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약혼해 줄 수 있나요?2020.08.10.
“전부 다 황금인가요?”
“직접 확인해.”
클라비스의 물음에 린은 묵묵히 비켜섰다. 사제들이 자루를 열어보았다. 금과 보석이 쏟아졌다. 본궁에 남은 귀족들이 봤으면 군침을 흘리다 못해 눈이 뒤집힐 광경이었다. 전리품을 확인한 클라비스는 북부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남은 건 북부군요.”
클라비스의 지명에 후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북부는 뭘 가져왔죠?”
“……북부는 선발의 흔적을 쫓아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요?”
“긴 전투를 벌였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닷새간 수색을 벌였습니다.”
“나는 뭘 가져왔냐고 물었어요, 루벨 경.”
후작의 말이 길어지자 클라비스가 웃으며 추궁했다. 차가운 채근에 후작은 별 수 없이 털어놓았다.
“……가져온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앞엔 검은 늪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성 주변에 있었지만 동부 기사단과는 마주친 적이 없고, 남부공 대리가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음, 말이 엇갈리네. 누가 거짓말이라도 하나?”
클라비스가 능글맞게 미끼를 던졌다. 후작은 그게 덫인 걸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남부공 대리가 가져온 심장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레나가 멀쩡히 돌아온 것도 믿기 어렵지만, 그가 왕의 심장을 가져왔다는 건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후작은 검증을 요구했고, 클라비스는 기꺼이 끄덕였다.
“정 그러시다면.”
추기경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 사제가 비단으로 무언가를 받쳐 들고 나왔다. 하지만 그 위에 심장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비단에 놓인 것은 그저 자그마한, 보석 대신 낯선 문자가 새겨진 인장반지 뿐이었다.
“이건…….”
“레나 경이 가져온 왕의 심장이에요.”
후작이 얼떨떨하게 바라보자 클라비스가 설명했다. 덕분에 후작은 기가 찼다. 혹시 말의 심장 따위를 뜯어와 우기는 게 아닐까 했는데, 말의 심장은커녕 반지라니.
“이게 심장이란 말입니까?”
“루벨 경은 황제 폐하의 전기를 제대로 안 읽었군요?”
추기경이 웃으며 놀렸고, 후작은 니힐의 전기 한 구절을 퍼뜩 떠올렸다. ―갈가리 찢긴 몸에선 아주 작은 심장이 떨어져 나왔다. ―첫울음을 삼킨 왕은 자신의 심장을 손가락에 끼우고 달아났다. 분명 그런 구절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 아니었나? 반지 따위가 심장이라니, 그 얼토당토않은 헛소리가 진짜라니. 후작은 이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왕의 심장이 반지가 맞다한들, 그게 저 반지인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좋아요. 그럼 저 반지를 폐하께 보여드릴게요. 폐하께선 알아보실 테니까요.”
후작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추기경은 못 이기는 척 사제들을 보냈다. 반지를 들고 황제에게 갔던 사제들은 곧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들의 손엔 인장반지 대신 은으로 된 열쇠가 들려 있었다. 돌아온 사제가 추기경에게 열쇠를 내밀며 말했다.
“폐하께서 심장이 맞다 하셨습니다. 잘 가져왔다고 칭찬하시며, 심장을 가져온 이에게 열쇠를 주라 하셨습니다.”
쐐기를 박는 말에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클라비스는 이제 됐냐며 후작을 비웃었고, 지켜보던 루비드는 후작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그럼 결론이 났네요. 본궁으로 가서 승전보를 울리세요. 남부와 레나 경의 이름으로.”
황제의 판결과 추기경의 선언으로 첫 번째 원정은 끝났고, 하늘을 흔드는 소리가 온 황궁에 울려 퍼졌다. 원정의 결과는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예측을 뛰어넘다 못해 상식마저 뒤집는 결과에 수많은 의혹이 교차했다. 하지만 황제의 기사이자 남부공 대리인 레나 루벨은, 난무하는 의심 속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 무덤이 처음으로 정복된 날 밤, 황궁의 호숫가에는 또 다시 그림자가 깃들었다. 원정 전날엔 바빠서 피차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레나에겐 린과의 만남이 이틀만이었다. 하지만 무덤에서 열흘 하고도 하루를 보낸 린은 사정이 달랐다. 여느 때와 동일한 레나와 달리 그는 어딘지 초조했다. 그리고 그 심정은 레나를 만난 순간 여실히 드러났다.
