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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레나 루벨의 성격 (11/208)

11화. 레나 루벨의 성격2020.06.08.

턱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샴페인을 뒤집어쓴 얼굴이 차가웠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쏟아진 샴페인은 목과 가슴까지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순식간에 술을 뒤집어쓴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16562798022667.jpg‘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레나는 기막혀하며 좌우를 살폈다. 귀족들 일부는 통쾌하다는 듯 웃고, 일부는 놀란 표정이었다. 당황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망나니 놈의 만행에 화를 내는 자는 없었다. 레나는 그들의 반응을 읽고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었다.

16562798022667.jpg‘역시, 그랬구나.’

이로써 분명해졌다. 이 녀석은 예법을 지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굽실댈 정도로 대단한 귀족이다. 심지어 클라비스 추기경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정도인,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가문의 도련님. 이 나이대의 이런 권력자라면 하나뿐이다.

16562798022667.jpg‘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

북부공 이우라 플레누스의 동생.

16562798022667.jpg‘그래, 북부 소속이어서 날 불러낸 거였어.’

레나는 비로소 루비드의 정체와 의도를 깨달았다. 누가 초대장을 보냈나 했더니, 북부의 도련님이 제 권속을 건드린 계집애가 괘씸해서 나선 모양이었다. 상황을 대략 파악한 레나는 루비드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16562798022667.jpg“혹시 저희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일인가요?”

1656279802269.jpg“너희 아빠가 누군데?”

루비드가 차갑게 되물었다. 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레나는 확신했다. 그는 레나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품고 있었다. 잠시 이를 드러낸 루비드는 다시 웃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흠뻑 젖은 레나의 뺨을 톡톡 닦아주었다.

1656279802269.jpg“괜찮으면 한 잔 더 할래?”

레나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입술이 굳었다. 레나의 뺨을 닦던 루비드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의 손수건은 레나의 목덜미를 지나 쇄골까지 내려갔다. 과도한 접촉에 레나가 주춤했지만, 루비드는 오히려 다정한 연인처럼 웃었다. 그러곤 드레스 라인 위로 드러난 레나의 앞가슴 사이로 젖은 손수건을 밀어 넣었다. 드레스 안으로 손수건이 들어가자 평소 방탕하게 놀던 사내들이 저속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들이 돈으로 부른 여인들에게 자주 하는 짓이었다. 더러운 취급에 레나는 샴페인을 뒤집어썼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드레스 안으로 들어온 손수건을 당장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사방에서 눈을 빛내는 귀족들은 레나가 꼴사납게 허둥대기를 바라고 있었다.

16562798022667.jpg‘어떡하지?’

레나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방법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정말 어떡하지? 루비드의 면상에 똑같이 샴페인을 퍼부을까? 따귀를 날리고 머리채를 잡아 돌릴까? 유니의 조언대로 칼부림을 벌일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그랬다간 하수가 된다. 이 루비드라는 고삐 풀린 놈처럼. 레나는 치미는 마음을 꾹 눌러 다스렸다. 그러곤 눈앞에서 빈정대는 루비드를 향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1656279802269.jpg“웃어?”

레나가 태연히 웃자 루비드는 눈썹을 구겼다. 레나는 못 들은 척 자신의 머리를 꾸민 꽃을 빼냈다. 그러곤 앞가슴에 걸린 손수건도 자연스럽게 꺼내 꽃을 감쌌다. 꽃과 손수건으로 코사지를 만든 레나는 그 꽃잎에 입을 맞추고서, 그걸로 루비드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레나가 무례에 꽃으로 보답하자 지켜보던 귀족들이 술렁댔다. 루비드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레나는 의아해하는 루비드를 보며 더 곱게 웃었다. 그러곤 정중히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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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며, 직전에 만난 개새끼에 대해 곱씹었다.

16562798022667.jpg‘루비드 플레누스. 맞겠지.’

고귀한 신분. 눈부신 금발. 아름다운 얼굴. 개차반 성질머리. 이 네 가지가 소문으로 들은 북부의 왕자, 루비드 플레누스의 특징이었다. 레나는 눈앞에서 어른대는 루비드의 안면을 지우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낭패다. 실패다. 순조롭게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판이 뒤집혔다. 루비드 플레누스라는 도련놈 때문에.

16562798022667.jpg‘그래도 최악은 면했어.’

샴페인 세례를 받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상대가 저질스럽게 나왔다고 똑같이 격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16562798022667.jpg‘아니.’

