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첫울음을 삼킨 자2020.07.30.
지옥엔 네 종류의 망자가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추하고 역겨운 존재는, 아마 첫울음을 삼킨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다른 망자들과 달리 나름 번듯하게 사람의 꼴을 했지만, 뼈와 거죽만 남아 몰골이 마른 시체 같았다. 또한 그들은 시각과 후각이 퇴화되어 바로 옆에 사람이 있어도 모를 만큼 아둔했다. 그런 주제에 청각은 무섭도록 예민하고 식성은 게걸스러워서, 그들은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쏜살같이 달려가 무작정 뜯어먹었다. 나는 그들의 습성이 퍽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거느리는 첫울음을 삼킨 왕과 마주했을 때, 그의 심장을 뜯기 전에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왕이여, 당신의 백성은 왜 앞을 보지 못합니까?
―우리는 후회가 많은 족속이라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첫울음을 삼킨 왕은 선선히 답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들은 왜 소리 나는 것을 득달같이 집어삼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내려진 형벌인 바, 우리는 가장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그리도 후회합니까?
―나는 부끄러워 그것을 스스로 밝히지 못합니다.
―당신들의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럼 당신들이 후회하는 일은 ‘첫울음을 삼킨’ 것입니까?
내가 연이어 묻자 왕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슬피 울며 답했다.
―공주여,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압니다. 그대의 고조부가 왜 ‘태움과 그을림의 왕’인지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첫울음을 삼킨 왕은 그것을 끝으로 침묵했다. 그는 가장 추한 망자를 거느리지만, 정작 본인은 왕들 중에서 가장 현명했다. 나는 그를 존중했지만 찢어발기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그를 기꺼이 도륙했고, 그의 갈가리 찢긴 몸에선 아주 작은 심장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주워 취하려 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첫울음을 삼킨 왕이 자신의 심장을 손가락에 끼우고 달아났다. 또다시 패한 왕은 성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고, 나는 그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 . . 린은 천천히 말을 몰며 황제 니힐의 전기를 곱씹었다.
‘웃기지도 않는 야사라고 생각했는데…….’
역사라기엔 얼토당토않고, 신화라기엔 너무 얄팍한 이야기들. 전부 제국의 만행을 덮기 위한 날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무덤에 내려오게 되니 작은 실마리라도 있을까 싶어 종일 되뇌고 있다. 린은 제 처지를 비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쏟아질 것처럼 붉은 하늘이 오히려 피로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린과 동부의 기사들은 이미 무덤 한복판에 있었다. 동부는 선봉인 남부 다음으로 무덤에 내려왔고, 착실히 레나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저하, 저쪽에 또…….”
데카가 목소리를 낮추며 계곡 한쪽을 가리켰다. 깔끔하게 토막 난 망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지상에선 연기가 되어 사라지던 것과 달리, 지하에서 죽은 망자들은 땅으로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남부공 대리의 역량이 심상치 않습니다.”
망자들의 시체를 보며 데카가 두렵게 말했다. 그에 린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레나가 선봉으로 균열을 넘어간 후, 린과 동부 기사들은 곧장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균열을 넘었을 때 처음 본 것은 레나 루벨의 뒷모습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망자의 시체였다. 그걸 본 린과 기사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끔찍해서는 아니었다. 그들도 망자의 시체쯤이야 예사로 넘어 다니는 기사였다. 오히려 그들이 경악하는 이유는 이 광경이 뜻하는 바를 아는 탓이었다. 망자는 죽으면 사라진다. 시체는 물론 핏자국도 남기지 않고 안개가 되어 흩어진다. 혹시 무덤에서는 다른가도 싶었지만 땅에 녹아드는 형태만 다를 뿐 그 몸이 곧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많은 시체가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레나 루벨은 망자를 베고 이곳을 떠났다. 혼자서 이 많은 수를, 초 단위라 해도 좋을 만큼 빠르게.
‘보통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린은 점점 녹아 없어지는 망자의 시체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나는 이 정도로 신속하게 망자들을 분쇄할 수 있을까? 해 봐야 알 것 같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어려울 것 같았다.
‘권능을 이어받은 황족도 아니면서 어떻게…….’
린은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돌연 실소했다. 이틀 전 레나가 해준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망자들하고는 싸우지 마세요. 싸울수록 손해예요.
싸우지 말라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대학살을 벌이며 진격 중이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린은 레나의 흔적을 쫓으며 그에 대해 더 곱씹었다. 레나는 싸우지 말라는 말 외에도 알 수 없는 조언을 더 했었다.
―기사 열 명만 선별해서 데려가세요.
―무덤에선 열흘 정도 머문다고 생각하세요.
―성에는 접근하지 마세요.
하나같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고, 때문에 린은 원정 전 내리 하루를 고민해야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레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나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한낱 개인이 아닌 동부공이었다. 린이 말없이 고민할 때였다. 불현듯 맨 앞에 있던 기사가 신호를 보냈다.
‘뭐지?’
긴장의 수위를 높이는 신호에 린은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발소리를 낮추고 선두의 기사 곁으로 다가갔다. 경사를 오르자 길게 뻗은 협곡과 그 사이로 우뚝 선 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검은 땅엔 물소 떼처럼 많은 망자가 있었다. 이족보행, 뼈가 드러난 마른 몸, 덧없이 배회하는 몸짓.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레나.’
레나였다. 레나는 대범하게도 첫울음을 삼킨 자들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둔한 망자들은 레나의 존재를 아직 깨닫지 못해 멍하니 서성이고만 있었다.
