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새침한 개2020.06.18.
무도회가 갑작스러운 소동으로 파장될 때, 린은 정원의 호숫가에 혼자 있었다.
‘무슨 일이지?’
진동을 느꼈다. 범상치 않은 충격과 울림, 그라샤의 권능이었다. 린은 진동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채고 불안한 눈으로 정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전쟁터도 아닌 황궁에서 권능을 쓰다니, 이우라나 클라비스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그 팔푼이 짓인가?’
북부공의 되다 만 동생 놈, 루비드 플레누스. 린은 확신에 가깝게 의심하며 고민했다. 돌아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하나? 하지만 선뜻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레나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린은 불안감을 참고 레나를 기다렸다. 반드시 온다는 확신도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이 가득 맺힐 무렵이었다.
“오늘도 계셨네요.”
부드러운 음성에 린은 고개를 들었다.
“좋은 밤이에요, 린 씨.”
구름 사이로 달이 나오듯, 레나가 수풀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잠옷이 아니라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제복의 겉옷만 급히 벗고 나온 거지만, 린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저 기다리신 거예요?”
레나가 말 없는 린에게 장난스럽게 묻자, 그는 마지못해 끄덕여 답했다.
“맞아.”
“맞아요?”
“기다렸어. ……레이디.”
“레이디?”
레이디라고 부르는 건 사람들 앞에서였다.
“혹시 여기 누가 또 있나요?”
그래서 레나는 일부러 어두운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갸웃대며 중얼댔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남부공의 손님이라는 얘길 들었어.”
“그래서 레이디라고 부르신 거예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의미심장한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낌새가 이상했다. 어쩐지 거리를 두는 느낌에 레나가 갸웃대자, 린은 묵묵히 고했다.
“앞으로 밤 산책은 안 나올 거야. 여기서 날 만난 건 없던 일로 해 줘.”
“오해하지 마세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니니까.”
“알아, 당신이 좋은 사람인 거.”
레나는 놀라서 변명했다가 돌아온 대답에 당황했다. 린은 미안한 듯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내 입장은 그것과 별개야.”
“뭐가 별개인데요?”
“내 입장은…….”
린은 망설이다가 힘없이 중얼댔다.
“당신한테 개자식처럼 굴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뜻밖의 거친 표현에 레나의 눈이 더 커졌다. 설명을 바라는 얼굴이었지만 린은 굳이 부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볼 터였다. 그가 어떤 개자식인지. 레나가 남부공의 곁에 있는 한, 가까운 시일 내에.
“난 다른 공작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 그들끼리도 썩 잘 지내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특히 더 그래.”
린은 온전한 그라샤가 아니다. 귀족도 아니고, 하다못해 제국민도 아니다. 그는 제국이 벌레처럼 여기는 식민지 출신 잡종이었다. 기막힌 운명으로 동부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에겐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그래서 좀처럼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개처럼 짖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시국에 당신을 이유 없이 불렀다고 생각하진 않아. 남부공은 전략가니까.”
린은 레나의 실력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린 적이야.”
그렇게 말하는 린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마치 상처받은 아이처럼. . . . 몇 달 전, 황제는 공작들에게 칙명을 내렸다. 건국기념일을 맞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려 하니 가장 용맹한 기사들을 선발해 데려오라고 말이다.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기에 공작들은, 막 전쟁을 끝낸 남부공까지도 명을 받들어 정벌을 준비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동·남·북이 사이좋게 힘을 합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라고 요구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자였다. 아직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린은 북부와 남부가 필요에 따라 자신을 이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들을 기꺼이 밟아 넘을 작정이었다. 때문에 레나가 남부공의 손님인 걸 알게 된 이상, 린은 레나를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린 씨는, 지금 이 얘기하려고 기다리신 거예요?”
린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레나가 자그맣게 물었다. 그에 린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북부 후작의 딸은 그렇다 쳐도, 남부공의 특별한 손님과 가깝게 지낼 수는 없었다. 서로를 함정에 빠트려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사이좋게 산책을 하다니, 안될 일이었다. 린이 선을 긋자 레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곤 뜻밖의 말을 중얼댔다.