아니, 아니다. 오늘은 득보다 실이 더 컸다. 이 상황에서 레나를 높이 평가할 사람은 없다. 레나가 귀족들을 압도했던 장면은 지워질 것이다. 대신 루비드에게 당한 수모만 기억되고 오르내릴 것이다. 이런 취급을 받자고 공들여 나선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비드의 웃는 낯이 다시 떠올랐고, 동시에 또각대던 구두 굽 소리도 뚝하고 멈추었다. 레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침착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중히 판단하자. 레나는 수많은 역경을 헤치며 냉정해지는 법을 익혔다. 벽에 부딪히면 호흡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맨몸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레나 루벨의 생존방식.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늘 이성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16562798022667.jpg“훗…….”

레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온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수많은 역경을 헤치며 냉정해지는 법을 익혔지만, 그렇다고 레나가 늘 냉정했던 건 아니었다. 정말 냉정하고 실리에만 밝았다면 린에게 제단을 양보하지 않았을 거다. 집사가 건넨 독을 삼키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선전포고하듯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나는 겉으로만 교양 있고 얌전한 척할 뿐, 사실 속내는 별로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본성을 깨우는 상대의 등장에, 레나는 여상히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16562798022667.jpg‘역시 이렇게 물러나면 안 되겠지.’

유니와도 약속했다. 이기고 오겠다고. 레나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좋아, 루비드 플레누스. 자근자근 밟아주마. 이 호로 잡놈. ***

16562798051052.jpg“가엾은 레나 양…….”

1656279802269.jpg“언제 봤다고 레나 양이야, 역겹게.”

소파에 앉은 루비드는 바로 옆에서 난 목소리에 짜증을 냈다. 클라비스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훌쩍대는 척을 하고 있었다.

16562798051052.jpg“얼마나 창피했을까, 모처럼 예쁘게 꾸미고 왔는데.”

1656279802269.jpg“추녀가 꾸며본들.”

16562798051052.jpg“추녀라니, 그만하면 미인이지.”

미인이라는 말에 루비드가 혀를 내밀며 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클라비스가 우는 시늉을 멈추고 중얼댔다.

16562798051052.jpg“루벨을 꽤 닮았던데.”

1656279802269.jpg“개소리.”

지겨워하던 루비드의 표정이 돌연 험해졌다. 안 그래도 사나운 자색 눈동자가 더 살벌해졌지만, 클라비스는 키득대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16562798051052.jpg‘루벨도 참 대단해.’

북부의 왕 이우라와 그의 동생인 루비드. 서릿발 같은 북부 형제의 신망을 한 몸에 받다니. 정말 대단한 재주다. 물론 이우라는 북부공으로서 유능한 인재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루비드 이 새끼는 저밖에 모르는 망나니인데, 대체 무슨 수로 홀린 걸까? 클라비스는 루벨 후작의 수완에 대해 생각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16562798051052.jpg‘레나 양은 어떠려나?’

사자는 사자를 낳는 법. 클라비스는 가까운 곳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꽃이 담긴 샴페인 잔이 있었다. 아까 레나가 루비드에게 주고 간 꽃이었다. 모욕을 당하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설마 꽃을 건네다니. 흰색과 꽃은 황제의 상징. 그래서 귀족들은 건국일을 기념하며 춤을 추기 전에 꽃을 주고받았다. 건국기념일을 앞두고 생긴 일종의 유행이었다. 설마 그걸 염두에 둔 행동일까? 클라비스가 잔 속의 꽃을 바라보며 곱씹을 때였다. 음악이 잔잔하던 무도회장이 돌연 술렁였다. 클라비스는 무슨 일인가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환희로 물든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16562798051052.jpg“루비드 군.”

클라비스가 입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루비드를 불렀다. 하지만 루비드는 장내가 고요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신경질부터 냈다. 클라비스가 그 멍청한 애새끼에게 속삭였다.

16562798051052.jpg“저길 봐.”

루비드는 귀찮아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뜻밖의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오만한 귀족들이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덕분에 회장의 입구부터 루비드가 앉은 소파까지 길이 생겼다. 그 끝에 한 사람이 있었다. 감청색 제복을 몸에 꼭 맞게 입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제복의 색깔로 보아 남부의 고위 귀족 같은데, 남부에 저런 녀석이 있었나? 루비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불상의 인물이 경쾌한 속도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앉아 있는 루비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16562798022667.jpg“한 곡 추실까요?”

남자 아니었어? 옷차림 때문에 그를 남자로 본 루비드는 생각보다 높은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의아해하며 눈을 들자 곱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을 지워서 인상이 조금 달라졌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도 짧은 게 아니라 뒤로 묶어 안 보인 거였다. 루비드가 비로소 자신을 알아보자, 레나는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16562798022667.jpg“이제 와 싫다곤 안 하시겠죠.”