‘성으로 곧장 진입할 생각인가?’
성문도 길도 없는, 마치 진흙으로 모양만 흉낸 것 같은 성이다. 저길 대체 어떻게 들어가려는 거지?
―그 성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그래, 레나는 이렇게도 말했다. 모종의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럼 어떡하지? 이대로 남부가 모든 공을 가로채는 걸 지켜봐야 하나? 린은 거침없이 앞서가는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사들에게 수신호로 명령했다.
‘활과 종을.’
동부공의 명령에 기사들이 활과 놋쇠로 만든 종을 건넸다. 린은 끈으로 화살과 종을 이었다. 그러곤 활을 들어 종이 달린 화살 두 대를 시위에 걸었다. 린은 개인적으로 레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단지 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역대 공작 중 가장 젊고, 야심 차며, 무도한 동부공이었다. 마음을 굳힌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앞서가는 경쟁자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마침 레나는 수많은 망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천하의 레나 경도 저만한 숫자를 혼자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린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레나를 주시하며 시위를 놓았다.
***
‘길이 좁아.’
무덤 한복판에 있던 레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전방의 망자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레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앞을 빽빽이 막아서고 있었다.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까?’
지금까진 보이는 족족 망자들을 쳤지만 이제는 자제해야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이다. 섣불리 소란을 피웠다간 끝없이 몰려나오는 망자들과 한없이 싸워야 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조용히 지나고 싶은데, 켜켜이 몸을 겹친 망자들 때문에 지나갈 길이 요원했다. 발이 묶인 레나는 아랫입술을 물고 궁리했다.
‘소리를 내서 따돌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마땅한 도구가 없다.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소리 나는 물건은 미리 다 빼둔 탓이었다. 단검 몇 자루가 있긴 하지만, 힘껏 던져봐야 이 질퍽한 땅 위에선 별소리도 못 낼 것이다. 레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방법을 찾을 때였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화살 두 대가 땅에 박혔고, 동시에 쨍강대며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 그아악! 소리를 들은 망자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돌진했다. 망자의 날카로운 손톱에 화살은 순식간에 부러졌고, 종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더 크게 울었다. 광분한 망자들은 그 소리를 먹기 위해 격렬히 몸부림쳤다.
‘뭐지?’
레나는 그 광경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화살이 꽂힌 곳은 레나의 발치에서 마흔 걸음쯤 떨어진 땅이었다. 덕분에 망자들은 화살이 박힌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고, 꽉 막혀 있던 레나의 앞길은 시원하게 뚫렸다. 레나는 이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찾다가 빙긋 웃었다. 저 멀리 활을 든 린이 보였다.
‘린 씨도 왔구나.’
레나는 린이 자신을 도운 걸 알고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
‘저하?’
린이 레나 경의 앞길을 터주자 데카가 눈으로 까닭을 물었다. 하지만 린은 숨을 길게 내쉴 뿐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실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린은 동부공으로서 모든 결정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러니 레나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동시에 그 말을 무조건 묵과할 수도 없었다. 레나의 비범함은 린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동부의 주인으로서도 분명히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린은 고민 끝에 레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대로는 아니고, 몇 가지 안전 장치를 더해서.
‘지금부터 고지대에 진을 치고 근방을 감시할 것.’
‘열흘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궁으로 퇴각할 것.’
‘기사 7할만 식량을 섭취하고 나머지는 소금으로 견딜 것.’
린은 만약에 대비해 백 명 중 아흔 명의 기사를 데카와 함께 이곳에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을 수신호로 명하자, 데카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이견 없이 끄덕였다. 그러곤 린에게 어디로 가는지만 되물었다. 그에 린은 짧게 답했다.
‘전리품을 가지러.’
이 역시, 지난밤 레나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
‘성으로는 안 오나 보네.’
레나는 동부의 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기사를 잔뜩 데려와서 내심 실망했는데, 어쨌든 레나의 말을 듣기로 한 모양이었다.
‘착해서 말도 잘 듣네. 아니면 감이 좋은 건가?’
레나는 린의 결정을 기꺼이 칭찬했다. 조언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나름의 안배를 더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레나는 동부의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뿌듯하게 보다가, 망자들이 다시 길을 막기 전에 움직였다. 그 앞에 우뚝 선 성은 린이 관찰한 대로 문이 없었다. 하지만 레나는 저 성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레나가 성으로 막 들어가려 할 때였다. 돌연 발밑이 떨린다 싶더니, 요란한 땅 울림이 일어났다.
‘뭐지?’
레나는 망자들이 몰려오는 줄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망자가 아니었다. 계곡 위로 솟구친 것은 저 하늘만큼이나 선연하게 붉은, 북부의 깃발이었다. 북부 기사단을 발견한 레나는 황급히 몸을 물렸다. 아니나 다를까, 군대가 일으킨 소음에 성에서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우글대며 쏟아져 나왔다. 그아아! 망자들이 소리를 쫓아 달리자 저편에선 참격이 날아들었다. 루비드의 공격에 휩쓸릴 뻔한 레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했다. 아무래도 북부의 과격한 신사들은 이대로 공격을 퍼부을 작정인 것 같았다. 레나는 그들이 대형을 어디까지 펼쳤는지 확인하려고 계곡 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신속하게 움직이던 레나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추었다.
‘아버지.’
레나는 그 많은 기사 중에서 거짓말처럼 루벨 후작을 발견했다. 마침 후작은 레나를 향해 서 있었다.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마주쳤다. 직후 후작이 손이 허공을 가르고, 기사들이 화살을 퍼부은 것을 보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