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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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만
2023.06.09.
“…….”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좋은 의미의 침묵은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시몬과 마리앤, 그리고 다시 시몬을 응시했다. 그의 입매가 뒤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장님, 이건…….”
“시대가 바뀌고 있어. 수도 경찰청에는 이미 열 명의 여성 경관이 근무하고 있네. 언제까지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지 않나, 니콜라스.”
시몬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마리앤은 그런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다가 마리앤은 왕립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했네. 블라우버그의 경찰청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우수한 인재지. 마리앤이 이곳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마리앤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슈나이더 부인으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이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들의 대다수가 속내를 숨긴 의뭉스러운 인간들이었다.
속으론 증오하면서도 겉으론 평범하게 웃는 이들. 야망을 숨긴 채 몸을 낮추는 이들.
덕분에 마리앤은 시몬이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현장보단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고 싶어 했다. 어쩌면 경찰청장보다 더 높은 곳을 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도 고심 끝에 한 결정이니 반박은 받지 않겠네, 슈테판 경감.”
시몬은 엄격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쏘아보았다. 니콜라스는 그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화가 났을 때는 직책을 부른다고 했던가.
방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 마리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본의 아니게 분쟁의 씨앗이자, 뜨거운 감자가 된 그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행세를 하며 죽은 듯이 서 있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네, 슈테판 경감. 내게 항명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만 나가 보는 게 좋겠군. 신입 경관에게 업무에 대해 알려주도록 하고.”
그를 한 번 노려본 니콜라스가 성난 기세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멀뚱멀뚱, 그의 뒷모습을 보던 마리앤이 서둘러 시몬에게 인사를 하곤 니콜라스의 뒤를 쫓아갔다.
시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여성 경관이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경찰청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걸리적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슈나이더 후작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출신의 한계가 있는 그가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슈나이더 후작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
니콜라스는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조용한 발소리가 자신의 뒤를 따라온단 사실을 깨닫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마리앤이 빙긋,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탐탁지 않은 눈동자가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부드러운 금발과 작고 하얀 얼굴, 폭풍이 불기 직전의 바다처럼 짙고 푸른 눈동자. 얇은 목과 가녀린 몸.
“…….”
니콜라스 역시 수도 경찰청에 여성 경관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여성 경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이 그녀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고지식한 사내였지만, 몰상식한 사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리앤 하베크?”
“예, 니콜라스 경감님.”
마리앤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를 응시했다. 험상궂은 표정이 무서울 법도 한데,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배짱 하나는 두둑하군.
“따라오게.”
그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앞장을 섰다. 마리앤은 양산 대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니콜라스의 반응이 무척 신사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적대적인 반응을 맞닥뜨린 탓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경감님. 신입 경관이요? 누가요? 여기 이 여자가요?”
“농담 그만 하세요, 경감님.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경감님의 농담은 농담 같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고요.”
“음……, 약해 보이는데요.”
붉은 얼굴에 다혈질로 보이는 사내가 마리앤을 손가락질했고, 호리호리한 체구에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한 사내가 빈정거렸다. 서스펜더를 한 젊은 남자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짧게 숨을 들이켠 니콜라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장님의 명령이다.”
“예?”
“우리 청장님께서 언제 그렇게 깨어 있으신 분이 됐대요?”
“현장을 떠나신 지 오래돼서 감이 떨어진 게 분명합니다! 제가 당장 청장실에…….”
“누가 가도 청장님의 생각은 돌릴 수 없다, 막심.”
“젠장!”
막심이라 불린 다혈질의 사내가 혀를 차며 마리앤을 노려보았다. 아마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마주쳐도 이보다 더 사납게 쏘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마리앤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에 뾰족한 가시가 돋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사나운 시선이 마치 형체를 가진 것처럼 사방에서 그녀를 찔러댔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자주 화를 내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마리앤은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 그의 감정이 흔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화가 난 척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크리스토프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침묵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크리스토프였다.
