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혼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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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혼해요, 우리.
2023.06.01.
마리앤은 육중한 방문을 응시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두꺼운 떡갈나무가 마치 거대한 벽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주가 담긴 것 같은 청람색 눈동자가 설핏 긴장한 빛을 띠었다. 그녀답지 않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마리앤은 공단 천이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방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방문 너머에 있는 남자를.
“크리스토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남편의 이름이 흩어졌다.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먼 훗날, 오늘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꾹 깨물고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노크를 하고 나서야 방문 너머에서 “들어 와.” 하는 건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언제 어느 때고 그녀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쉰 마리앤이 손잡이를 돌렸다. 작은 소음도 없이 열리는 문 너머로 잘 정리된 집무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이 커튼처럼 드리운 커다란 창 앞에 마호가니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상 앞에는 손님을 위한 소파와 테이블이 자리했다. 한쪽 벽면에는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높다란 책장이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온화한 봄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마다 그녀의 눈동자처럼 짙은 청람색의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책과 서류로 가득한 집무실에선 늘 메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녀가 꽤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마리앤은 방 안 곳곳을 눈에 담다가 마지막으로 창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에 상대를 꿰뚫어 보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그녀의 남편, 크리스토프 K. 슈나이더였다.
시원하게 뻗은 눈썹과 콧날은 남자다웠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일견 창백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앤은 비즈니스 슈트 아래 얼마나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손가락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한 몸이었다.
그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딜 때면, 그녀는 무거움보다 안정감을 먼저 느끼곤 했다. 아마도 저 대단한 남자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게 실감 나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조끼 위에 재킷을 걸쳐 입던 크리스토프가 방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마리앤이라는 걸 확인한 그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무감정한 눈동자와 꽉 다문 입술은 평소와 같이 냉철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완벽하게 빗어 넘겼고, 비즈니스 슈트는 주름 한 점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리앤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크리스토프.”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지. 지금 나가는 길이야. 보텐슈타인 판사장과 약속이 되어 있어.”
뱃속을 찌르르 울리는 나직한 음성은 여전히 그녀의 취향이었다. 칼로 자른 듯 깔끔한 말투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음성까지.
하지만 그녀는 때에 따라 그 목소리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잘생긴 얼굴이려나.
어쩌면 잘생긴 얼굴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열에 한둘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금발에 벽안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차가워 보이는 그의 인상 탓에 처음 크리스토프를 만나는 사람들은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앤에겐 크리스토프의 냉소조차 그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그녀의 눈에는 두꺼운 콩깍지가 씐 게 틀림없었다.
“중요한 일이에요. ……적어도 나한테는.”
그녀가 미심쩍은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부터 그녀가 할 말이 크리스토프에게도 중요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시계를 확인한 크리스토프가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녀와서 하면 안 되나? 판사장이 시간 약속에 철저한 사람이라.”
딱딱한 말투에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움칠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할 그녀였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결심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마리앤이 굳은 얼굴로 침묵하자, 짧게 한숨을 내쉰 크리스토프가 빠르게 말했다.
“3분 주지. 짧고 간결하게 용건만.”
별안간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지독히 크리스토프다웠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마리앤의 웃음에 가지런하던 검은색 눈썹이 꿈틀했다.
크리스토프는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의 미소를 응시했다. 마리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볼 것처럼 그의 시선이 집요한 빛을 띠었다.
크리스토프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마리앤이 선수를 쳤다. 그녀가 책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대답했다.
“1분이면 충분해요.”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힐긋, 시계를 확인한 크리스토프가 서류 대신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심한 물음이 책상을 건너갔다.
“이게 뭐지?”
“이혼 서류예요.”
“…….”
일순, 크리스토프가 입을 다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원래도 표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라 그 차이가 미세했지만, 조금 더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성가신 표정으로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마리앤.”
“이혼해요, 우리.”
조용히 숨을 들이켠 마리앤이 마침내 그 말을 뱉었다. 결정적인 순간, 목에 탁 걸려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말은 의외로 쉽게 흘러나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연습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쯧.
