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찰청?
(4/23)
4. 경찰청?
(4/23)
4. 경찰청?
2023.06.04.
수위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후작님께 빚을 받으러 왔다?
눈앞의 여인이 슈나이더 후작보다 돈이 많을 것 같진 않았다. 그에게 빚을 지우려면, 최소한 왕족쯤은 되어야 했다.
고민하는 기색으로 머뭇거리던 그가 이윽고 “여쭤보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탓이다.
마리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그녀의 앞에서 쪽문이 닫혔다. 마리앤은 수위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근처에 있는 측백나무로 시선을 던졌다. 산들바람이 검은 베일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아마도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무얼 하리란 것 또한.
무서웠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스스로 결정한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오롯이 그녀의 결정에 의해 인생이 바뀔 터였다. 마치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한 발짝을 떼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잘할 수 있을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연약한 혼잣말이 바람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던 마리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굳은 의지를 품은 눈동자가 봄날의 감잎처럼 반들거렸다.
***
“들어오게.”
살아온 날을 보여주듯 노회한 목소리는, 그러나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가 방문을 열곤 가볍게 손을 뻗었다.
“들어가시죠, 클로제 부인.”
처음 보는 얼굴의 젊은 집사가 그녀에게 서글서글한 미소를 건넸다. 아마도 집사 보조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카펫처럼 바닥에 깔려 있었다.
마리앤은 고급스러운 가구와 그림을 지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푸른색 공단 의자에 앉은 노인은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예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노신사는 외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즈니스 슈트 차림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일견 여유롭고 푸근해 보였다. 하지만 마리앤은 그의 잿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클로제 부인?”
슈나이더 후작이 곁으로 다가온 마리앤에게 말을 건넸다. 마치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듯, 미심쩍은 목소리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슈나이더 후작님.”
마리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비로소 확신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앤이 도무지 왜 이런 꼴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듯,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눈가에 진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녀의 상복을 보던 슈나이더 후작이 “일단 앉으시오, 클로제 부인.” 하고 말했다.
“흠.”
슈나이더 후작의 시선이 또다시 그녀의 복장으로 이동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손자의 얼굴을 떠올리던 그가 손바닥을 비비며 집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단 차를…….”
“괜찮습니다, 후작님.”
슈나이더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후작이 이내 마리앤의 속내를 눈치채곤 집사에게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눈치 빠른 집사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마리앤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슈나이더 후작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녀를 바라보던 후작이 비로소 친근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마리앤? 정말로 마리앤이냐?”
“예, 후작님.”
슈나이더 후작은 자신의 손자며느리를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성실하게 내조했고, 슈나이더 가문의 유일한 여인으로서 집안 대소사를 잊지 않고 챙겼다.
크리스토프 옆에 서서 수더분하게 웃던 마리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눈길이 다시금 검은 상복의 미망인을 향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마리앤?”
끝내 답을 알 수 없었던 슈나이더 후작이 더 이상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앤은 베일을 살짝 걷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잇새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프와 이혼하겠습니다, 후작님.”
끄응.
슈나이더 후작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미간을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가에 진 주름이 덩달아 움찔거렸다.
그래, 그는 자신의 손자며느리를 제법 잘 알았다. 그녀가 허투루 이런 말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마리앤이 이혼을 입에 올렸다면, 두 사람 사이에 중차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마리.”
슈나이더 후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크리스토프의 것보다 옅은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친근하게 응시했다.
“크리스토프가 무뚝뚝한 건 나도 인정한다. 여자 마음을 살갑게 챙기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지. 일에 파묻혀 가정에는 또 오죽 소홀했겠느냐. 그동안 네가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
“후작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슈나이더 후작이 다시 한번 침묵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크리스토프를 두고 살가운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했다. 어떤 면에선 일관성 있는 사내였다.
그는 슈나이더 가문의 차기 후작이라는 타이틀에 만족할 사내가 아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더 높이 올라가고자 했다.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적어도 수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손자의 명성은 그의 영지, 블라우버그에까지 퍼졌다.
그래서 크리스토프가 결혼할 여자라며 마리앤을 데려왔을 때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가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결혼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대학에서 만난 두 사람이 얼마나 불같은 사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슈나이더 후작은 첫눈에 마리앤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제법 참을성이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마리앤마저 두 손을 든 모양이지만.