마리앤은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상대를 둘러보았다. 넷 중 누굴 고를까, 하다가 막심을 첫 번째 타깃으로 삼았다. 그가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없이 막심을 응시했다. 마리앤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눈을 부라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태도로 마치 위협하듯 상체를 쑥 내밀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리앤의 미소는 견고했고, 막심의 분노는 위태로웠다. 으윽, 낮은 신음을 흘리던 막심이 기어코 책상을 내리쳤다.
쾅!
“젠장, 마음대로 하세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그가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이번 침묵 대결의 승자는 마리앤이었다.
세상에. 살다 보니, 크리스토프에게 고마워할 일도 생기네.
마리앤은 기세를 몰아 나머지 세 사람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뒤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의 잇새에서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리앤 하베크예요. 편하게 마리앤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녀가 두 남자에게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그들의 인사를 기다리듯 우아하게.
그 순간, 니콜라스는 그녀가 보기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머지 두 사람도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창백한 안색의 사내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팩 돌렸고, 서스펜더를 착용한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흠.”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던 니콜라스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좋아, 마리앤. 동료가 된 기념으로 서류 정리를 부탁하지. 저 보고서들을 사건별로, 그리고 시간별로 정리해 주길 바라네.”
말도 안 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인 서류 뭉치를 보던 마리앤은 비명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간신히 삼켰다.
그러곤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표정으로.
“……예, 니콜라스 경감님.”
거짓말 조금 보태어 서류가 그녀의 키만 했다. 창백한 낯의 사내가 히죽거렸고, 서스펜더를 착용한 사내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마리앤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씩씩하게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은 니콜라스의 뒤통수를 날릴 때가 아니었다. 기회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터였다.
***
마틴은 며칠째 반복되는 이 순간이 몹시 싫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게 노집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가 집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마틴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후에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그곳만 도로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창밖에선 온화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집무실 안은 황막한 북풍이 불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그러나 마틴은 그 속에 담긴 초조함과 성급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의 주인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어릴 적부터 그를 모셔온 마틴이라 해도 그 속내를 읽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어떻게 됐나.”
마틴이 책상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크리스토프가 성마른 물음을 던졌다. 그 또한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정녕 인내심 강한 크리스토프가 맞긴 한 걸까?
마틴은 슈나이더 부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가 꽤 대단한 존재였단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특히, 일 중독이라고 불리는 크리스토프가 더 이상 사건을 수임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아무리 마틴이라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면목 없습니다.”
마틴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 실소를 터뜨린 크리스토프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굳었다.
마틴은 며칠 새 수척해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택시 운전사 중에 백화점 앞에서 부인을 태운 자는 없었습니다. 마부에게까지 범위를 넓혀 조사해야겠으나, 다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승합마차는 택시 운전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으니까요.”
“마리앤이 사라졌는데, 누구도 그녀를 목격하지 못했다? 하늘로 솟았거나, 땅으로 꺼진 모양이군. 그녀가 마술사라도 되는 건가?”
크리스토프가 싸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한 마틴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시선을 떨구었다.
크리스토프는 무의식중에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관절이 툭 불거지고,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마리앤.”
크리스토프가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제껏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선이 책상 한편에 놓인 이혼 서류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눈동자가 면도칼처럼 날카롭게 번득였다.
마리앤의 탈주는 결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끝내 성공시켰다.
다시 말해, 평소와 같이 그를 마중하고 대화를 나누며 도망칠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크리스토프가 그녀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던 그 순간에도.
꽉.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얼핏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크리스토프는 요 며칠 잠시도 머릿속을 떠난 적 없는 물음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베로니카 클로제.
문득, 처제의 이름이 떠올랐다. 동생의 죽음은 절대 자살이 아니라며, 그를 설득하던 마리앤의 얼굴도 기억났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더라.
아마도 꽤 성가신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가 훑어본 사건보고서에 의하면, 그건 자살이 분명했으니까.
―자살이 명백해, 마리앤.
―아니에요, 크리스토프. 그 애는, 베로니카는…….
―당신은 수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건이었어.
이제야 그때 마리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생각났다. 슬픔이 어려 있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깊은 절망과 체념이 내려앉았다.
으득, 크리스토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턱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금어초 다발이었다.
오만.
“하.”
그제야 그녀가 남긴 메시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