크리스토프가 낮게 혀를 찼다.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한 그가 가방을 손에 들었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로니카 때문인가? 처제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지만, 그녀가 강물에 투신한 사건은 자살이 명백해. 내가 직접 경찰 수사 기록을 확인했고, 기숙사의 룸메이트도 만났어. 그녀의 말에 의하면,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힘들어했다고 하더군. 이 사건에 의문의 여지는 없어, 마리앤.”
그 단호한 어투에 마리앤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베로니카는 어릴 적 우물에 빠져 죽을 뻔한 뒤로 물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분수만 보여도 길을 빙 둘러 가던 겁 많은 아이였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베로니카가 깊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강물에 투신하는 것이란 얘기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앤은 베로니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뼈아픈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겐 중요한 문제가 크리스토프에겐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자, 애써 외면했던 진실들이 마리앤의 눈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 역시 그에겐 썩 중요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크리스토프의 말처럼 베로니카의 사건이 도화선이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3년간, 그녀의 안에서는 착실하게 장작이 쌓여갔다.
남은 일은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녀의 가슴 속에는 새카만 재만 흩날리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사랑도, 원망도, 기대도 사라진 채.
그러면 지금보다 더 편해질까?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하지.”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는 이 순간조차 지독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었다. 그는 마리앤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혹은, 베로니카 사건을 좀 더 알아봐 달라는 협박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크리스토프의 대수로울 것 없는 태도는 그의 동의 없인 이혼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녀와 이혼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리앤이 그의 시계에 시선을 던지며 가볍게 눈짓을 했다.
“내 용건은 끝이에요. 보텐슈타인 판사장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요?”
“갔다 와서 이야기하지.”
크리스토프는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저벅저벅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그에겐 3년을 함께한 마리앤과의 이혼보다 보텐슈타인 판사장과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기어코 마리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다.
툭.
또 하나의 나무토막이 가슴 위에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불씨가 옮겨붙어 새까맣게 타버릴 장작이.
“마리앤.”
그때, 크리스토프가 집무실을 나가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 마리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상처가 벌어져 쓰라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무슨 말인가 하려던 그가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한 후, 다시 복도로 나섰다.
“저녁에 이야기하자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마리앤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크리스토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마리앤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아니, 저녁엔 볼 수 없어요, 크리스토프.”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떨어진 혼잣말이 그녀의 발치를 맴돌았다. 그래,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기회를 차 버린 크리스토프에 대한 복수이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생애 단 한 번의 일탈이었다.
“카린!”
마리앤이 하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어디선가 잽싸게 나타난 카린이 “부르셨어요, 슈나이더 부인?” 하고 고개를 숙였다.
슈나이더 부인.
그 말에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움칫했다. 그러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그녀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완벽한 계획은 작은 틈 하나로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사려 깊은 눈으로 카린을 보던 마리앤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지금부터 쇼핑을 가려고 하는데, 준비를 서둘러 주겠어?”
“물론이죠. 슈나이더 부인.”
카린이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마리앤은 무심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마지막이 될 집무실의 풍경을 오래도록 눈 안에 담아 두었다.
방금까지 그곳에 머물렀던 한 남자의 모습도.
***
마리앤과 카린을 태운 자동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을 느리게 빠져나갔다.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던 수위가 자동차를 향해 인사했다.
저택 앞 사유지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목을 한껏 젖혀야만 볼 수 있는 키가 큰 나무들이었다.
서서히 속도를 높인 자동차가 끝없이 펼쳐진 메타세쿼이아 길을 가로질렀다. 마리앤은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푸른 잔디 위에 3층짜리 흰색 석조 건물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새파란 지붕이 흰색 외벽과 대비되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났다.
그곳에서 있었던 즐거운 일과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크리스토프와의 추억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러세요, 슈나이더 부인? 두고 오신 거라도 있으세요?”
카린이 그녀를 돌아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마리앤이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야, 카린. 그런 거 없어.”
두고 온 미련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