르는 참상에 새삼스레 겁을 집어먹은 것도 아니었다.
대열을 반전하기 위하여 밀집되어있던 탓에 한순간 천명 가까운 아군이 희생된 것조차 늙은 군인에겐 병가지상사에 불과했다.
다만, 적들에게 이만한 위력의 집중포화를 퍼부을 포병 전력이 남아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고작해야 기병포일 것 아닌가?
하지만 이만한 참상을 만들어냈다면 적에게 최소 중포로 구성된 포대가 있다는 것.
설마.
"뒤무리에가···?!"
그렇다면 합스부르크 군은 도대체?
쿵-!
하지만 놀라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탄력 있는 지반 탓에 표적지에 부딪히고서도 몇 번이고 튀어 오르고 있는 포환을 노려보며 수보로프가 외쳤다.
"적 포대의 방위는!!!"
"부, 북쪽입니다! 뒤무리에군이 전장에 나타났습니다!"
역시나 그런가.
그렇다면 이제 한가하게 걸리적거리기만 한 동맹군이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서진하라!"
어떻게 해서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루스의 건아를 살려 이 전장에서 이탈해야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포위망에서 이탈하여 카자크 군단과 합류해야만 한다! 우익은 이대로 마세나군의 남하를 견제하며 뒤따라오도록!"
"옛!"
후퇴라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후퇴,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적을 향한 공포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공포를 압도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런다고 고참병들까지 속일 수야 없겠지만, 이대로-.
타타탕!
그 순간 남쪽에서 사격음이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로 봐도 이상했다.
마세나군은 아직도 이제 막 중턱을 통과하였을 뿐이니까.
적들이 이제 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화약을 낭비할 오합지졸도 아니거니와, 드물게나마 아군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왜?
콰콰쾅!
"보고하라!"
"예?!"
"적 부대의 규모, 방, 병종! 하여간 뭐든 간에!!!"
늙은 원수가 고함쳤다.
뒤무리에군을 겨냥한 아군의 대응사 탓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고려나 하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미, 민병입니다!"
그러나 막상 보고를 듣게 된 순간.
"동남쪽에서 무장폭도들이 저격을 시도해오고 있습니다!"
늙은 원수는 더더욱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어떻게 농노 따위가.
사후의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성전도 아닐진대.
그것도 저 폭도들도 아니고 그들을 향하여 무기를 겨눌 수 있단 말인가?
우지끈-.
하지만 그런 한가한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고지대를 달려 내려온 마세나군의 총검이 러시아군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뮈라, 마세나, 뒤무리에, 그리고-민중.
휘리릭.
원수가 호각을 불어 전령들을 일제히 호출했다.
"사소한 피해는 신경쓰지 마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아군의 피해만 늘어난다. 전군, 속보!"
"각하, 서쪽에서 적 기병대가!"
과연 저 지평선 너머에서 뒤늦게 전황을 파악한 뮈라 군단이 흙먼지를 흩뿌리며 전장으로 돌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아닌가?
깃발이 조금 다른가?
"방진을 세워라!"
아무튼 아군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한 이상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요는 저 날파리들을 내쫓지 않고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뿐.
늙은 원수의 구령에 따라 러시아군은 부대마다 사각 방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투쾅-!
그러면 아군 포병대도 방진 중심으로 이동하여 포각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마세나군에게 붙들린 우익은 뒤따라오긴커녕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적들 사이에 포위되어서 궤멸당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우익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활로를 개척해야만 했-.
"각하!"
그의 부관이 절규했다.
"뮈라가! 후방에서 뮈라의 깃발이 나타났습니다!"
"뭐라···?"
그렇다면 서쪽에서 나타난 저 기병 부대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뿌우우-.
혼란해하는 틈을 타 퇴각 나팔과 함께 마세나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고.
콰콰쾅!
방진을 이루기 위하여 결집한 러시아군의 머리 위로 또 한 번 뒤무리에 군단의 포격이 퍼부어졌다.
첫 번째 포격보다 훨씬 요란하고, 파괴적인 공격.
곧 뒤무리에의 군단급 포병대가 속속 전장에 도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지끈!
그 직후 마세나군이 또다시 고지대를 타고 달려 내려오며 풍비박산이 난 러시아군의 측면을 난도질한 건 물론이었다.
"기병은···!"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늙은 원수가 부르짖었다.
"캅카스의 용자들은! 우리 기병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온통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누군가의 비명과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쇳소리뿐.
이렇게나 시가지에서 멀어졌는데도 저 너머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그림자 중 아군과 흡사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이런···!"
그제야 모든 사정을 짐작한 수보로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렴 저 멀리 앞서가던 기병대가 뭔 수로 반전 명령을 전달받았겠는가?
당장 그 직후 쏟아진 뒤무리에의 기습적인 포격 탓에 그는 물론이고 온 장교들이 한동안 피해를 확인하고 사지에서 빠져 나오느라 바빠 뮈라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뮈라를 추격하던 기병대장이 재주껏 아군의 지원사격이 끊어졌음을 눈치채고 너무 멀리 떨어지기 전에 자대로 복귀했어야 했건만.
사령부가 그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거듭 이동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보이지 않는 아군 기병대.
그리고 저 정체불명의 기병대보다도 한발 늦게 나타난 뮈라의 기병대.
노장이 모든 사정을 짐작게 하는 데에는 그 두 가지 정보면 족했다.
"각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부관의 절규.
콰콰쾅!
그와 함께 또다시 뒤무리에 군단의 집중사격이 그들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미처 전황을 살피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군이 휘말리건 말건 러시아군을 우선하기로 한 건지.
한데 뒤엉켜있다가 덩달아 포격에 휩쓸린 마세나군 또한 몸을 채 가누지 못하고 있었으나.
두두두두-.
수보로프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서쪽에서 나타난 적 기병대가 마침내 코앞까지 도착했으니까.
이제 망원경조차 필요 없었다.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색 배합.
아직 창기병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노라 항변하듯 이쪽을 향해 겨누어진 대형 차징랜스.
"하필이면."
늙은 원수가 투덜거렸다.
펑-.
한계에 부딪힌 랜스의 파열음.
누군가의 비명, 살점이 짓이겨지는 소리, 처절한 쇳소리.
하지만, 그 끝에는 우렁찬 말발굽 소리만이 남았다.
피로서 동포들의 넋을 달래는 명예로운 기사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