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재회2020.06.11.
약 반 시간 전, 유니는 방에서 궁의 하급관리들이 나눠준 과자를 먹고 있었다. 황실의 주전부리를 탐하는 호사를 누리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니는 당연히 레나가 온 줄 알고 문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오오-아가씨!”
그러곤 과자를 내던지고 다급히 달려갔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이에요? 윽, 술 냄새!”
유니는 레나의 몰골에 경악했다. 푹 젖은 머리와 다 번진 화장, 얼룩진 드레스, 온몸에서 진동하는 술 냄새까지. 유니는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그 앞에서 레나가 차분히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준비 좀 도와줘요.”
“준비요?”
“다시 나갈 준비요.”
뜻밖의 주문에 유니의 눈이 더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레나는 여상히 침착했다. 그래서 더 심상치 않았다. 저건 레나가 조금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시게요?”
유니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머리와 화장은 급하게 고칠 수 있어도 드레스는 갈아입는데 몇 시간은 족히 걸린다. 흠만 대충 가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궁색해 보일 것이다. 유니가 곤혹스러워하자, 레나는 간단히 해답을 제시했다.
“드레스를 갈아입을 시간은 없으니까 제복을 꺼내 주세요.”
제복이라는 말에 유니의 눈이 반짝 뜨였다. 제복도 무도회에 어울리는 복식이긴 하다. 게다가 드레스보다는 금방 갈아입을 수 있다. 화장도 굳이 다시 할 필요 없고, 머리를 부풀리지 않아도 된다. 뜻을 헤아린 유니는 서둘러 옷장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남부의 제복을 꺼내온 유니가 레나의 드레스를 벗기며 물었다.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초대장을 보낸 신사가 생각보다 개구쟁이였어요.”
“남자였어요?”
“네, 아주 잘생긴.”
레나는 가볍게 설명하며 찬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유니도 본격적으로 준비를 거들었다. 흐트러진 머리는 잘 빗어서 하나로 묶고, 화장은 깨끗이 지우고 최소한만 덧발랐다. 그 후 대망의 제복을 펼쳤다. 제복의 상의는 목까지 깃이 올라온 흰 셔츠와 허리에 덧대는 코르셋 형식의 감청색 코트가 한 벌이었다. 코트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기장이었는데, 몸을 꽉 감싸기 때문에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허벅지 옆이 길게 트여 있었다. 어깨엔 코트와 같은 색의 비대칭 망토가 달려 있었다. 하의는 다리에 꼭 붙는 흰색 바지였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부츠 탓에 허벅지만 깨끗하게 강조되는 것도 이 제복의 특징이었다. 네 공작은 각기 다른 형태의 제복을 입었다. 그리고 남부의 제복은 그중에서 가장 관능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거 지금 입고 나가도 괜찮을까요?”
유니가 옷 갈아입기를 거들며 작게 고시랑댔다. 이 훌륭한 제복은 레나가 구매한 것이 아니라 남부공이 하사한 것이다. 그런 옷을 마음대로 입고 나가도 될까? 유니가 소심하게 걱정하자, 레나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입을 옷인데요, 뭐.”
“그건 그렇지만, 계획에 없던 일이잖아요.”
“사람 일이 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죠.”
“아가씨…….”
“게다가 남부공도 제가 이대로 굴욕당하는 게 더 싫을 거예요.”
레나가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레나도 드레스와 제복을 한날에 입을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시의적절하게 나눠 입어 존재감을 키우는 데 활용할 계획이었는데, 루비드라는 애새끼가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애써 품위를 지켜 물러났지만, 이미 웃음거리가 됐는데 다음 날 제복을 입고 나타난들 존경받을 수 있을까? 서서히 진가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레나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했어요. 들개랑 싸우는 데 드레스를 입고 가다니.”
환복을 마친 레나가 마지막으로 망토를 둘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다 보여 주는 수밖에요.”
레나는 그렇게 되뇌며, 망자의 멱을 따듯 망나니의 멱을 따버릴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레나는 그 다짐을 착실히 이행했다.
***
“크윽!”
버티던 루비드가 또 한 번 레나에게 끌려갔다. 크게 발을 헛디딘 그는 곧장 바닥을 딛고 아닌 척 스텝을 밟았다. 피나는 노력 덕에 루비드의 몸부림은 여전히 춤으로 보이고는 있었다. 다만 귀족들의 눈빛엔 점점 의아함이 차올랐다.
‘제길!’
루비드는 욕을 삼키며 부득 이를 갈았다. 연주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곡이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곡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음악이 멈춘 후에도 병신처럼 빙빙 돌아야 하나? 루비드가 초조하게 생각할 때였다. 루비드를 멋대로 쥐고 흔들던 레나가, 돌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화해하는 게 어때요?”