짧은 한숨을 내쉰 슈나이더 후작이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크리스토프가 이혼에 동의했느냐? 그 녀석이라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의 성정을 생각하는 후작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 녀석이라면 절대 수긍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하지 않은 뒷말을 짐작한 듯, 마리앤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침착했고 차분했다.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혼 서류를 던지고 도망 나온 길이에요.”
“도망……?”
슈나이더 후작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마리앤이 상복을 입고 있는 이유를 알아차린 그가 “하.” 하는 한숨을 흘렸다.
아니, 그건 한숨이라기보다 웃음에 가까웠다.
이윽고 슈나이더 후작의 잇새에서 “하하하.” 하는 폭소가 터졌다. 음전하고 현숙한 마리앤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의외라는 듯.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잿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도망 나왔다고 했느냐? 대관절 어떻게 하인들을 따돌렸지? 여간해선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 말에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마리앤이 그간의 일들을 조곤조곤 풀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후작은 휴게실에서 빠져나온 마리앤이 귄터의 앞을 지나는 부분에서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두 뺨이 한층 더 머쓱한 빛을 띠었다.
“으하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슈나이더 후작이 또다시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삽시에 표정을 지우곤 진중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얼핏 크리스토프를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크리스토프가 세월에 깎여 조금 더 둥글어지면 후작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렇게 간신히 크리스토프에게서 도망친 손자며느리가 내게 온 까닭은 무엇이지? 지난 빚을 받으러 왔다는 말까지 들먹이며 온 것을 보니, 보통 부탁은 아니겠구나.”
역시 슈나이더 후작이라고 생각하며, 마리앤은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마리앤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꿰뚫고 있었다.
“예, 후작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내가 너를 도와주는 척해놓고 뒤에서 크리스토프에게 연락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슈나이더 후작이 떠보듯이 물었다. 마리앤은 사려 깊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크리스토프와 결혼할 때, 후작님께서 저희의 결혼을 축하하시며 평생에 한 번, 그것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죠.”
그녀가 오랜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는 기억을 되짚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법대를 다니던 네가 졸업 후 꿈을 접고 남편의 내조에 전념하기로 결정했지. 그것에 대한 내 나름의 성의 표시였단다.”
그의 말처럼 마리앤은 법대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어 보수적인 대학이 처음으로 여성에게 문을 개방했고,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마리앤은 줄곧 변호사나 경찰 간부가 되고 싶었다. 진실을 밝히는 등대, 그 단어가 마리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 졸업한 여자 동기 중에는 이미 변호사로 자리를 잡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앤은 졸업 후 꿈을 접고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통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사랑했으니까.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마리앤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후작님의 입을 통해 나온 약속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 약속을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
강단 있는 그녀의 말투에 슈나이더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생소한 물건을 보듯 낯선 시선으로 마리앤을 응시했다.
어쩌면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건 자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숙하고 조용하게 남편을 내조하는 그림 같은 여인. 크리스토프의 옆자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던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 마리앤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은 여지없이 후작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그의 손자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니 몹시 유쾌하기도 했다.
하긴, 그 녀석도 인생의 시련을 겪을 때가 되었지. 꺾어진 적 없는 사내는 깊이가 없는 법이니까.
“그땐 기껏해야 네가 땅이나 보석을 요구할 줄 알았지,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처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내가 뱉은 약속을 이제 와 물릴 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무얼 도와주면 되느냐, 마리앤?”
슈나이더 후작이 기꺼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그를 보던 마리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이곳, 블라우버그 경찰청에 들어갈 수 있게 힘써 주세요.”
“…….”
다음 순간, 슈나이더 후작은 다시 한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간에 패인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윽고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경찰청?”
그러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슈나이더 후작은 “방금 경찰청이라고 했느냐?”라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마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후작님. 경찰청장에게 저를 추천한다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됩니다. 법대를 졸업했으니 소양 부족으로 탈락하진 않을 거예요.”
블라우버그는 슈나이더 후작의 영지였다. 시대가 변해 과거와 같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순 없다고 해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경찰청장뿐만이 아니다. 시장과 지역 판사 같은 유력인사들도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슈나이더 가문은 아직도 건재했다. 아니, 과거보다 더 광휘로운 영광의 순간에 있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슈나이더 가문이 왕국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부호가 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슈나이더 후작은 항구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블라우버그를 왕국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어쩌면 크리스토프의 수완은 조부의 것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경찰청.”
앵무새처럼 그 말만 읊조리던 슈나이더 후작이 다시 한번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연륜이 느껴지는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성의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