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괴물이 되어 돌아온 거예요2020.06.15.
“아버지.”
루벨 후작은 레나의 희미한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루비드에게 다가섰다.
“그만 돌아가시죠.”
루비드는 언짢은 얼굴로 후작을 쳐다보다가 멀찍이 물러선 귀족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조아렸고, 루비드는 그 꼴을 훑다가 신경질을 내며 몸을 돌렸다. 후작이 함께 돌아서자 레나가 재차 불렀다.
“아버…….”
하지만 부름은 완성되지 않았다. 후작이 돌아보며 내민 거절의 손짓 때문이었다.
“레이디.”
후작은 말을 모르는 짐승에게 하듯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이 일은 추후 제대로 된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떻습니까?”
후작의 존중 어린 요구에 귀족들은 감명을 받았다. 멋대로 추문을 일으킨 숙녀에게도 저토록 정중한 태도라니. 역시, 과연, 그럼 그렇지. 귀족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후작 편으로 기울었다. 애당초 북부의 후작은 인격자로 유명했다. 귀족들은 그런 사람에게 저리 악독한 사생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후작은 레나를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벨 각하.”
아버지가 아닌 각하라는 호칭에 후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보았다. 제복 차림의 숙녀가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그 숙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상처? 의아해하던 후작은 곧 떠올렸다. 자신이 쪽지에 써서 보낸 문장을. ―아비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시오. 후작은 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후작의 대답에 레나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레나는 후작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들었다. 샴페인 호수를 떠다니다 내동댕이쳐진 가련한 꽃이었다. 레나는 그 꽃을 털어 말리며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꽃잎에 입을 맞춘 후, 그것을 후작의 가슴에 꽂아주었다. 아버지께 꽃을 드린 레나는 잠잠히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 루비드와 후작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루비드가 샴페인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 앉자 후작이 손수건을 건넸다.
“됐어.”
루비드는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그 신경질에 후작은 손을 거두고 조심히 운을 뗐다.
“저하, 오늘 일은…….”
“됐다니까!”
잔소리를 예상한 루비드가 버럭 성을 냈다. 하지만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히 말을 이어, 오히려 루비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
뜻밖의 인사에 루비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자 후작은 능청스럽게 설명했다.
“제 입장을 대변해 주신 거 압니다. 그 숙녀와 가십을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후작의 해몽에 루비드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매서운 북풍을 맞고 자란 루비드는 시답잖은 아부를 싫어했다. 그런 성미를 알기에, 후작은 가볍게 덧붙였다.
“절차와 방법은 극악했지만.”
“뭐?”
“그게 저하의 최선이라는 건 잘 압니다.”
“야.”
“사고는 늘 있던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이게 진짜……!”
“그럼에도 감사합니다. 편들어 주셔서.”
후작은 욕과 인사를 함께하며 정겹게 웃었다. 덕분에 루비드는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제 말에 혹시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다 틀려, 하나도 안 맞아. 착각하지 마!”
아부를 하는 건지 갈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에 결국 루비드는 짜증을 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비드는 차갑고 사나운 한편 소년처럼 어린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후작은 이 예민한 왕자를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이번에도 간단히 루비드의 화를 식혔고, 루비드는 놀아난 줄도 모르고 투덜댔다.
“그 여자 뭐야?”
그 여자, 레나 루벨. 북부의 작은 왕인 루비드는 갑자기 나타난 레나가 몹시도 거슬렸다. 그래서 직접 묻자 후작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전혀 몰라?”
루비드는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전혀 모른다고 하기엔 닮았다. 선한 인상, 코끝, 눈매, 그리고 웃을 때 얕게 도드라지는 보조개까지. 클라비스가 닮았다고 할 땐 정색했지만, 실은 루비드도 내심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레나 루벨과 루벨 후작은 서로 닮았다. 나란히 세워두면 누가 봐도 부녀로 보일 만큼. 루비드의 추궁에 후작이 재차 답했다.
“과거에 잃은 아이와 많이 닮기는 했습니다.”
루비드가 눈썹을 구겼다. 그렇다면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후작이 덧붙였다.
“하지만 정말 그 아이라면 절 곤경에 빠트리지 않겠죠.”
“하!”
루비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신경질이 잔뜩 섞인 비소였다.
“노망난 영감이 어디서 사기꾼을 데려왔나?”
“남부공께서도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 겁니다.”
루비드는 쉽게 속았다. 후작은 그를 보며 웃다가 쥐고 있던 손수건을 다시 들었다.
“전쟁으로 자식들을 다 잃으셨으니 그 속도 예전 같지 않겠죠. 위로가 필요한 사내가 작정한 여자를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미친 것들…….”
“다들 알면서 쉬쉬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 너무 심려치 마세요. 어차피 금방 탄로 날 일입니다.”
후작이 루비드의 머리카락 끝을 닦아주며 말했고, 루비드는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사이 후작은 반쯤 마른 루비드의 머리칼을 다시 묶어주었다. 그러곤 의심할 줄 모르는 왕자에게 얄팍한 경의를 표했다. *** 루비드를 들여보내고, 후작도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을 감고 피로를 견디는 것이었다. 루비드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저질렀다. 이 일로 레나 루벨은 사교계에 눈도장을 찍었고, 사태를 조용히 수습하는 건 더 힘들어졌다. 후작은 숨을 깊게 마시며 무거운 코트를 벗었다. 그러다 손끝에 닿는 감촉에 멈추었다. 왼쪽 가슴에 레나가 건넨 꽃이 아직 남아 있었다. 후작은 그 꽃을 보며 레나를 떠올렸다.
‘집사의 말대로군.’
