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땅, 블라우버그로.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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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땅, 블라우버그로.
2023.06.02.
마리앤은 창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마차를 탄 귀부인과 우유가 든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 신문을 파는 소년. 익숙한 풍경이 그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고 자부했다. 크리스토프는 현재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였고, 그녀는 슈나이더 부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부부동반 모임에서는 그의 옆에 서서 꽃처럼 아름답게 미소 지었고, 사업 파트너의 아내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졌다.
어디 그뿐인가. 때가 되면 연회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여러 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해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도 했다. 예술과 자선단체를 후원하는 사회사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마리앤의 삶은 없었다. 오직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삶만 존재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사랑했고, 그 역시 마리앤을 사랑했으니까. 아니, 적어도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수없이 피어난 기대는 번번이 목이 꺾였고, 그녀는 절망 속에서 차츰 체념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니까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면 안 돼. 그가 바쁜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잖아, 마리앤. 그러니까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고 잔소리하면 안 돼. 네가 참아.
그렇게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닥뜨렸다.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럴싸한 아내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굳이 마리앤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누구든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역할만 훌륭히 수행해 준다면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은 크리스토프가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명망 있는 변호사였고, 슈나이더 후작의 손자였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한 적 없는 자존심이 높은 사내이기도 했다.
마리앤이 그의 인생에 이혼이라는 오점을 남기는 걸 허락할 리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쥐고 흔들게 두진 않을 것이다.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경험은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만큼 충분했다.
“다 왔습니다, 부인.”
도심을 누비던 자동차는 호화로운 백화점 앞에 도착해서야 완전히 멈추어 섰다. 운전기사인 귄터가 룸미러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마리앤은 떨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평소보다 느리게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가방이 너무 크지 않으세요? 제가 들까요?”
카린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가방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설핏 긴장한 빛을 띠었다.
“괜찮아, 카린. 아침에 카탈로그를 봤는데, 올봄에는 이렇게 큰 가방이 유행한다더구나.”
“그래요?”
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드레스를 빼입은 귀부인들이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앤처럼 큰 가방을 들진 않았다.
그러나 카린의 의문은 오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차피 귀부인들의 취향이야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으니까.
“어느 가게부터 들르실 거예요?”
“일단 새로 나온 드레스부터 한번 볼까?”
“예, 슈나이더 부인.”
카린이 능숙하게 앞장을 섰다. 마리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뒤를 힐긋거렸다. 어느새 귄터가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슈나이더 부인. 오랜만에 오셨네요. 마침 이번 주에 새로 나온 드레스가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직원에게 신상 드레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마리앤의 정신은 반쯤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한 계획은 이론상으론 완벽했다. 문제는 실제로도 완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 오세요, 슈나이더 부인.”
점원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돈은 쓰고 간 마리앤을 향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다.
고개를 까딱인 마리앤이 진열된 옷 사이에 자신의 부채를 슬쩍 끼워 넣었다. 그러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카린은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보조를 맞추었고, 귄터는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한 걸음 뒤에서 쫓아왔다.
마리앤은 귄터와 카린을 얼마나 잘 따돌리느냐에 계획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그녀가 카린에게 시선을 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린, 잠깐 휴게실에 들르고 싶어.”
휴게실은 쇼핑에 지친 귀부인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휴게실 뒤편에는 여성 전용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어 급한 볼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 말의 속뜻을 눈치챈 카린이 “예, 슈나이더 부인.” 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부인.”
휴게실 앞에 도착한 귄터가 양손에 짐을 든 채로 입구에 섰다. 휴게실로 들어가던 마리앤이 “어머!”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카린이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세요, 부인?”
“이런, 어쩌지. 가게에 부채를 두고 온 것 같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귄터는 이미 한 발을 떼고 있었다. 마리앤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카린에게 시선을 주며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귄터는 짐이 많잖아. 정확하게 어느 가게에 두고 온 건지 기억이 안 나니 점원과 친한 카린이 다녀오는 게 좋겠어. 그리고 오는 길에 보석상에 들러 일전에 주문한 반지가 완성되었는지 물어봐 주렴. 아직 기한이 며칠 남긴 했지만,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말이야.”
“물론이죠, 슈나이더 부인. 제가 이 백화점은 꽉 잡고 있답니다.”
카린이 저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마리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환하게 웃는 카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 카린.”
마리앤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카린이 “그럼 다녀올게요.” 하며 등을 돌렸다.
“카린.”
