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사
피렌체시.
"예···?"
러시아 공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포로들을 그냥 돌려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도 그럴게.
"소식은 들었습니다. 투병 중이라던 차리나께서 끝내 붕어하셨다고요."
아.
그제야 러시아 공사의 표정에서 의아함이 사라졌다.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
하지만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듯했다.
"비록 우리 양국이 전쟁 와중이라고 하나, 우리 시대를 상징하시던 위대한 군주께서 귀천하셨다는데 어찌 안타까운 위로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포로 석방은 파리와 로마로부터의 심심한 위로이자 조문 대신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혹은 티배깅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고.
일부러 부담스러울 만큼 인자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운 채 덧붙였다.
"모쪼록, 이번 포로 석방이 양국 간의 오해를 해소하고 관계 정상화에 이바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각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어허, 이 양반이 아직도 못미더워 하는 눈치네?
그러면 뭐 러시아군 포로들 죄다 프랑스로 보내서 노동교화 시켜줘?
인재고 인력이고 없이 군대 재건하느라 뭐 빠져 볼래?
[에헤이, 우리가 바르바로이도 아니고 그럼 쓰나.]
뭐,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다.
만약 이 포로들이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였다면 당연히 맨입으로 석방해 주진 않았을 것이고, 하다못해 돈이라도 왕창 뜯어냈겠지만 얘넨 가오에 살고 죽는 러시아잖아?
이 시대의 보편적인 유럽인 감성보다는 아직 대초원의 유목제국 감성에 가까운 러시아인들에게 포로란 기본적으로 수치스러운 존재일 거다.
옛날처럼 포로=노예는 아니더라도 죽는 게 두려워서 적에게 투항한 비겁자들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애초에 포로들 몸값 낼 대금도 없을 것이고.
그럼 내가 죽은 차리나의 넋을 기려줬다는 건 기꺼워도 마세나에게 조리돌림까지 당하고 돌아온 포로들이 예뻐 보일리가 있나.
지금 내 제안을 들었다면 저 포로들은 차라리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달라고, 고국의 가족들이 소식을 모르게 해달라고 눈물을 쏟으며 자비(?)를 애걸했을거다.
한데, 이 포로들은 싸우다가 패하기라도 했지 저 카자크 놈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 덕분에 포로도 얼마 없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적네?
"그럼, 포로인솔은 귀측의 카자크 군단에 위임토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불씨가 보였으니 기름을 더 부어줘야지.
"시간과 장소라면 러시아 측에서 정해주십시오. 우리야 언제건 상관없으니까요. 아, 물론이지만 노획물자나 무기는 고국으로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뭐···."
공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사무적인 교섭만 이어질 뿐 포로 석방이나 포로 처우에 대한 항의는 없었다.
저 포로들의 귀국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러시아의 국가안보에 그만큼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애당초 내가 이번 일에서 딱히 기존 관례를 어긴 게 없는 데 항의할 건덕지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저 조리돌림만 빼면 전부 러시아 측에 호의를 베푼 거고 오히려 단독화친을 제의했다고까지 해석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만약 그 황태자라는 양반이 집주인 놈의 설명대로 좌우지간 어머니가 한 일이라면 무엇이 되었건 싫어하고 보는 삐뚤어진 놈이라면 두고두고 이번 일을 여제 말년의 실정으로 부각하려 들 거다.
그리고 그만큼 얼굴에 똥칠 당한 군부와 카자크인들의 반감도 거세질 거고.
그런다고 낙후된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진 않겠지만, 한동안 소란스럽긴 하겠지.
[하여간 바르바로이 놈들 아니랄까 봐.]
어허, 그러게 뻐킹 레이시즘은 자제하래도.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꾸벅.
사무적인 인사치레.
이를 마지막으로 러시아 공사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아마 지금쯤 머리가 무진장 복잡하겠지.
나야 외국인이지만 본인은 러시아인이니 황태자 파벌과 여제 파벌 간의 혈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이번 일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두 파벌의 희비가 갈릴 거라는 것도 쉽사리 눈치챘을 거다.
