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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얀 선배님 (10/23)


10. 얀 선배님
2023.06.10.


그래, 그는 오만했다. 몹시 오만하게도, 마리앤이 영원히 그의 곁을 지킬 거라 자만했다.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달콤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를 거라 자신했다.

그래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마리앤은 그를 사랑할 테니까.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크리스토프의 곁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는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째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어째서 슬픔에 빠진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크리스토프는 아둔한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이혼하자는 말에 그녀를 잡았다면. 그깟 판사장과의 만남보다 마리앤을 우선했더라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지금 내 곁에 마리앤이 있을까?

모든 건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마리앤은 그의 곁을 떠났고, 후회는 아무리 일찍 해도 늦는 법이었다. 남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마틴.”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무언가를 참듯 억누른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마틴이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올리버에게 연락해.”

마틴의 머릿속에 젊은 보좌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그 뒤에 나올 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베로니카의 사건보고서를 가져오라고 해,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뜻밖의 인물에 당황했지만, 노 집사는 질문 대신 순종했다.

“아, 그리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크리스토프가 마침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틴은 그 자리에 멈춰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람을 풀어서 마리앤의 보석이 시장에 풀리는지 감시하라고 전해. 현금을 가져가지 않았으니 보석을 팔 수밖에 없을 테지. 늦든, 이르든.”

“예, 알겠습니다.”

마틴은 크리스토프의 용의주도함에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마리앤이 한시라도 빨리 그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나운 폭풍이 저택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어디에 계십니까, 슈나이더 부인.

***

마리앤은 객관적으로 똑똑한 편에 속했다. 하긴, 법대를 졸업했을 정도니 누구도 그녀에게 멍청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일을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토프만큼은 아니라도 그녀 역시 유능했고, 처음 하는 일도 금방 요령을 파악했다.

그러니 두서없이 섞인 서류 더미를 보고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사건의 보고서와 증거목록이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처음부터 서류를 나눠서 보관하면 안 되나?”

두 팔을 걷어붙인 마리앤은 일단 서류를 사건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모두 여덟 건이었다. 강도와 폭행, 사기 등 범죄 종류도 다양했다. 그 후, 날짜별로 서류를 다시 정리했다.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마리앤은 작성된 서류를 눈으로 훑으며, 수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대략적인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증거를 수집하는 방법과 목격자 증언도 꼼꼼히 읽었다. 보고서는 어떤 형식으로 쓰이는지도 눈여겨보았다.

“응?”

그때, 서류 속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휘리릭 떨어졌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든 마리앤이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툭 붉어진 그는 꽤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왼쪽 눈썹 아래의 사마귀가 유난히 인상 깊었다. 만두처럼 접힌 귀도 특이했다.

“보석상 강도 사건의 용의자라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 잡히지 않았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목소리에 마리앤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턱을 문지르던 니콜라스가 책상 위를 훑었다.

“벌써 거기까지 정리했나? 빠르군.”

그의 목소리는 흡족하지도, 그렇다고 못마땅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신중하게 눈길을 돌린 그가 마리앤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자네가 여자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해줄 생각은 없네.”

“저도 그러길 바라지 않습니다, 경감님.”

“설령 자네가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해도 말이지.”

“…….”

일순, 마리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마리앤은 그에게 결혼했단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건 경찰청장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를 어디서 봤던 걸까?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니콜라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경관이 아니라도 되었을 텐데. 자네에겐 카페나 꽃집이 더 어울리지 않겠나?”

마리앤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가락에 꽂혀 있는 걸 보고서야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약지에 하얀 자국이 나 있었다.

결혼반지가 있던 자리다.

그녀는 무심코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반지는 목걸이에 꿰어 드레스 안쪽에 숨겨 두었다.

결혼반지를 버리지 못한 건 그것이 값비싼 보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작스럽게 남아 있는 미련 탓이었다.

마리앤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청람색 눈동자를 들어 니콜라스를 마주 보았다.

“민폐를 끼친다면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찾는 것뿐 아니라, 베로니카를 죽인 범인을 밝혀내는 것.

그 후의 일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손으로 정의의 철퇴를 휘두를 것인지.

마리앤의 대꾸에 니콜라스가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그 일을 끝낸 후, 저 책상 위에 있는 서류 정리도 부탁하지. 기회를 날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길 바라네.”

