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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심장을 가져와 (25/208)

25화. 심장을 가져와2020.07.27.

우린 적이야. 일전에 린이 레나에게 한 말이다. 당시엔 듣는 척도 안 했지만, 실은 레나도 잘 아는 바였다. 같은 목적을 지녔다고 꼭 한편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목적이 같기에 경쟁자나 적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레나는 용병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독보적으로 활약하고 위태로운 입지를 다지려면, 지금은 얌전히 입을 다무는 편이 확실히 유리했다.

16562801600318.jpg“……저도 린 씨가 안 다치면 좋겠어요.”

하지만 레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순전히 친절한 이 청년이 기특해서. 귀엽고 마음에 겨워서, 예뻐서.

16562801600318.jpg“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레나는 결국 항복하는 심정으로 고백했다.

16562801600318.jpg“이틀 후 무덤 원정에 관한 얘기예요.”

16562801600335.jpg“원정?”

16562801600318.jpg“함정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 들어주셨으면 해요.”

뜻밖의 말에 린은 레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여전히 표정을 알 수 없었다.

16562801600318.jpg“인원은 많이 데려갈 필요 없어요. 기사 열 명만 선별해서 데려가세요. 정신력이 강하고, 재빠른 사람으로.”

게다가 이어진 말은 어둠보다 더 깜깜했다.

16562801600318.jpg“무덤에선 열흘 정도 머문다고 생각하세요. 식량은 소금만 챙겨가세요. 어차피 거기선 배도 안 고플 거예요. 대신 평소처럼 음식을 먹으면 평소처럼 쉬어야 해요.”

16562801600335.jpg“그게 무슨…….”

16562801600318.jpg“망자들하고는 되도록 싸우지 말고요. 아무리 없애도 다시 생기니까 싸울수록 손해예요.”

린은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나는 멈추지 않고 퍼붓듯 말을 이었다.

16562801600318.jpg“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은 계곡 사이에 있어요. 발견하더라도 접근하지 마세요. 가 봤자 린 씨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

16562801600335.jpg“접근하지 말라고?”

정복해야 하는 성에 접근하지 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린이 이해할 수 없어 되묻자, 레나는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어 말했다.

16562801600318.jpg“그 성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 이른 아침, 남부공은 레나를 급히 불러들였다. 하지만 정작 그 앞에 나타난 건 조막만 한 꼬맹이였다.

16562801629824.jpg“안녕하세요, 영감님.”

남부공이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유니가 먼저 말했다.

16562801629824.jpg“왜 부르셨는지 알아요. 아가씨가 전하신 말만 하고 갈게요. 첫째. 상견례는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하셨어요. 둘째, 원정을 앞당긴 건 최선의 선택이니 믿고 맡겨 주시래요.”

16562801629837.jpg“……그래서?”

16562801629824.jpg“이게 다인데요?”

유니의 대꾸에 남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6562801629824.jpg“음, 저 웃으라고 그런 표정 지으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만 남부공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실은 정신이 없어서 지금 자기 표정이 어떤지 알지도 못했다.

16562801629837.jpg“대체 무슨 생각으로……!”

16562801629824.jpg“같은 말을 하면, 모든 근심 버리고 기다리면 된다고 답해 주라 하셨어요.”

유니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받자 남부공의 인상이 한층 험악해졌다. 원정이 앞당겨지고 남부가 선봉에 서기로 했다는 소식은 남부공에게도 곧장 전해졌다. 그래서 레나를 급히 불렀건만, 밤중엔 부재중이라며 안 오고 아침에 다시 찾으니 이 당근만 한 꼬마만 덜렁 보냈다. 남부공으로서는 정녕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16562801629837.jpg“내 너희의 방종을 모르는 바 아니다.”

참다못한 남부공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01629837.jpg“하나 너희는 내게 방만했던 자들이 어찌 되는지 모르는 바, 내가 그것을 굳이 가르쳐야겠느냐?”

그의 끓는 목소리에 비서와 시종들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남부공의 격노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니는 오히려 화가 난 남부공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16562801629824.jpg“영감님, 우리 아가씨 못 믿으세요?”

16562801629837.jpg“믿고 나발이고……!”

남부공이 버럭 언성을 높이자 가신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것은 천둥 같은 호통이 아니라 힘 빠진 신음이었다.

16562801629837.jpg“어찌 마냥 믿으라고만 하느냐,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한탄하는 남부공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차라리 억울해 보였다.

16562801629837.jpg“그 오합지졸을 데리고 선봉에 선다니, 심지어 당장 내일이라니. 저야 거기서도 멀쩡하겠지만 다른 이들도 그러겠느냐? 분명 중간만 하라 일렀거늘 왜 나서서 기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느냔 말이냐……!”