즉, 포로협상하러 왔다가 졸지에 러시아의 향방을 두 어깨에 짊어지게 된 것이다.
[운 나쁜 녀석.]
글쎄, 운 좋은 녀석 아니고?
세 치 혀만 잘 놀리면 새 차르의 제일가는 총신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이번일로 몇몇은 다들 몽골족이라고 야단법석을 피우는 와중 차리나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포로를 석방해줬다고 날 친러파로 넘겨짚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어느 쪽이건 먼 훗날에 과실을 수확할 때 아주 맛있게 익을 씨앗들뿐이니까.
뭐가 먼저 발화할지, 또 어떤 식으로 일이 터질지야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로써 한동안은 러시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지들은 온갖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다 부렸는데 이쪽에서 한번 참고 여제 천붕이라는 특수한 사정을 봐서 자비를 베풀어줬는데 또다시 패악을 부렸다간 뒷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
한동안은 지들끼리 다투느라 바쁘겠지.
열심히 이게 다 저놈들 때문이다! 라고 몰아세우면서 말이야.
똑똑.
"동지."
때마침 비서관이 내 상념을 깨웠다.
"그래, 무슨 일인가?"
"빈에서 온 사자가 협상을 제안해왔습니다."
"기어이 항복하겠다던가?"
"아뇨, 포로교환 협상입니다."
포로 교환이라.
뭐, 지난 라벤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술트를 비롯한 우리 프랑스군을 카드로 쓸 모양인데.
"항복 말고는 받지 않겠다고 전하게."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심산이 훤히 보이는데 속아 넘어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저쪽도 우리가 러시아 포로 처우를 두고 고심하고 있을 거라는 전제로 꺼낸 이야기일 텐데 이미 이쪽에서 차리나 죽었다고 조의를 표한다며 풀어줘 버렸네?
그러면 양심적으로 저쪽도 풀어줘야지?
뭐, 우린 모친 출타한 놈들이라 괜찮다며 꿋꿋이 안 풀어주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이러면 저들도 우리 프랑스군 포로들을 모질게 대하지는 못할 거다.
그래서 품위 있고 전통 있는 봉건귀족이란 놈들이 야만스러운 폭도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나 들을 테니까.
안 그래도 요즈음 후달리시는데 최후의 명분까지 박살이 나면 그 뒷감당 어쩌시려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축객령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그래도 귀하신 손님이 오셨을 텐데 박대해서야 쓰나. 후히 대접하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돌아가시라고 전하게."
"···예?"
어허, 이 녀석도 자꾸 표정 관리가 안 되네.
"대체 지금 우리가 저들을 박대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기껏해야 사이다라고 국내 여론이 좋아하는 정도?
그런데 이미 승전으로 한창 물이 올랐을 여론에 추가로 불을 지펴봐야 폭주하기밖에 더 할까.
괜히 혁명에 대한 편견이나 악인상만 강화해서 나중의 발칸반도에 혁명정신 퍼트릴 때 방해만 되겠지.
그럴 바에야.
"저 합스부르크의 사자를 우리 쪽으로 회유한다고 생각하고 동무가 이런저런 꾀를 내보게."
그제야 혁명 동아리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옳지, 역시 얘넨 이런 식으로 말해야 알아듣는구먼.
"실패해도 상관없으니 재주껏 실력을 발휘해보란 말이야. 알겠나?"
"물론입니다, 동지. 절대로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음-.
[···실망 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면 오히려 더 걱정만 느는데.]
역시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얘네가 의욕이 있는 건 좋은데 역시 경험 부족이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야.
뭐, 이쪽으로는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라니. 대체 누구냐, 넌.]
왜. 뭐. 왜.
이놈이 또또또 지도 맨날 좋다고 동의해줬으면서 인제 와서 선 그으려 드네?
여하튼 내가 싫어하는 어떤 양반도 말했었지.
몽둥이에 상냥한 말을 더하면 몽둥이만 휘두를 때보다 더욱 많은 걸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몽둥이를 휘두를 명분을 만들었고, 또 몸소 나무를 베고 옻칠해가며 정성스레 몽둥이를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 이 몽둥이 가설을 실증하러 가보자.