“안 돼요, 린 씨. 그렇게 새침하게 굴면 괴롭히고 싶잖아요.”
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사이 레나는 팔짱을 끼며 중얼댔다.
“설마 황궁 남자들 특성인가요? 북부 왕자도 꽤 새침하던데. 혹시 두 분 친구?”
“절대 아냐.”
“그런데 왜?”
“왜라니…….”
린은 강하게 부정했고, 레나도 빠르게 되받아쳤다. 덕분에 린의 눈망울은 가련해졌다. 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짙게 웃었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피로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티 내지 않을 뿐 지금 레나는 몹시 피곤했다. 무도회에 간다고 종일 꾸미고, 무도회에 가서는 루비드 놈을 조지느라 기운을 다 뺐다. 덕분에 거의 녹초였지만, 그럼에도 서둘러 나왔다. 린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소릴 하다니.
“린 씨 말이 맞아요. 저는 남부공의 대리인 자격으로 여기 왔어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린 씨와 적이 될 이유는 아니에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왜요?”
레나가 너무 당연한 것을 묻자 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레나는 되물었다.
“그럼 처음 만났을 때 왜 도와주셨어요? 북부 후작의 딸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그거하곤 경우가 달라.”
“다르지 않아요.”
레나가 단호히 부정했다.
“똑같아요. 입장만 따지면 무시하는 편이 나았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하지만 린 씨는 절 도와줬죠.”
레나는 끈질겼다. 어딘지 절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때문에 린은 곤혹스러워졌다. 차분히 입장을 말하면 레나도 당연히 동조할 줄 알았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레나는 그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린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으로 다시 말했다.
“당신한테도 피해가 갈 거야.”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남부공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어.”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할 일이네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어?”
“없지 않죠. 저는 린 씨를 좋아해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린의 눈이 커졌다. 린이 멍청하게 쳐다보자 레나는 무구하게 마주 보았다. 그 천연덕스러운 시선에 린은 도로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너무 위험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이 얘길 하려고 여태 기다리신 거예요?”
레나가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린은 마지못해 끄덕였고,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쳐낼 작정이면 새침하게 굴지나 말지.”
레나는 그렇게 중얼대며 웃었고, 린은 레나의 짙은 미소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레나로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역대 공작 중 가장 젊고, 가장 야심차며, 가장 무도한 작자라고 한다. 하지만 웬걸, 눈앞의 청년은 야심이나 무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고작 몇 번 본 여자와 작별인사를 하려고 기다리진 않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정직하게 기다리고 친절하게 설명하다니, 레나는 그게 기특하고도 괘씸해서 한참을 웃었다.
“알겠어요.”
그러곤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부담스러우신 거죠? 자길 찌를지도 모르는 사람과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그런 뜻은…….”
“부정하지 마세요, 이해하니까.”
레나는 달빛처럼 서글프게 속삭였다. 그러곤 린이 변명할 겨를도 없이,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그러니 이걸 대가로 받을게요.”
“대가?”
“기억 안 나세요? 린 씨 저한테 빚진 거 있잖아요.”
레나의 명랑한 물음에 린은 눈을 깜빡대다가 퍼뜩 떠올렸다. 빚. 수도 밖 도시에서 레나가 건달들에게 빼앗은 제단. 레나는 그 제단을 린에게 감사 표시로 주려고 했다. 하지만 린은 그냥 받을 순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갚겠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갚기로 한 거 이런 식으로 받을게요. 그러니까, 심야의 우정을 지속하는 식으로요.”
“왜 이렇게까지…….”
“말했잖아요. 제가 린 씨를 좋아한다고.”
레나의 명료한 대답에 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요한 정원 위로 달빛이 내렸다. 흰옷을 입었기 때문일까? 레나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린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숙녀는 알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지, 조금이라도 알까? 과연 그걸 알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망설이던 린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러곤 더는 도망칠 길이 없어 항복했다.
“이러면 내가 너무 비겁해 보이잖아.”
“그런 면도 없잖아 있죠.”