노인이 팔걸이를 치며 하소연했다. 그는 레나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선봉은 가장 먼저 공격받고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된다. 많이 죽고 다치는 것은 물론 재수가 없으면 전멸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그러니 생각이 있다면 피해야 하는데, 만약 억지로 떠맡았다면 와서 대책이라도 논해야 하는데. 레나는 부를 때까지 안 오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하녀만 덜렁 보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남부공은 속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레나가 상견례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16562801629824.jpg“저기요, 지금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16562801629837.jpg“무슨 오해!”

남부공이 씩씩대자 유니가 살그머니 말했다. 그에 남부공이 버럭 소리쳤지만 유니는 끄떡도 않고 덧붙였다.

16562801629824.jpg“영감님네 기사들을 걱정하는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그 사람들은 내일 출정하고 아무 상관없거든요.”

16562801629837.jpg“어찌 상관이 없단 말이냐!”

16562801629824.jpg“아가씨만 가시거든요.”

16562801629837.jpg“뭐?”

유니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버럭대던 남부공의 얼굴이 멍해졌다. 유니는 저 표정도 웃기다고 생각하며, 성미 고약한 영감님께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16562801629824.jpg“내일 원정은 아가씨 혼자 가세요. 기사는 아무도 안 데려가고 선봉도 혼자 맡으실 거예요.”

남부공은 유니의 말을 아주 천천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 말을 다 알아들었을 때, 노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버렸다. . . . 후작은 남부 기사단의 상견례를 망쳐 버렸고, 추기경은 레나 경에게 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다. 무능한 남부 기사단과 함께 죽거나, 운이 좋아 패잔병으로 귀환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차라리 혼자 가는 편을 택했다.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라고 하니,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레나의 이런 결정은 어린 하녀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로써 황궁은 레나 루벨의 이야기로 다시금 떠들썩해졌다. 우선 레나 경을 배척하다가 도리어 배제당한 남부 기사들은 화내는 척하며 몰래 울었다. 그들은 명예보다 생명이 소중한 진실한 사람들이었다. 젊은 귀족들은 레나 경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그가 야반도주할 거라고 떠드는 자도 있었다. 추기경은 크게 웃었고, 동부공은 침묵했다. 한편 루벨 후작은 집사를 통해 이 소식을 가장 일찍 전해 들은 사람이었다. 딸이 혼자 원정길에 오른다는 소식은 그에게도 매우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을 묵묵히 준비했다. . . . 하루가 빠르게 지나 원정 당일, 두엄의 궁으로 동부와 북부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출정식은 본궁에서 열렸기에 두엄의 궁에는 사제들뿐이었는데, 그중 한 소년 사제가 루벨 후작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16562801687109.jpg“오늘도 신수가 훤하시네요, 각하.”

16562801687113.jpg“모두 사제님의 기도 덕이죠.”

인사말이 다소 묘했지만 후작은 익숙하게 화답했다. 그러자 소년 사제는 오히려 삐딱하게 반박했다.

16562801687109.jpg“저 그런 기도 안 하는데요?”

16562801687113.jpg“그래도 어젯밤엔 했겠죠.”

16562801687109.jpg“어젯밤도 안 했는데요.”

16562801687113.jpg“정말 안 했습니까?”

16562801687109.jpg“안 했어요.”

16562801687113.jpg“……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이리도 불효막심할 수가.”

후작이 탄식하자 소년 사제는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장난을 멈추고 밝게 웃었다.

16562801687109.jpg“몸조심하세요, 아버지.”

예비 사제이자 루벨 후작가의 후계자인 엔지 루벨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후작도 웃으며 가슴팍에 닿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때마침 남부공과 레나 루벨이 두엄의 궁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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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레나를 본 후작은 참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이어 레나도 후작을 발견했고, 부녀는 눈이 마주쳤다. 제복을 입고 당당하게 걷는 딸을 보자 여러 감정이 마음을 때렸다. 그럼에도 후작의 결심은 여전했다. 그에게 딸이란 무덤 깊은 곳에 파묻혀 이따금 슬픈 마음이 들게 하는 존재여야 했다. 하지만 난처하게도 레나는 멋대로 살아 돌아왔다.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생명과 앞날, 가문의 명예, 그리고 어느새 훌쩍 큰 아들을 위해서라도.

16562801629837.jpg“준비됐는가?”

16562801600318.jpg“네.”

후작을 마주 보던 레나는 남부공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에게 안긴 소년 사제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정신을 다잡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남부 소속은 남부공과 레나뿐이었다. 반면 동부와 북부의 위세는 상당했다. 우선 북부는 루비드 왕자와 루벨 후작을 필두로 셀 수 없이 많은 기사가 성 밖까지 열을 맞추고 있었다. 동부는 리그난 아이테르너를 중심으로 기사가 결집했는데, 북부에 비하면 한참 적은 규모였다. 그래도 그 수가 백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16562801600318.jpg‘린 씨는 저렇게 가는구나.’