모름지기 사나이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썩혀두기에는 아깝잖아?
[아니, 앞뒤가 반대-.]
입 닥쳐, 막시밀리앙.
***
베를린.
"그러게, 내 진작 말했잖은가."
뚱보 식충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한심하다는 듯이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왜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끼어들어야 하느냐고 말이야. 결국 불필요한 전쟁으로 대왕께 물려받은 아까운 군인들과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신영토만 잃어버리고 말았잖은가. 응?"
"하오나, 폐하-."
"그만. 이미 다 지난 이야기 아닌가. 이게 다 실리가 아니라 그까짓 명분이니 의리니 하는 것에 매몰되어서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나라를 이끄니 이 모양이 난거지. 쯧쯧."
저기요, 당신이 지금 그 말을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으나,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야 결과적으로는 이 뚱보 식충의 말대로 되어버렸으니까.
차라리 이 국왕의 주장대로 막바지에라도 슬쩍 빠졌으면 그냥 동맹이란 동맹은 모조리 잃어버리는 선에서 끝났으련만.
괜히 남의 전쟁에 끼어서 라인란트-라고 하기엔 막상 프로이센은 라인강 서쪽에 영토라고는 코딱지만큼 밖에 없었지만-과 단치히를 도로 토해내고 막대한 사상자에 빚까지 졌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주저하는 국왕을 곁에서 보채고 압력을 줘서 끝내 오스트리아를 위하여 무모한 전쟁(?)에 나서게 한 신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들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무책임한 항변뿐이었으니.
"다들 러시아마저 라벤나에서 프랑스에 패했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을걸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 글쎄요?"
"쯧쯧. 이 머리 나쁜 친구들 같으니라고. 아직도 모르겠나? 이제 폴란드 분할은 글렀다는 소리야."
확실히.
폴란드도 러시아와 혈전을 치르느라 엉망진창이 되기야 했지만, 이제 전쟁이 끝나고 나면 러시아도 오스트리아도 한동안 전후 수습에 바쁠 테니 폴란드 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다.
프랑스도 이번 전쟁에서 정식으로 동맹군으로서 참전한 폴란드가 망하도록 두지는 않을 테고.
그러면 런던으로부터의 대대적인 투자와 자비로운 융자 덕분에 간신히 군대를 재건한 프로이센만으로는 폴란드를 공격하기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러니까.
"하노버를 점유하세나."
"···예?"
거긴 지금 영국이랑 동군연합인데요.
펄럭.
다들 곤혹스러워하는데 국왕이 밀서를 꺼내 들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프랑스군이 라인강을 건너 신성로마제국 영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도록 눈감아주는 대가로 프로이센이 마인강 이북의 소국들과 하노버 왕국을 점유하는 걸 묵인하겠다.
그러면 그 발신인이 누구인지, 또 어떤 정부를 대표해서 밀지를 주고받았는지야 따로 고민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애당초 왜 우리가 또다시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국왕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저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했네. 대왕께 물려받은 아까운 군인들, 그리고 천문학적인 빚까지. 한데 저들은 지난 협상장에서 어떻게 했나?"
프로이센을 모질게 외면했었지.
결과 프로이센은 단치히를 비롯해 폴란드로부터 빼앗았던 신영토를 대거 잃어버려야만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미안하다는 사죄 한마디 없었다.
사실은 저지대와 라인란트를 뜯기는 바람에 남의 사정까지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던 거지만, 딴에는 그러했다.
"인제 그만 우리를 위해 사세나."
뚱보 식충이 팔짱을 끼며 으름장을 놓았다.
"솔직히 다들 이탈리아까지 출병하는 건 반대하고 있었잖은가?"
확실히.
그제야 융커들도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베를린의 관점에선 이번 전쟁에 끼어들 이유도, 대의도 없었다.
애당초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에도 현 프로이센령은 로마가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이웃 폴란드와 러시아의 혈전이 훨씬 흥미진진했으면 했지, 저 멀리 지중해에서 그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유로 영 못마땅한 놈들끼리 투덕거리고 있다는데 감흥이랄게 있을 턱이 있나.