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리던 마리앤이 또 하나의 서류 더미에 “윽.” 하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텃세인가, 고민하는 사이 니콜라스는 어느새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상처받지 마세요, 원래 무뚝뚝한 분이시거든요.”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마리앤은 울적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서스펜더를 한 젊은 사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가 어려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가 마리앤을 향해 한 손을 내밀며 뾰족한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얀 베버라고 해요. 마리앤 하베크…… 양?”

“그냥 마리앤이라고 불러주세요.”

“좋아, 마리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흠흠. 나는 당신의 선배예요.”

거드름을 피우는 눈동자가 무언가를 기대하듯 초롱초롱했다. 아하, 그의 속내를 짐작한 마리앤이 빙긋 웃으며 얀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요, 얀 선배님.”

“얀 선배님…….”

마치 그 말을 음미하듯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던 얀이 대뜸 옆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아마도 그녀가 오기 전까지 팀의 막내였을 그는 ‘선배’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을 만끽하려는 양 잘난 체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금세 거드름을 피웠다.

“마리앤. 선배로서 몇 가지 조언을 할 테니 새겨듣도록 해.”

“예, 얀 선배님.”

그녀는 슬며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녀보다 어릴 것 같기도 했지만, 뭐 어떤가. 말 한마디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편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우선 니콜라스 경감님은 우리 팀의 리더야. 블라우버그 경찰청에서 가장 유능한 형사이기도 하고.”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짧은 순간 그녀의 결혼반지 흔적까지 찾아낸, 눈썰미 좋은 남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막심 프랑케 경위님은…… 아, 좀 전에 책상을 내리치고 나가신 분 말이야. 그분에게는 찍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아. 뒤끝이 긴 분이거든.”

얀이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상체를 바싹 붙이며 귓속말을 했다. 마리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찍혔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음…….”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난감하게 침음을 흘리던 얀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애도의 눈길을 보냈다.

“포기하면 편해.”

“……예.”

얀이 더 이상 막심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플로리안 경사님이셔, 플로리안 쾨니히.”

그 말에 마리앤은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의 사내를 떠올렸다. 화사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눈 밑의 짙은 그늘은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네 명이 한 팀이야.”

“이제는 다섯 명이죠.”

“맞아. 마리앤까지 다섯 명이지.”

그녀의 대꾸에 잠깐 눈을 크게 뜨던 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때.

“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노닥거릴 시간이 있으면 순찰이라도 한 바퀴 더 돌지 그래? 보석상 강도는 아예 포기한 거냐!”

멀리서 막심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움찔, 어깨를 떤 얀이 “예, 지금 가겠습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마주친 마리앤이 이번에는 그에게 애도의 시선을 던졌다.

“엉덩이를 걷어차야 나가겠냐! 이 애송아!”

“아니요! 지금 나갑니다!”

“고마워요, 얀 선배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얀 선배…….”

또다시 그 단어를 음미하듯 몽롱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던 얀이 막심의 사나운 표정을 보곤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막심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녀오세요, 막심 경위님.”

마리앤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곤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쾅, 분을 못 이긴 막심이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양산은 마리앤이 아니라 막심에게 필요한 것 같았다. 물론, 그랬다간 가장 먼저 마리앤의 뒤통수가 날아가겠지만 말이다.

***

똑똑.

“들어 와.”

버석버석,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목소리에 마틴은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곤 집무실 문을 열었다. 며칠 사이, 크리스토프의 턱선이 한층 날렵해졌다.

최근 그의 식사량은 평소의 반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집무실의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건을 맡지 않았으니, 일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슈나이더 부인의 부재.

“진척은?”

백화점 휴게실에서 마리앤의 외출복이 발견되었다. 그와 동시에 하녀 하나가 그녀의 옷장에서 상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이제 그들이 쫓는 건 마리앤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미망인이었다.

“부인께서 사라지신 날, 백화점 앞에서 미망인을 태웠다는 마부를 찾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망인을 기차역 앞에 내려줬다고 합니다.”

“기차역?”

크리스토프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마리앤이 수도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를 샅샅이 뒤지다 보면, 결국엔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역이라니. 수도를 떠났다는 건가.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제국을 뒤지는 건 수도를 뒤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마리앤을 찾는 건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영 마리앤을 찾지 못한다?

“마틴.”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잇새에서 공허한 목소리가 흩어졌다. 마틴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제왕과 같이 늠름했던 그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잃은 도박꾼과 같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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