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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망을 갔다고. 누가? (3/23)


3. 도망을 갔다고. 누가?
2023.06.03.


현재 수도 법정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크리스토프 슈나이더일 것이다.

100퍼센트의 승률을 자랑하는, 경이로운 성적의 변호사.

그의 몸값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재판이 끝난 뒤에는 신문 1면이 온통 그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크리스토프가 변호를 맡으면 사형수도 풀려난다는 농담이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운 건 그게 농담만은 아니라는 거다. 살인혐의를 받던 한 귀족의 무죄 판결을 이끈 전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 귀족이 정말로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그를 추앙하는 무리가 있으면 견제하는 무리도 있었다.

같은 편일 땐 든든하지만, 적으론 만나고 싶은 않은 변호사.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냉혈한. 한번 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바다의 포식자, 상어 변호사.

그것이 크리스토프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그의 변론은 물샐 틈 없이 철저했고, 그의 공격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때로는 냉철한 이성과 논리로 상대를 짓밟았고, 때로는 모욕적인 언사로 상대를 자극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군중심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제아무리 잘난 검사와 변호사도 그의 앞에선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상대 변호인이 크리스토프라는 소식이 들리면 수임을 포기하는 변호사까지 등장할 정도라고 하니, 그것이 명성인지 악명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는 본인의 능력뿐 아니라 출신 가문까지 훌륭했다. 그의 조부인 슈나이더 후작이 사망하면, 유일한 손자인 크리스토프가 작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가 갖게 될 권력과 재력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까다로운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택으로 모실까요?”

운전기사의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곤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피곤한 듯 눈을 감던 그가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편두통 때문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보텐슈타인과 대화하는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이다. 혹은, 아직도 자동차에 익숙해지지 못했거나.

―이혼해요, 우리.

이제야 저택을 나서기 전 마리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성가신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운전기사가 룸미러를 힐긋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크리스토프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마리앤의 폭탄 발언은 그를 겁주기 위한 공포탄일 게 분명했다.

공포탄은 공포탄일 뿐이다. 그녀의 공격은 그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마리앤이 크리스토프를 사랑한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크리스토프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형체가 없는 감정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쯧, 그가 낮게 혀를 찼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비극적인 사고 속에서도 슈나이더 후작의 후계자 생존하다!」

크리스토프가 네 살 되던 해, 슈나이더 후작의 성으로 향하던 자동차가 벼랑에서 떨어지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운전석에 있던 부친과 조수석에 있던 모친이 사망하고, 어린 크리스토프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모두가 비극적인 사고라고 입을 모아 애통해했다. 크리스토프라도 살아남은 게 천운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마지막 순간, 어린 크리스토프를 살리기 위해 부친이 핸들을 꺾고, 모친이 그를 껴안았다며 두 사람의 숭고한 희생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크리스토프뿐이었다. 슈나이더 후작조차 모르는, 추악한 비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목격한 크리스토프가 사랑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뭍 위에 올라온 물고기보다 빠르게 부패하는 그 감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믿었다. 청람색 눈동자에 담긴 크리스토프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해 보였고, 그녀의 목소리에 덧입혀진 그의 이름은 그 어느 때보다 감미롭게 들렸으니까.

마리앤은 크리스토프를 사랑했다. 그것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럴수록 크리스토프는 일에 몰두했다. 그의 명성과 비례해 그녀의 위상 또한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평민 출신의 슈나이더 부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주고 싶었다.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막강한 권력을 쥐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적당한 보석과 로맨틱한 디너 정도면 마리앤의 성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어느새 차가 멈추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운전기사가 뒷좌석으로 뛰어와 문을 열었고, 눈가를 매만지던 크리스토프가 차에서 내렸다.

힐긋, 시계에 시선을 던진 그는 다시금 허리를 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올리버에게 내일 저녁 식사를 예약하라고 말해야겠군. 아니, 내일은 의뢰인과의 저녁이 예정되어 있으니 모레가 좋겠어.

차 소리를 들은 집사가 문을 열고 마중 나왔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던 크리스토프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백발이 성성한 마틴은 평생을 슈나이더 가문에 헌신한 집사였다. 노련한 그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두 눈을 가늘게 뜬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마틴의 등 뒤를 훑었다.