마리앤이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순진한 표정의 하녀가 “예?” 하고 고개를 돌렸다. 갈색 눈망울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아니야, 고마워.”
마리앤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예.” 하고 대답한 카린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왔던 길을 돌아갔다.
카린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마리앤이 귄터에게 눈인사를 건네곤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긴장했던 어깨가 풀썩, 떨어졌다. 참았던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일단 눈썰미 좋은 카린을 따돌리는 덴 성공했네.”
짧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은 화려한 향기를 내뿜는 꽃과 안락한 소파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 많은 귀부인 세 명이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들이었다. 하녀 세 명이 구석에 서서 그녀들을 기다리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댔다.
마리앤은 그들을 지나 곧장 화장실로 이동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그녀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황급히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미리 준비해 온 옷과 모자, 그리고 작은 손가방이었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밖으로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색 베일, 그녀는 영락없이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보였다.
“좋아. 감쪽같네.”
마리앤이 검은 손가방을 팔에 걸고 휴게실을 가로질렀다. 얘기를 나누던 귀부인들이 갑자기 등장한 미망인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부인이 언제 들어왔던가요?”
“글쎄요, 저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요.”
“어머, 우리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나 보군요.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다니.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런가 봐요, 호호호.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찌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누가 아니래요.”
마리앤은 휴게실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짧게 심호흡을 했다. 몇 걸음 밖에는 귄터가 서 있었다.
과연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그녀의 계획은 완벽했지만, 귄터가 마리앤을 알아보는 순간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마리앤은 검은 베일을 드리우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척 얼굴을 가렸다.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을 했다. 마리앤은 슬픔에 젖은 미망인을 연기하며 휴게실을 나섰다. 바로 앞에 귄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쿵쿵쿵.
그녀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고, 목구멍이 죄어들었다. 때마침 입구에 서 있던 귄터가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쿵쿵쿵쿵.
숫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슬픔으로 감추곤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귄터의 바로 앞을 지나갔다.
쿵쿵쿵쿵쿵.
잠시 그녀를 보는가 싶던 귄터가 이내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마리앤은 이대로 줄행랑을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며, 평소와 같은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귄터가 “슈나이더 부인, 어디 가세요!” 하며 그녀를 잡아챌 것 같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백화점 문을 열고 나선 그녀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줄지어 서 있는 승합마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한 마부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리앤이 초조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기차역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예, 알겠습니다. 저기 서 있는 깡통 같은 택시보다 빠르게 도착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부인.”
호언장담한 마부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우두커니 서 있던 갈색 말이 네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택시라는 고급 이동수단의 등장에 생계를 위협받은 마부는 행여 그녀가 실망할까, 성마르게 채찍을 내리쳤다.
마리앤은 마차가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반대편으로 노신사를 태운 마차가 지나갔고, 길가에는 꽃을 파는 수레가 한 대 서 있었다.
어린 소녀가 지나가는 신사에게 성냥을 건넸고, 강퍅한 인상의 신사는 가녀린 손을 매몰차게 내리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어디에서도 그녀를 쫓아오는 카린과 귄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
마리앤은 뜨거운 차를 삼키듯,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마침내 그녀는 크리스토프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감정의 그림자가 너울졌다. 그것은 두고 온 과거에 대한 미련인 것 같기도 했고, 막막한 현재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세 가지가 모두 섞인 복합적인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쉬웠고, 두려웠으며, 동시에 설렜다.
마리앤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괴물의 울음처럼 높고 우렁찼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땅, 블라우버그로.
마리앤은 결의를 다지듯 두 눈에 힘을 주고, 점점 가까워지는 기차역을 응시했다.
“도착했습니다, 부인.”
기차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착하고 떠나는 이들이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쏴아아, 철썩철썩, 인파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마리앤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마부에게 금화 하나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남은 건 가지도록 해요.”
“고맙습니다, 부인!”
이제부터 마리앤 슈나이더가 아닌, 마리앤 클로제의 인생을 찾을 시간이었다. 더불어 베로니카의 죽음에 얽힌 진실도 밝혀낼 것이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으로.
***
“안녕히 가십시오, 슈나이더 경.”
집사의 배웅을 받으며, 판사장의 저택을 나서던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만족스러운 감정을 감추었다.
그가 원하던 것을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절반 이상의 성과는 거두었다. 자신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조건부보석이라. 썩 나쁘진 않군.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려던 크리스토프는 어디선가 지켜볼 눈을 의식해 손을 거두었다. 그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