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정복2020.08.06.
계곡 밑에선 아직 전투가 한창이었다. 산 것과 죽은 것이 서로 잡아먹는 모습이 혼탁했다. 그래서 그 가운데 만개한 레나 루벨의 미소는, 오히려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후작은 햇무리처럼 선연한 딸을 보며 쉰 목소리로 중얼댔다.
“처음부터 가지고 놀 생각이었구나.”
“오해예요, 아버지. 가지고 놀다뇨.”
후작의 탄식에 레나는 자그맣게 웃었다.
“제게 악의만 있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기회를 주겠다는 건 정말이니까.”
“파멸할 기회 말이냐?”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겠죠?”
후작의 원망 어린 물음에도 레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곤 애석하다는 듯 덧붙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 안 하실 수도 있어요. 사람의 양심은 저마다 무게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런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후회도 반성도 못 하는 심성이라면, 행동이라도 하시라고요.”
레나의 은근한 비난에 후작은 괴로운 얼굴로 반박했다.
“마음 없는 괴물 취급하지 말아라.”
“괴물이요?”
레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더니 돌연 계곡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혹시 아세요? 저들이 왜 저런 모습으로 방황하는지.”
레나가 가리킨 것은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이지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은 후회가 많은 존재라 했다. 그래서 저주이자 형벌로 자신들이 후회하는 일을 덧없이 반복한다고 했다. 머릿속에 니힐의 전기 몇 구절이 바로 떠올랐지만, 후작은 그 추상적인 이야기가 싫어 침묵을 택했다. 그래서 레나가 대신 답했다.
“저들은 자기 자식을 죽였어요. 아버지처럼요.”
후작은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재미있지 않아요? 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사람이 저렇게나 많다는 게.”
레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가 괴물이나 악마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동시에 두 눈은 다시 후작을 담았다.
“그저 평범하게 비겁한 사람이죠.”
아버지를 시선으로 잡아가둔 레나 루벨이 속삭였고, 그것은 후작의 심장을 잔인하게 후벼 팠다. 후작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딸을 노려보았다. 네까짓 게 뭘 아느냐 묻고 싶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발버둥 쳐 여기까지 온 나를, 네가 어찌 감히 평가하느냐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후작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참았다.
“맞다, 나 같은 자가 괴물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치미는 역정을 눌러 참고 도박을 걸었다.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건 차라리 너다. 못난 아비에게 자비를 베푸는 너야말로 진짜 괴물이지.”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땅을 딛는 순간 발목이 시큰댔다. 말에서 떨어지며 등자에 치인 모양이었다. 참 사나운 꼴이다.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레나는 절룩대며 다가오는 아버지를 막지 않았다.
“……경계조차 안 하는구나.”
얼마나 얕보았으면. 레나의 지척까지 다가간 후작이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럼에도 레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후작의 두 손이 결국 그의 어깨를 감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또한 멸시로 여긴 후작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인간이 괴물에게 뭘 어쩌겠느냐. 네가 모두 옳다. 힘없는 나는 그저 엎드려 복종할 뿐.”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손아귀에 들어온 레나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기회가 자비인지 복수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구나.”
“윽!”
날카로운 통증이 레나의 어깨에 꽂혔다. 레나는 불에 덴 듯이 놀라 후작을 밀어냈다. 후작은 양손을 신중하게 펼친 채 물러났다. 그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엔 반지가 있었다. 가시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맹독을 흘리는 반지였다. 레나는 후작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신음했다.
“아버지…….”
“그러니 확인시켜다오.”
“이렇게 또…….”
“네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후작은 레나의 흐느낌을 무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그러곤 여전히 가시가 돋은 손으로 비틀대는 레나를 힘껏 밀었다. . . . 후작의 반지 독은 집사가 사용한 독보다 훨씬 강했다. 집사가 홍차에 탄 것은 어디까지나 은밀히 사용하는 독. 하지만 후작의 반지에 발린 것은 상대의 즉사가 목적인 극독이었다. 최후의 독까지 사용한 후작은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끊임없이 몰려나오는 망자들 때문에 레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지친 몸을 일으키며 중얼댔다.
‘만약 또 살아온다면 인정하마.’
네가 정말 괴물이 된 것을. 후작은 욱신대는 몸을 이끌고 돌아섰다. 그러곤 거의 한 시간을 걸어서 진영으로 돌아갔다.
“각하!”
후작을 발견한 부관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후작은 그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성의 침입경로를 탐색하던 중 망자들을 만났다. 동행한 기사들은 모두 잃었다.”
허술한 변명이다. 부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되묻지 않았다. 괴물의 말은 모두 옳다. 힘없는 자는 그저 엎드려 복종할 뿐.
“상황은?”
“……피해가 큽니다. 이미 세 차례 망자를 소탕했으나 성에서 망자들이 다시 몰려나와 전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 싸우는 건 무의미합니다.”
“퇴각한다.”
“하지만 왕자 저하께서…….”
부관은 말끝을 흐리며 계곡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참격이 망자들을 노리며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전투를 시작한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루비드는 악착같이 참격을 날려대고 있었다. 후작은 부관의 말을 타고 루비드에게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저하, 이만 퇴각을 명하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루비드가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으르렁댔다. 그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성과 끊임없이 밀려나오는 망자들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닥치고 하나라도 더 죽여!”
루비드는 바락 소리치며 다시금 참격을 날렸다. 공을 세우는 데만 급급한 애송이는 상황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왕자가 이렇게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윽……!”