기껏해야 그대로 둘 다 공멸해버렸으면 좋겠다-정도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베를린은 런던의 거듭되는 독촉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지금껏 중립을 지켜왔다.
한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소국들만이 아니라 러시아군마저 패했단다.
그러면 이제 베를린으로서도 계산이 복잡해졌다.
일단 이번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갈린 거니까.
이대로 패색이 짙은 오스트리아를 거들어서 완패만큼은 피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오스트리아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저 주걱턱들의 살점을 신나게 뜯어먹을 것인가.
힘의 균형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런던의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외교관들이라면 으레 전자를 택했을 테지만.
"으음, 뭐. 땅을 떼준다면야···."
"솔직히 양심적으로 그때 주걱턱 놈들이 사과하는 의미에서 먼저 땅을 떼어줬어야 했던 거 아닌가?"
"그래, 결국 그 호들갑을 치더니 마리아 안토니아랑 그 일가도 아직 멀쩡히 살아있더구먼."
"살아있을 뿐인가. 그 딸년이 붉은 리슐리외랑 붙어먹었다던데."
"뭐야. 그러면 저희가 빠져나올 숨구멍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우리까지 휘말리게 만든 건가?"
이 프로이센 왕국의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융커들은 달랐다.
일단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가 입은 피해가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저들도 나름 벨기에를 잃어버렸다지만 이곳은 이미 한번 반란이 일어나서 독립국이 건국되었다가 간신히 재정복한 지역이고, 라인란트는 애당초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소국들의 영지였지 오스트리아 본령과 이어진 영지가 아니었다.
한데 단치히는?
여긴 프로이센 본령과 이어진 프로이센 왕국의 영지였다.
비록 점유한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땅이었다지만 좌우지간 본토에 편입될 예정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호들갑을 떨며 프로이센까지 이 불필요한 전쟁에 끌어들였던 합스부르크는 나중에 되찾아주겠다고 둘러댈 뿐 아직도 뻔뻔스레(?) 프랑스와의 혈연관계를 이어 나가려 하고 있으니.
프랑스의 확장주의로 인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돕는다는 건 영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닌 말로 오스트리아를 돕는다고 저들이 이탈리아 땅을 떼어주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에 비하면 프랑스는 얌전히 있어 주기만 해도 영토를 뭉텅이로 떼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걸 구태여 천칭에 달아보기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한 융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떻게 말인가?"
"빈이야 은혜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왈패들이지만 런던에는 빚이 있으니 하노버를 대신 보호해주겠다는 명분을 대더라도 그 뒷감당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서신에 나온 대로 프랑스군이 동진을 시작하면 우선 동원령을 선포하시죠. 그러면 이쪽에서 서지 않아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런던에서 하노버 방위를 위해 파병을 청할 테니 그때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한다는 핑계로 약속받은 영토를 점유하면 될 겁니다."
"자네."
뚱보 식충이 희희낙락하며 답했다.
"전쟁만 잘하는 게 아니라 외교에도 이리 일가견이 있었다면 진작에 내게 말을 해줬어야 할 것 아닌가?"
"하핫! 과찬이십니다!"
"어허, 과찬이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남의 전쟁에 끌려가서 손해만 보고 돌아오는 게 외교였다는 말인가?"
그것이 지난날 참전을 부추기던 문민관료들을 겨냥하는 조소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에 몇몇 문민관료들이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으나,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 나라는 저 융커들의 나라였으니까.
차라리 돈과 인명만 잃고 끝났으면 모를까, 토지를 빼앗긴 이상 그들의 발언권이 돌아오려면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그래, 이게 바로 실리고 합리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융커들 또한 웃음을 터트렸다.
적들의 팽창이 두렵다면 그들도 팽창하면 된다.
보라.
이토록 세상 이치란 간단했다.
변화
라인란트 전선.
"···이건 약속과는 다르잖소."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카를 대공이 프로이센 진영에서 건너온 전령을 노려보았다.
"함께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폴란드를 나눠 가지자고 했잖소."
"그게-."
"그런데 지금 당장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왜 지난 회담 때만 해도 없었던 번복으로 양국의 동맹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거요?"