“만져 봐도 돼?”
린의 두서없는 말에 레나의 눈빛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하지만 린은 설명도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죽었다고 들었어.”
“누가 그런 끔찍한 소릴.”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레나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지만, 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각했다. 그래서 레나도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이 놀랐어요?”
레나가 린의 하얀 얼굴을 보며 물었다. 린은 레나를 마주보다가 묵묵히 끄덕였다. 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놀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덤에서 데카와 다시 합류했을 때, 린은 그를 통해 레나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었다. 후작이 성벽에서 밀었다고 했다. 레나 경은 추락하던 후작을 구했는데, 후작은 그런 레나 경을 오히려 밀어 죽였다고 했다. 데카는 레나를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죽음을 애도하고 후작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린은 그런 통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것은 알 수 없는 혼란뿐이었다. 린은 어지러움 속에서 레나와 죽음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좀처럼 소화되지 않고 머릿속을 계속 떠돌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귀환했을 때, 후작을 본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었다. 그리고 레나를 발견했을 땐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후 밤이 될 때까지 계속 이런 상태였다. 린은 이 파도치는 감정의 정체를 미처 몰랐다. 하지만 레나의 표현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 자신이 레나의 소식을 듣고, 아주 많이 놀랐다는 걸. 레나는 린의 표정을 찬찬히 읽다가,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굳이 확인이 필요하시다면, 어떻게 해야 안심이 될까요?”
생사를 확인할 땐 보통 심장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린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조용히 타협했다.
“……손.”
“자요, 손.”
레나가 손바닥을 위로 하며 손을 내밀었다. 린은 망설이다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손 모양에, 레나가 웃으며 물었다.
“혹시 앉아도 할 줄 알아요?”
린은 힘없이 웃으며 가만히 포개고 있던 손으로 레나의 손을 쥐었다. 산책은 자주했지만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 잡아본 레나의 손은 의외로 아주 작았다. 린은 레나의 손가락을 말아 쥐고 있다가 엄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끝이 레나의 손금을 타고 내려오더니, 손목까지 와 조심히 감겼다. 손목을 쥐자 맥동이 느껴졌다. 레나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온기를 확인한 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린 씨 먼저 얘기해 주세요.”
레나는 태연히 되받아쳤다. 손은 아직 잡은 채였다.
“어차피 제 얘기는 사람들 앞에서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린 씨 얘기를 듣고 싶어요.”
망자들 사이에서 눈인사를 한 이후 서로의 행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레나는 린이 자신의 조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했다.
“기사단 수를 보고 제 말을 안 듣는 줄 알았어요.”
“무조건 따르기엔 너무 막연했으니까.”
그래서 묻자, 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생존과 직결되는 부분엔 안전장치가 필요했어.”
“안전장치요.”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안전장치가 필요했군요.”
“그래.”
“안전장치…….”
“넘어가, 제발…….”
레나가 안전장치를 소재로 집요하게 놀리자 린은 수치심에 괴로워했다. 레나는 린의 얼굴색이 바뀌고 나서야 웃으며 사과했고, 린은 과거의 발언을 저주하며 다시 입을 뗐다. . . . 레나는 선언했다.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을 정복할 수 있는 건 본인뿐이라고. 대신 린에게는 보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신이 정복하면 성이 무너질 테니, 그 후 안을 파헤쳐 보물을 챙기라고 했다. 린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레나의 말을 따랐다. 실제로 하루가 지나기 전에 성이 무너졌고, 그 아래 동굴 같은 지하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도로 내려가는 과정은 험난했다. 끝까지 내려가는 데만 사흘이 걸렸고, 그 안에 가득한 보물을 퍼내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다. 도굴꾼 행세를 하는 동안엔 레나가 말한 대로 소금만 먹었다. 그리고 비교를 위해 기사 일부에겐 마른 식량을 먹도록 했다. 차이는 곧 결과로 나타났다. 소금을 머금은 자들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고, 물을 원하지도 않았다. 반면 식량을 섭취한 자들은 휴식이 필요했다. 잠을 자고 물을 마셔야 했으며, 또 먹은 만큼 볼일을 봐야 했다. 소금을 먹은 자들에겐 그런 번거로운 생리현상이 사라졌다. 능률로 따지면 단연 유리했지만, 그렇다고 그편이 마냥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밤낮없이 붉은 하늘 아래 지치지 않는 몸은 시간을 잊어갔다. 묘한 나른함이 몸을 덮었고 상냥하게 질식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린은 그 기분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의식을 다잡아야 했다. 그러한 과정 끝에 동부는 막대한 부를 챙겨 돌아왔다. 성을 정복한 공은 오롯이 남부로 넘어갔지만, 이만하면 동부도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겪어보니까 당신이 했던 말이 모두 이해됐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린은 자신의 손에 담긴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옅게 웃으며 물었다.