“음…….”
“괜찮아요, 조금 비겁해도 린 씨는 예쁘니까.”
어김없이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에 린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이 다 체념한 듯 보여, 레나도 솔직히 덧붙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에요. 전 린 씨가 좋고, 사소한 이유로 거리를 두고 싶지 않아요. 버림받는 것도 이젠 싫고요.”
마지막 말에 린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레나는 모르는 척 웃었다. 동시에 속으론 의심했다. 저렇게 순진한 반응이라니,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걸까? 레나는 린이 선을 그으며 경고한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당신에게 개자식처럼 굴 거야.
―당신한테도 피해가 갈 거야.
―남부공이 의심할 거야.
―위험해질 거야.
모두 레나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질 거라는, 참으로 갸륵한 호소. 덕분에 레나는 궁금해졌다. 이게 정말 걱정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고결하게 빠져나가려고 책임을 넘기는 건지. 만약 후자라면 참 비열하고 추잡한 녀석이다. 하지만 전자라면?
‘귀엽지.’
기특하고, 갸륵하고, 귀엽다. 레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생각하며 린을 바라보았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추잡한 놈일 수도 있고, 귀여운 녀석일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레나에게 중요한 건 더 이상 버림받지 않는 거였다. 그 대상이 아버지든 친구든 남자든 무엇이든 간에.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음 한구석이 베인 듯 아팠지만 레나는 아닌 척 웃었다.
“이제 됐죠? 사이좋게 지내요.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전제가 너무 극단적이야…….”
“그럼, 서로를 찌르기 전까지?”
레나는 가볍게 정정하며 산책길로 손을 뻗었다. 린은 힘없이 웃으며 그 에스코트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린은 걸음을 막 떼기 전에 돌연 멈추었다. 레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린은 혼자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뭔데요?”
“나를 너무 좋아하지 마.”
느닷없는 요구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나는 린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동자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곤 아주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잠깐 딴 데 볼까요? 지금 많이 민망하신 것 같은데.”
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힘겹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빨갛게 익어 있었다. 레나는 부끄러움 많은 청년을 위해 먼 하늘로 시선을 옮겼고, 그 사이 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더 본격적으로 수치스러워했다.
너무 뜬금없이 말해버렸다. 아까 레나가 대뜸 좋아한다고 해서, 그때 꽤나 놀랐던 터라 저도 모르게 똑같이 말했다. 아무 맥락 없이,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괜찮아요, 참신했어요.”
레나가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때문에 린은 한층 더 고통스러워졌다. 레나는 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어떡하죠? 저는 이미 린 씨가 꽤 좋은데.”
“……그렇게 좋아하는 건 괜찮아.”
“그럼 뭐가 안 괜찮아요?”
“서…….”
“서?”
“……연애 감정.”
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다른 말을 하려던 것 같은데, 굳이 캐물으면 정말 울 것 같아서 레나는 모르는 척 넘겼다. 그 사이 린은 수치심을 겨우 가라앉히고, 다시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연애 감정…… 같은 걸 느끼게 되면 말해 줘.”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지만 린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매달릴까 봐 그러나? 설마, 딱히 왕자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면 숨겨둔 처자식이 있나?’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궁금했지만 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잘됐네요. 저도 딱히 연애할 생각은 없거든요.”
대신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말했다.
“서로에게 유일해지는 건 부담스럽죠. 누군가의 파트너가 되는 건 잠깐 춤출 때로 충분해요.”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가볍다 못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린은 레나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본능처럼 깨달았다. 하지만 레나는 관여할 틈을 주지 않고, 목소리를 밝게 바꿔 물었다.
“린 씨는 춤 잘 추세요?”
“아니…….”
“잘됐네요. 어차피 제가 파트너 몫까지 추거든요.”
레나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곤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꺾어, 그 꽃잎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 걱정 말고 즐겁게 놀아요.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이른 봄 천진난만하게 핀 꽃을 내밀며 레나는 그렇게 말했다. 린은 머뭇대며 그 꽃을 받았고, 레나는 드디어 자신을 받아준 사람에게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