전령은 긴장한 듯 어버버 거릴 뿐 끝내 그럴듯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아마 이들도 제대로 전달받은 게 없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말주변이 모자라서 카를 대공을 능숙하게 속일 자신이 없거나.
"하아-."
땅이 꺼지라고 한숨.
달관한 듯 카를 대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그, 저기."
"귀국은 이번 전쟁에 관여할 생각이 없으신 거잖소.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까 가시오."
괜히 더 험한 말 나오기 전에.
구태여 품위 없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령은 그 즉시 달아나듯이 군영을 떠났고, 이제 참모들은 작전 지도 위에서 프로이센의 남색 말들을 치워버렸다.
드르륵.
그러자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만으로 가득 찬 지도만이 남았다.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이 되물었다.
"5시간 전 슈투트가르트 방면에서 북상하는 모습이 관측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겠군."
"예, 아마도···."
참모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직 재단하기엔 이르네."
카를 대공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부대에 나폴레옹의 군단기를 발견하거든 정면으로 승부를 겨루지 말고 지연전을 펼치라고 전하게."
"하오나 전하, 그랬다간-."
"나폴레옹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라고 했지,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네."
즉.
"나폴레옹을 철저히 고립시키게.
그들의 임무는 나폴레옹을 붙잡아두는 것이지 적들을 격퇴하는 게 아니니까.
처음부터 그것만을 위해 훈련해왔고, 또 이를 위하여 일부러 조금씩 부대 간 간격을 벌려뒀다.
그래야 카를 대공의 본대가 나폴레옹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동안 별동대가 착실하게 적들을 깎아내며 최종적으로는 적의 공세를 좌절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왜 아무도 말이 없는가?"
그렇지만 참모 중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그 나폴레옹이었다.
북이탈리아에서 속속 들어오는 소식들만 봐도 전황은 최악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지원다운 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그 누가 감히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그건 용기가 아닌 만용이었다.
명예로운 기사니, 뭐니 제아무리 추켜세워줘봤자 그들도 인간이었다.
죽음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분위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간.
후우-.
카를 대공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카이저의 동생을 실망 시키고 만 것인가.
뒤늦게 가슴이 덜컹한 참모들이 억지로 기운을 쥐어짜 내려던 찰나.
"잠시 밖으로 나가세나."
척.
사령관이 앞장서서 막사를 나섰다.
그러면 그의 부관들은 다만 당황하며 뒤따를 뿐이었다.
카를 대공은 그 길로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머지않아 나폴레옹과 일전을 치를 거라는 사실의 겁에 질려 떨고 있던.
그리고 보기 드문-어쩌면 생전 처음 보는 황족의 등장에 놀란 농노들에게로.
"제군들."
푸르륵.
카를 루트비히가 그의 애마에서 내리며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고풍스러운 사교회에서 쓰이는 프랑스어와는 사뭇 다른, 투박하고 정직한 남부식 독일어였다.
"제군들은 어느 나라의 군대인가!"
병사들은 한참을 답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만일 그가 누구의 군대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황제의 군대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
나라라.
"오, 오스트리아 대공국입니다!"
"보헤미아 왕국입니다!"
"크로아티아 왕국입니다!"
"마자르!"
"갈리치아에서 왔습니다!"
지당하게도 대답이 엇갈렸다.
그야 그들은 한 명의 카이저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인 엄연히 다른 나라와 민족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다! 제군들은 누구나 자랑스러운 우리 제국의 제국민이며, 고향 땅의 형제자매들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난 명예로운 전사들이다!!!"
카를 대공은 그들이 옳다며 긍정해주었다.
농노가 아닌 제국민이라고.
제 신세를 고치기 위하여, 출세를 위하여 흘러들어온 한량이 아니라 조국을 지키는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나는 오늘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랑하는 조국과 고향의 동포들을 지키기 위하여 기사답게 저 추악한 침략자들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다!"
카를 대공이 뒷짐을 진채 병사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부르짖었다.
"두려운가? 그래, 두려울지도 모른다! 패할까 봐 두렵고, 사지가 찢어지거나 죽게 될까 봐 두렵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