“이건 물어봐도 소용없지?”
레나도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어.”
원정의 결과는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린이 그걸 인정한 건 원정이 끝난 후가 아니라 레나의 생존을 확인한 후였다. 린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인사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돌아온 대답마저 고왔다. 린은 그 역시 고마웠지만, 마냥 고마워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소리의 결을 바꿔 다시 말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제안이요?”
“동맹을 맺고 싶어.”
“동맹이라면…….”
“무덤 정복을 위해 정식으로 협력하고 싶어. 동부의 주인으로서.”
뜻밖의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린의 말을 곱씹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소소하게 돕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소소하게는 부족해.”
“누구에게 부족하다는 거죠?”
“양자 모두에게.”
린의 대답에 레나는 난처한 듯 웃었다.
“글쎄요, 제가 동부에 받을 도움이 과연 있을지.”
레나는 일부러 완곡하게 말하지 않았다. 레나는 무덤에 대해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독점한 비밀의 가치도 잘 알았다. 린을 꽤 좋아하지만, 그걸 대가없이 나누어 바칠 마음은 없었다. 애당초 첫 원정에 대해 귀띔한 것도 예정 없던 변덕에 불과했다. 그래서 넌지시 선을 그었지만 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무덤에선 많지 않겠지. 하지만 밖에선 다를 거야.”
물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황궁은 무덤 못지않은 전쟁터고, 당신은 북부의 실세와 대적중이고, 남부공은 힘이 없지. 남부 기사단은 말할 가치도 없고.”
린은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레나의 약점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 단호함에 레나는 짐짓 당황했다. 하지만 린은 오히려 레나의 손을 당기며 속삭였다.
“그러니 무덤에서 아무리 활약해도 밖으로 나오면 결국 이방인이야.”
“……그건 린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한텐 세력이 있어.”
“그래봤자…….”
“제국의 주류와 맞서는 게 가능한 유일한 비주류지.”
린의 목소리는 낮고 은근했다. 그래서 마치 피부에 스미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이 동부에 받을 도움이 과연 없을까?”
린은 레나가 앞서 한 말을 이용해서 똑같이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훨씬 더 불손하고 도발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레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물론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게 과연 공평한 거래인지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불공평한 것 같아?”
“꼭 그렇다기보다는, 굳이 필요가 있나 싶은 거예요.”
“맞아, 당신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지.”
린은 레나의 주장을 고분고분하게 수용했다.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혼자가 가장 낫다는 의미는 아닐 거야. 정말 그렇다면 기사들과 상견례도 처음부터 안 했겠지.”
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이 정확했다. 그래서 레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레나가 말이 없자, 린이 레나의 손을 지그시 당기며 속삭였다.
“솔직히 말할게. 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그만큼 당신을 돕고 싶어.”
부드럽게 압박하는 손길이 아늑했다.
“당신이 혼자 하는 걸 구경만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파고드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같이 싸우게 해 줘.”
레나는 아까보다 한 뼘은 더 가까워진 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내색은 안 했지만 레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은근히 호소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마냥 순한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판을 짜며 밀고 들어오는 태도가 퍽 교활했다. 이대로 있다간 어물쩍 넘어가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레나도 슬쩍 오기가 생겼다. 린은 아직 모르겠지만, 레나는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저를 돕고 싶다는 말,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그럼 어디까지 도울 수 있죠?”
“원하는 게 뭐든 최선의 답을 할게.”
다정하고도 냉정한 대답에 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선의 답을 하겠다니. 목소리는 다 들어줄 것 같은데 말에는 빠져나갈 구석을 남겨 둔다. 그럼 그렇지. 레나는 참 몹쓸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럼?”
린이 메아리처럼 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최상의 미소를 머금고,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혼해 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