“뭐?”
“이렇게 싸워선 둘 다 손해잖아요. 그러니 한 발씩 양보해요.”
이 몸싸움 같은 춤을 끝내고 다시 신사와 숙녀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루비드가 이제라도 레나를 존중한다면 앞선 모욕도 어느 정도 수습된다. 물론 이 희한한 관계 개선에 다들 의문을 품겠지만, 그건 기행과 변덕을 부린 루비드가 책임질 일이지 레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레나는 이쯤에서 요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을 용서하기로 했다.
“너, 이…….”
그러나 정작 루비드는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레나의 너그러운 제안에 루비드는 도리어 눈을 치떴다. 하지만 앞서 한 것처럼 대놓고 욕하진 않았다. 질질 끌려다니며 자신의 처지를 어느 정도 자각한 탓이었다. 이 괴물 같은 여자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루비드가 허약해서는 아니었다. 겉보기엔 늘씬한 미인이지만, 그에게도 상당한 수준의 완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레나를 당해낼 순 없었다. 그게 분해서 이를 악무는데, 레나가 재차 물었다.
“싫으세요?”
묻기만 한 게 아니라 루비드의 양손을 잡고 넓게 돌았다.
‘윽!?’
무심코 따라 돌던 루비드는 발꿈치가 덜컥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위화감에 뒤를 보니, 그의 발이 샴페인 호수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어느새 루비드를 호수까지 밀어붙인 레나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응?”
그 짧은 물음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젠장, 뭐 이딴……!’
샴페인을 뿌린 자 샴페인에 빠지리. 레나는 음악과 춤이 끝나면 루비드를 저 호수에 밀어 넣을 작정이었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호수 근처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화해를 강요받은 루비드는 이만 박박 갈았다. 만인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느니 한 명에게만 몰래 굽히는 게 더 합리적이지만,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비드는 레나를 내리 쏘아보다가 낮게 으르렁댔다.
“어디 한번 해 봐.”
“정 그러시다면.”
레나는 예쁘게 웃으며, 끝내 반성하지 않는 루비드와 함께 음악의 절정을 밟았다. 스텝은 점점 빨라졌고 둥글게 도는 몸은 원심력을 얻어 언제 튕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레나는 돌고 또 돌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는 순간, 루비드의 손을 놓았다.
‘큭……!’
내동댕이쳐지는 느낌과 함께 루비드는 호수 쪽으로 미끄러졌다. 자세를 잡기엔 너무 늦어, 그는 입수를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떨어지던 몸이 돌연 우뚝 멈췄다. 이어 허리 부근을 받친 손길이 느껴졌다. 추락을 멈춘 루비드는 놀라서 앞을 보았다. 레나가 루비드의 허리를 받친 채 웃고 있었다. 정말 빠트릴 줄 알았냐는 듯이. 레나는 루비드를 즐겁게 바라보다가, 뒤로 기운 그의 몸을 당겨 바로 서게 도와주었다. 그러곤 한 걸음 물러나며 정중히 인사했다.
“멋진 춤 감사합니다. 즐거웠어요.”
레나는 군인의 방식으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인사했고, 비로소 풀려난 루비드는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목엔 새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비드는 자신의 손목과 레나의 숙여진 머리를 번갈아 보더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참이나 웃더니, 온 힘을 다해 레나의 따귀를 날렸다. 짜악! 매서운 마찰음이 울렸다. 하지만 루비드가 내리친 것은 레나의 뺨이 아니었다. 그의 손과 맞부딪힌 건, 레나가 얼굴 옆으로 들어 올린 손바닥이었다. 따귀마저 보기 좋게 막힌 루비드는 레나를 씹어 먹을 듯이 쏘아봤다. 뜻밖의 폭력에 귀족들은 헛숨을 삼켰고, 레나는 한숨을 뱉었다.
“끝까지 반성을 모르시네요.”
레나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며 루비드에게 손을 뻗었다. 루비드는 험악한 얼굴로 그 손을 쳐냈다. 하지만 손은 속임수고, 진짜는 발이었다. 루비드가 손을 쳐낼 때 레나는 바닥을 쓸 듯이 발을 움직여 루비드의 발목을 걷어찼다. 루비드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었다. 그의 몸이 나동그라지며 추락했고, 직후 모두가 고대하던 샴페인이 터졌다. 코르크 마개 대신 왕자님의 고귀한 옥체를 매개 삼아, 첨벙 소리와 함께. . . .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물보라가 솟구쳤다. 높게 일어난 파도가 다시 수면을 치자 하얀 포말이 바그르르 끓어올랐다. 그 광경이 힘껏 쳐올린 술잔을 연상시켰다. 상상도 못 한 축배에 귀족들은 얼이 빠져 턱을 툭 떨어트렸다. 레나는 루비드의 긴 백금발이 샴페인 호수 아래로 꼬르륵 잠기는 것을 지켜보다가 빙글 돌아섰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에게도 단정히 인사했다.