어제, 후작을 대신해서 레나를 보러 간 집사가 말했다. 아가씨가 정말 아름다운 숙녀로 자랐다고. 정말 그러했다. 아니, 멋진 숙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예전엔 아주 작은 아이였는데. 후작은 레나의 모습을 곱씹으며 꽃송이를 매만졌다. 동시에 떠올랐다. 수년 전, 이따금 어루만진 딸아이의 뺨이 꼭 이런 감촉이었던 것을. 흐린 달빛이 회상을 부추길 때였다. 아무 기별도 없이,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진 밤이네요.”
후작은 놀라서 돌아봤다가 긴 숨을 내뱉었다. 눈부신 은발의 청년이 문가에 기대 웃고 있었다. 추기경 클라비스였다. 그를 발견한 후작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숨 쉬듯 말했다.
“이렇게 오시면 사람들이 봅니다.”
“괜찮아요. 핑계는 대충 만들어 놨어요.”
환대받지 못했지만 클라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소파를 차지하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둘이 보는 거.”
대외적으로 클라비스 추기경과 루벨 후작에겐 친분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고, 밀실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클라비스가 후작에게 물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요?”
없을 리가. 후작이 손에 쥔 꽃을 짓이기며 중얼댔다.
“왜 살아 있는 겁니까?”
그리고 분명한 발음으로 덧붙였다.
“제물로 써서 시체도 못 건질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후작의 물음에 성화 속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 클라비스 시렌치움은 웃었다.
“잔인도 하시지.”
클라비스가 빙글대며 말했다.
“딸이 살아 돌아왔는데 기뻐하진 못할망정,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비밀이 새면 피차 위험합니다.”
“협박하는 건가요?”
“충언이지요.”
“말은 잘해.”
후작이 건성으로 조롱을 피하자, 클라비스도 곱게 눈을 흘기며 말을 돌렸다.
“루비드 군은 잘 들어갔나요?”
“방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참 귀엽죠, 우리 루비드 군.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 듣고, 속이기도 쉽고.”
클라비스의 말에 후작은 속으로 탄식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그가 알기로 루비드는 조잡하게 함정을 파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만한 인내심도 없을뿐더러, 권력과 싸가지는 넉넉하여 누군가에게 엿 먹여야 한다면 직접 찾아가 머리채를 잡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답지 않은 짓을 벌였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클라비스가 뒤에 있었다. 그리고 루비드를 이용해서 레나를 불러낸 클라비스는, 오늘의 무도회가 퍽 감명 깊었던 모양이다.
“당신 딸, 정말 멋지게 컸던데요?”
“그 아이가 남부공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더군요.”
“남부공이 추기경 전하의 행보를 알게 될까 걱정입니다.”
레나가 입을 열면 곤란해지니, 어서 수습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염려에도 클라비스의 태도는 여상히 가벼웠다.
“걱정할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루벨 씨. 아까 당신 딸이 날 봤어요.”
“봤다 하심은…….”
“날 알아봤어요. 그런데 웃더군요.”
클라비스가 황홀하게 속삭였다. 레나의 등장에 후작 못지않게 놀란 사람이 클라비스였다. 그래서 그는 루비드를 이용해 레나를 불러냈다. 과연 진짜인지, 진짜라면 어떤 모습일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윽고 레나가 나타났을 때 클라비스는 환희했다. 그는 진짜였다. 진짜일 뿐 아니라 홀로 기백 명의 귀족들과 기 싸움을 할 만큼 엄청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흥미가 한껏 동한 그는 레나가 과연 자신을 알아볼지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만약 알아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노려볼까? 도망칠까? 아니면 달려들거나, 어쩌면 비명을 지를 수도. 클라비스는 즐겁게 상상하며 레나의 시선을 기다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을 때, 클라비스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레나는 클라비스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웃었다. 아름답게, 그리고 아찔하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자길 지옥으로 밀어 넣은 사람한테, 대체 어떻게?”
보통은 치를 떨 텐데. 아니, 여기까지 다시 올라오지도 못할 텐데. 레나 루벨은 돌아왔고 웃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자에게, 그토록 여유만만하게. 클라비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우리가 제물로 삼았던 아이가 괴물이 되어 돌아온 거예요.”
하지만 들뜬 건 클라비스뿐이었다. 후작은 여상히 차분한 얼굴로, 다소 피로한 눈으로 이 미친놈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렇게 작정하고 찾아왔는데, 남부공의 입을 막는다고 능사겠어요?”
“그럼 어찌합니까?”
“직접 물어보세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아 보이던데, 이런 건 만나서 풀어야죠.”
레나를 직접 만나라는 말에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잘 생각해봐요, 루벨 씨. 당신 딸은 우리가 있는 황궁까지 제 발로 찾아왔어요. 이게 무슨 뜻 같아요?”
“우릴 대적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요. 그러니 정중하게 교섭해 봐요.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면 분명 대답해줄 거예요.”
클라비스가 재차 권하며 덧붙였다.
“이건 조언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알겠습니다.”
후작이 마지못해 답하자 클라비스는 흡족히 웃었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추기경의 저 여유로운 태도는 대체 뭘까. 허세? 아니면 만용? 레나의 존재가, 그리고 그들의 과거가 밝혀지면 제아무리 황족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과거에 묻은 것은 단지 한 소녀가 아니니까. 6년 전, 클라비스는 고귀한 제물을 원했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무덤의 문을 열고, 황제와 같은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추기경이 왜 그런 욕심을 부렸는지는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다만 중요한 건 그 행위가 가진 의미였다. 세간에서는 황제와 동등한 힘을 가지려 하는 행위를 반역이라 불렀다. 그러니 현시점에서 루벨 후작이 숨겨야 하는 것은 단지 딸을 판 사실이 아니다. 그의 진짜 비밀은 반역에 가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