1656279802269.jpg“너…….”

루비드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레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루비드는 레나의 손을 잡고 일어날 마음이 없었다. 레나도 그가 협조적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볍게 깍지를 끼고 그의 손목을 돌렸다. 뒤틀린 신경이 화들짝 놀라, 알아서 몸을 일으키도록.

1656279802269.jpg“윽……!”

손목이 꺾인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루비드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저도 모르게 안긴 루비드가 벌컥 화를 냈다.

1656279802269.jpg“이 미친……!”

그러나 욕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레나는 루비드의 손목을 다시 비틀었다. 관절은 단련할 수 없는 부위다. 그럼에도 눈이나 낭심처럼 절찬리에 공격받지 않는 건, 근육으로 촘촘하게 보호받고 있어 효과적인 타격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휘하는 부위가 관절이었다. 레나 루벨은 그 사실을 잘 아는 숙녀였고, 실기에도 능했다. 바로 이렇게.

1656279802269.jpg“큭!”

단숨에 어깨까지 꺾인 루비드가 휘청대며 게걸음을 쳤고, 레나는 부드러운 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들의 동작은 꽤 자연스러웠다. 귀족들은 레나가 루비드의 손모가지를 휘어잡는 걸 미처 못 봤고, 때문에 루비드가 도발에 응해서 일어난 거라 생각했다. 이어 무도회장 중앙까지 사이드 스텝으로 사이좋게 이동했으니, 그들은 영락없는 한 쌍으로 보였다. 무도회장 가운데서 레나가 루비드의 손목을 살짝 놓아주며 속삭였다.

16562798022667.jpg“춤이나 출까요?”

1656279802269.jpg“개소리…….”

16562798022667.jpg“물론 싫다고 해도 출 거예요.”

루비드가 이를 갈자, 레나는 맑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루비드는 또 당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각오가 무색하게 그는 또 한 번 쭉 끌려가고 말았다.

1656279802269.jpg‘무슨 힘이……!’

루비드는 크게 당황했다. 그 사이 레나가 루비드의 허리를 당겨 안았고, 루비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

1656279802269.jpg“놔.”

16562798022667.jpg“싫은데.”

레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루비드가 막 소리치려 할 때였다.

16562798022667.jpg“괜찮겠어요? 여기서 소리쳐도.”

1656279802269.jpg“뭐라는…….”

16562798022667.jpg“그거 너무 꼴사나울 텐데.”

비웃음 섞인 물음에 루비드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그는 흥분을 삼키고 뒤늦게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멍청한 인간들은 아직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면 자신이 레나에게 끌려 나온 걸 들키고 만다. 그건 곤란했다. 지배자의 혈통은 무례하고 흉포해도 되지만, 나약하고 조롱거리가 되어선 안 됐다.

1656279802269.jpg‘이런 미친!’

결국 루비드는 속으로 분을 삼켰다. 그러곤 레나의 스텝을 어정쩡하게 따라 하며 타개책을 찾았다. 하지만 평생을 멋대로 살아온 도련님에게 위기상황에서 발휘할 기지나 재치 따위는 없었다.

1656279802269.jpg‘그래봤자 여자…….’

루비드는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레나를 힘으로 떨쳐내려 마음먹었다.

1656279802269.jpg‘네발로 기게 해주마.’

루비드는 악에 받쳐 기회를 노렸다. 음악에 따라 도느라 몸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루비드는 서로의 거리가 벌어지는 때를 노려, 자신의 손목을 붙든 레나의 손을 힘껏 쳐냈다. 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루비드의 팔을 넓게 돌렸다. 덕분에 북부의 왕자님은 파트너에게서 벗어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게 되었다. 마침 음악 소리도 경쾌했기에 제법 적절한 턴이었다. 루비드는 자신이 여전히 붙잡혀 있는 것에 당황했고, 레나는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 그를 반갑게 붙잡았다.

1656279802269.jpg“망할, 이거 놔……!”

루비드가 낮게 윽박지르자, 레나는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소녀처럼 맑게 웃었다. 그러곤 진저리치는 왕자님에게 속삭였다.

16562798022667.jpg“제가 처음이라 분위기 파악을 못 했죠?”

레나의 목소리는 여상히 부드러웠다.

16562798022667.jpg“거친 게 좋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면 처음부터 어울려 드렸을 텐데.”

하지만 그 안에 돋친 가시는, 겁 없는 호로 잡놈도 충분히 눈치챌 만큼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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