레나는 동부의 기사들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16562801600318.jpg‘어쩔 수 없나.’

레나는 지난 밤 그에게 여러 가지를 조언했다. 하지만 저 인원을 보니, 린은 그 조언을 따르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 세력의 머리로서 남의 말만 믿고 행동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레나는 그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호의를 거절당한 마음은 내심 썼다. 한숨을 삼킨 레나는 다시 눈을 돌려 균열을 바라보았다. 그 앞엔 추기경이 서 있었고, 선봉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레나 루벨을 위한 자리였다.

16562801629837.jpg“정말 한 자리만 준비해뒀군.”

레나와 같은 것을 본 남부공이 나직이 중얼댔다.

16562801629837.jpg“단독 출정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16562801600318.jpg“모든 일엔 처음이 있는 법이죠.”

16562801629837.jpg“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경 말고 누가 또 이런 짓을 벌이겠나?”

16562801600318.jpg“전무후무라니 더 영광이네요.”

은근한 힐난에도 레나는 예쁘게 웃기만 했다. 그 입담에 남부공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돌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16562801629837.jpg“나는 옛날 사람일세.”

16562801600318.jpg“네?”

16562801629837.jpg“오래 살았고, 그만큼 보수적이지.”

뜬금없는 말에 레나는 남부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16562801629837.jpg“원래는 용납 못 할 일이네. 용병 출신의 부녀자를 대리인으로 삼는 건.”

16562801600318.jpg“저하도 검은 고양이가 불길하다고 믿으시는군요.”

레나가 가볍게 놀렸지만 남부공은 개의치 않고 되받아쳤다.

16562801629837.jpg“고양이뿐일까, 까마귀도 그렇지.”

16562801600318.jpg“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오고요?”

16562801629837.jpg“행운은 토끼 발일세.”

자연스러운 맞장구에 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유니를 통해 남부공이 거의 울먹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기분이 저조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는 평소보다 수다스러웠다. 그래서 웬일인가 보는데 남부공이 말을 이었다.

16562801629837.jpg“노인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네. 오랜 경험을 토대로 판단할 뿐. ……하지만 경은 이미 내 평생의 경험을 무색하게 만들었지.”

남부공이 허탈한 듯 말했다. 듣기에 따라 홀가분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레나는 무슨 변덕인가 싶어 바라보았고, 남부공은 그 눈초리가 퍽 괘씸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맺었다.

16562801629837.jpg“경을 종잡아 이해하는 건 포기했으니 어디 잘 해 보게.”

16562801600318.jpg“설마 지금 격려하시는 건가요?”

16562801629837.jpg“……알아들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못 알아들었으면 그냥 가게.”

남부공은 괜히 인상을 쓰며 레나를 쫓아냈다. 그래 놓고 레나의 등에 대고 다시 물었다.

16562801629837.jpg“중간만 하고 올 건가?”

솔직하지 못한 노인의 물음에 레나는 결국 웃었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며 곱게 답했다.

16562801600318.jpg“그럴 거면 선봉도 안 맡았겠죠?”

남부공은 정말 시건방진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균열 앞 선봉의 자리로 향했다.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악의와 호의, 살의, 의심, 경쟁심, 그리고 호기심 따위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레나가 그 사이로 걸어 나오자, 균열 앞에서 기다리던 클라비스가 웃으며 맞았다.

16562801768444.jpg“어서 와, 용감한 레나 경.”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가벼웠다. 레나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16562801768444.jpg“잘 다녀와. 난 네게 거는 기대가 정말 크니까.”

그는 한차례 속삭이고서 물러났다. 그러곤 경건히 성호를 그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16562801768444.jpg“폐하의 기사인 레나 경. 그대에게 가장 먼저 기회를 내리는 바, 가서 남부의 원수를 치고 첫울음을 삼킨 왕의 심장을 가져오세요.”

혼자서 망자의 왕을 잡으라니, 이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이걸 해낸다면 나는……. 클라비스는 예리하게 웃으며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켰다. 그러곤 속내를 삼키기 위해 앵무새처럼 중얼댔다.

16562801768444.jpg“그럼 폐하의 영광 아래, 새로운 지평을.”

그 말을 신호로 레나는 돌아섰다. 그러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무덤으로 향했다. . . . 붉은 빛에 눈을 질끈 감았던 레나는 짙은 유황 냄새와 한기에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세상이 보였다. 레나는 묘한 향수를 느끼며 간만에 돌아온 무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가운 건 레나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도 레나를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 저 멀리서 무수히도 많은 망자들이 레나를 찢어 죽이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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