그래서 후작은 망설임 없이 루비드의 명치를 내리쳤다. 안 그래도 쓰러지기 직전이던 루비드는 힘없이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후작은 기절한 왕자를 부축하며 기사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북부의 기사들은 말을 미끼로 써서 망자들의 추적을 가까스로 따돌렸다. 뼈아픈 패배였지만 후작은 염려하지 않았다. 남부와 동부 덕분이었다. 무리하게 원정을 앞당긴 남부공 대리는 덧없이 전사했다. 심지어 동부공은 성 근처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실패한 남부, 도망친 동부. 그리고 홀로 용맹하게 싸운 북부. 비록 빈손으로 돌아가지만 문책을 피할 명분은 충분했다. 그래서 후작은 복잡한 가정사를 처리한 것에 만족하며 그만 돌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각하, 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북부의 패잔병이 아직 계곡을 지나고 있는데,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이 갑자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성은 마치 눈 녹듯 형체를 지우며 주저앉았고, 뜻밖의 이변에 후작은 걸음을 멈췄다. 후작은 기사들에게 확인을 명했다. 그에 돌아온 보고는 더 뜻밖이었다.
“망자들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성터 주변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후작은 말머리를 돌려 성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기사가 보고한 대로 망자는 단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계곡이었던 그곳은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녹아내린 성이 계곡에 고여 늪을 만든 듯했다. 무엇하나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후작은 우선 탐색을 명했다. 그때부터 북부의 기사들은 꼬박 닷새간 늪을 퍼내고 땅속을 뒤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만 이틀 만에 깨어난 루비드가 후작의 턱을 갈겨버린 것 외에는, 아무런 사건도 수확도 없었다. 닷새 후, 후작은 탐색을 중단하고 복귀를 명했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였다. 성이 무너지고 망자는 사라졌다. 후작은 돌아가자마자 승전보를 울리기로 결심했다. *** 북부는 일주일 만에 두엄의 궁으로 돌아왔다. 만신창이가 된 기사들을 입구에서 반긴 건 클라비스 추기경이었다.
“두 번째 귀환자는 북부군요. 어휴, 많이들 다쳤네.”
북부 기사단의 참담한 몰골을 보고도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발랄했다. 게다가 그의 모습은 출정을 축복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후작은 무덤에서 일주일을 보냈지만, 장작 밖에서 흐른 시간은 수십 분에 지나지 않았다. 백일몽을 꾼 기분이었으나 후작은 그 기이함보다 ‘두 번째’라는 클라비스의 말에 더 주목했다.
‘우리가 두 번째면 첫 번째는 동부인가?’
후작이 속으로 중얼대기 무섭게 클라비스가 덧붙였다.
“그럼 이제 동부만 돌아오면 되겠네요.”
‘뭐?’
예상을 깨는 말에 후작은 눈을 홉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궁 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의심은 곧 경악이 되었다. 궁 저편, 남부공과 나란히 선 레나 루벨에 의해서.
‘왜…….’
레나를 발견한 후작은 심장이 어는 것 같았다. 그때 레나도 후작을 봤다. 눈이 마주치자 레나는 예쁘게 웃으며 목례했다. 그 미소를 닮은 현기증이 후작을 덮쳤다. 정말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저기 선 레나의 모습은 후작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같았다. 군데군데 찢기고 때탄 제복은 레나가 무덤에 다녀왔다는 증거였다. 후작이 유령을 발견한 사람처럼 레나를 바라볼 때였다.
“무덤 원정은 다른 것보다 이게 좋네요. 결과를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거.”
클라비스가 균열을 향해 말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검은 옷을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부공과 그의 기사들이었다. 무덤에서 귀환한 그들은 북부와 달리 멀쩡했다. 다만 저 안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듯, 얼굴이 다소 거칠어졌을 뿐이었다.
“어서 와요, 여러분. 음, 여기도 고생을 좀 한 것 같은데, 무덤엔 얼마나 있었죠?”
클라비스가 막 돌아온 린에게 물었다. 하지만 린은 대답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루벨 후작을 쏘아보았다. 정작 후작은 레나에게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린은 후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덩달아 흠칫 놀랐다.
“동부공?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레나를 발견한 린은 놀란 기색을 감추며 뒤늦게 대답했다.
“그래서, 동부는 얼마나 있었어요?”
“열 하루.”
“그럼 북부는?”
“이레입니다.”
린과 후작의 대답에 클라비스는 짓궂게 웃었다.
“둘 다 오래 있었네요. 레나 경은 하루만에 왕의 심장을 가져왔는데.”
“심장을……?”
클라비스의 말에 후작은 당황하다 못해 어지러워졌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비스가 혼란을 부추겼다.
“그럼 북부와 동부는 뭘 가져왔죠?”
가져오다니, 거긴 아무 것도 없었다. 후작이 곤혹스러워하는데 동부의 기사들이 말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렸다. 쩔그렁 소리를 내며 커다란 자루가 바닥에 내려왔다. 바닥에 가득 쌓인 자루는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컸다.
“그게 뭐죠?”
클라비스가 묻자 동부의 기사가 자루를 찢었다. 칼을 대자 자루는 내용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욱 찢어졌다. 그 틈으로 금으로 된 장신구와 촛대 따위가 와르르 쏟아졌다. 찬란한 황금에 사람들의 눈이 커지자, 동부공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리품이다.”
린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레나가 생긋 웃었고, 린은 복잡한 심정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남부공 대리가 정복한 성을 수색해서 수거했다.”
동부공마저 그렇게 말하자 후작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분명 침으로 찔렀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직접 봤는데. 루벨 후작은 숨을 가쁘게 쉬며 악착같이 살아 돌아온 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후작의 뇌리에 레나가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장난 좀 쳐봤어요.
―……언제부터?
―아마, 처음부터?
장난. 그래, 이건 장난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의 장난. 후작은 입술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레나가 웃는 눈으로 말했다. 유감이에요. 또 실패하셨어요. 날 죽이는 것도, 용서받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