평소 같으면 집사와 함께 그를 마중 나올 마리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무슨 일이지, 마틴.”

그가 노 집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틴은 크리스토프가 내뿜는 언짢은 기운에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에겐 상대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이가 많거나 연륜이 풍부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크리스토프가 후작 가문의 후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였고, 명령을 내리는 게 익숙한 권력자였다.

왕실에서 태어났다면 왕이 되었을 인물이고, 해적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바다의 제왕의 되었을 인물이다. 어디서든 피라미드의 정점에 설 인물.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마틴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의 잇새에서 면목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슈나이더 부인께서…….”

꿀꺽, 마틴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훤히 벗겨진 그의 정수리를 응시하던 크리스토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리앤에게 무슨 일이 있나?”

화가 많이 난 것일까. 마중도 나오지 않을 만큼.

크리스토프가 ‘이번엔 캔들 디너 정도론 어려울지도 모르겠군.’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마틴이 뒷말을 뱉었다.

“……슈나이더 부인께서 사라지셨습니다.”

“…….”

무슨 말인가 하려던 크리스토프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공기는 형체를 가지고 노집사를 짓눌렀다. 일순, 목이 죄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틴은 마치 자연의 순리에 역행이라도 하듯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친 순간.

“!”

그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웃고 있었었던 탓이다. 나른하게.

“다시 말해 봐, 마틴. 마리앤이 뭘 어쨌다고?”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틴은 크리스토프가 웃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지도,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측근의 자리를 지킨 마틴은 그가 이토록 화내는 건 처음이라고 확신했다. 별안간 슈나이더 부인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인, 대관절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마틴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자,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을 갔다고. 누가? 내 아내, 마리앤이?”

마치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오싹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이 커다란 뱀처럼 늙은 육체를 칭칭 감았다.

마틴은 도망가고 싶은 다리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버텼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보고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차츰 서늘하게 식었다.

기어코 그의 잇새에서 선득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하.

지켜보는 이의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차가운 그것도 웃음이라면.

***

마리앤은 거대한 연철 대문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검은 창살 사이로 끝도 없이 펼쳐진 잔디 정원이 보였다.

그 가운데 회색 저택이 우뚝 버티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저택이라기보다 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비와 바람에 쓸린 석벽은 산전수전을 겪은 강인한 노장 같았고, 뾰족한 첨탑은 노장이 들고 있는 거대한 창 같았다.

크리스토프의 저택도 넓고 웅장하기로는 수도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탄했으니, 아마 썩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유지 입구에서부터 대문 앞까지의 거리가 마차를 타고서도 한참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린 마리앤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땐 어떻게 하지? 지나가는 마차도 없을 텐데.”

다음 순간, 허리를 펴고 턱을 치켜든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런 데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오래지 않아, 쪽문이 열리며 호쾌한 인상의 수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나 마차를 찾던 그가 우두커니 서 있는 마리앤의 모습을 보곤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인.”

그녀의 행색을 살핀 수위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나 단호한 눈매는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불청객이라면 이골이 난 사내였다. 온갖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저택의 문턱을 넘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그들 중 저택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무장한 수위가 일을 퍽 잘했기 때문이다.

미망인이라. 이번에는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작전이군.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을걸.

철옹성처럼 단단히 무장한 그가 마리앤에게 시선을 주었다. 베일에 가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여염집 여인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우아하고 고상했던 탓이다.

아니지. 며칠 전에도 귀부인 행세를 하는 여인에게 된통 당할 뻔했잖아. 개인 마차도 없이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불청객 확정이야. 이 저택의 문은 통과할 수가 없다고!

수위의 눈동자가 점점 더 미심쩍은 빛을 띠는 찰나, 마리앤이 입술이 달싹였다.

“후작님을 뵈러 왔어요.”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위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어봤다. 왠지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가 그러도록 만들었다.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위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기를 싹 지운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앤이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클로제 부인이 왔다고 하면 만나 주실 거예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후작님께 여쭤보고 오세요.”

“클, 로제 부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수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라우버그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 텐데, 확실히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마리앤의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투는 미묘하게 명령조였다. 지시를 내리는 것이 익숙한 어조.

“클로제 부인이 후작님께 오래전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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