“푸하핫.”
경쾌한 웃음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귀족들은 고개를 돌렸다가 더 당황했다. 레나에게 갈채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비스였다. 그는 멋진 공연을 본 관객처럼 기뻐했다. 덕분에 귀족들은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추기경이 바보처럼 혼자 손뼉 치게 놔둘 수도 없고, 그를 따라 북부의 왕자를 비웃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바람도 낙뢰도 아닌 것이, 호수 밑에서부터 예리하게 솟구쳤다. 쨍하는 굉음이 얼핏 들렸다. 이어 호수를 떠다니던 꽃송이들이 허공으로 튕겨 오르더니, 아무 조짐도 없이 바닥이 갈라졌다. 대리석 바닥은 잘린 케이크마냥 사방으로 쪼개졌고, 그 틈으로 호수를 채운 샴페인이 콸콸 쏟아졌다.
“으악!”
“꺅!”
귀족들이 기현상에 기겁하자, 클라비스는 즐겁게 중얼댔다.
“우리 왕자님 진짜 화났나 보네.”
레나도 등 뒤를 보며 읊조렸다.
“그래도 저렇게 떼쓰면 쓰나요.”
그러곤 호수였던 웅덩이에 대고 눈을 곱게 흘겼다. 레나의 도발에, 안 그래도 흉흉한 루비드의 눈빛이 더 살벌하게 곤두섰다. 그의 두 눈은 창백한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00년 전, 왕국 그라샤는 멸망했다. 그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느 날 무저갱의 문이 열렸고, 지상으로 나온 망자들이 산자를 공격하며 죽음을 퍼트렸다. 왕국도 교회도 죽음의 위세를 막지 못했다. 왕국은 타는 낙엽처럼 스러져 갔고, 가련한 왕국민들은 절망에 질식해 죽어갔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무너진 왕조의 마지막 혈통, 니힐 그라샤가 죽은 자를 다시 죽이며 반격의 효시를 쏘아 올린 것이다. 치열한 싸움 끝에 왕국을 집어삼킨 망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니힐은 왕국의 무너진 터에 제국 그란디스 그라샤를 세웠다. 그 젊은 황제가 승리를 위해 휘두른 것은 검도 활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 신이 왕가에 내린 자비이자, 모든 사악함을 가르는 권능. 선택받은 황제는 신성한 힘으로 세상을 구하고, 자신의 핏줄에게 권능을 나눠주었다. 그 힘이야말로 제국의 근간이며, 그라샤 황족이 군림하는 이유이자 자격이었다.
“이제라도 빌어.”
그리고 북부의 왕자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는 그 힘을 물려받은, 선택된 존재였다.
“그럼 눈알 하나로 봐주마.”
루비드가 텅 빈 호수를 밟고 나오며 짓씹었다. 흠뻑 젖은 루비드가 으르렁대자, 보이지 않는 중압감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비 없는 참격과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힘. 모두 황족의 권능이었다. 그러나 정작 레나는 미동하지 않고, 웃음도 잃지 않았다.
“곤란해요. 두 개뿐이거든요.”
“그럼 둘 다 내놓던가.”
루비드가 레나의 바로 앞에 서서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광경에 한 숙녀가 클라비스에게 매달렸다.
“전하,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마, 말려야…….”
“큰일은 이미 났고, 저 녀석이 말린다고 듣는 녀석인가?”
하지만 클라비스는 천연덕스럽게 청을 무시했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레나와 루비드의 대치를 감상했다. 루비드의 얼굴은 성난 삵처럼 매서웠고, 그것을 서너 뼘 앞에 둔 레나의 눈빛은 여상히 담담했다. 당장 칼부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아니, 칼부림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황족의 분노가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 귀족들은 수많은 사례로 알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귀족들은 뒷걸음쳤고, 루비드의 입매도 점점 더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왕자 저하, 모시러 왔습니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긴장을 툭 끊어트리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내일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일찍 움직이셔야 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장내가 고요했기에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왔다.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고개를 돌렸다. 회장 입구로 한 신사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쳇.”
루비드는 그 남자를 보더니 혀를 찼다. 그러곤 김샜다는 듯 레나에게 흥미를 잃고 돌아섰다. 그의 돌변에 귀족들이 놀라서 탄식했다. 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레나였다. 레나가 그 신사를 향해 희미하게 속삭였다.
“아버지…….”
하지만 그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곁을 스쳐 지나간 루벨 후작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