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의혹2020.10.19.
린은 눈을 크게 뜨고 점점 멀어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구불대는 검은 머리카락. 짙은 눈썹. 오목한 뺨. 창백한 피부. 유난히 붉은 입술과 맹수를 닮은 밝은 눈동자. 나자 아이테르너. 린의 생모이자 전대 동부공. 동방을 짓밟은 무자비한 침략자. 학살자.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린은 7년 전, 나자 아이테르너가 자신의 생모인 걸 알고 뛰어내렸다. 조국을 짓밟고 양부모를 죽인 사람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자신의 혈관에 그 피가 흐르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왜 당신이…….’
거기에? 의문을 떠올린 순간 점점 아물어가던 허공의 균열이 결국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나자 아이테르너에게 사로잡힌 린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레나가 린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레나는 린이 숨을 쉬지 못하는 걸 깨닫고 그를 흔들었다.
“린 씨? 린 씨!”
린이 반응하지 않자, 레나는 그의 양 뺨을 잡아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그러곤 그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여기 봐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레나가 얼굴을 당기며 묻자 린의 초점이 레나에게 맺혔다.
“숨 쉬어요, 천천히. 날 보고.”
레나는 그를 달래며 호흡을 유도했고, 린의 가쁜 숨은 레나와 눈을 맞춘 후부터 차츰 잦아들었다. 이윽고 호흡이 완전히 돌아왔을 때, 린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는 지친 듯 몸을 늘어트렸고, 레나는 그의 처진 몸을 말없이 안아주었다. 린은 레나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등을 다독이는 레나의 손길을 느끼며, 자신을 덮쳤던 모든 것을 가만히 견뎠다. ***
“전해지는 얘기로, 나자 아이테르너 공은 성격이 아주 포악했대.”
차곡차곡 싸인 침대 시트 위에서, 순한 인상의 소년 사제가 말했다.
“어느 정도냐면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말 거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대. 공작들도 알아서 피할 정도였다니, 말 다한 셈이지.”
그러자 그 맞은 편, 베개 시트를 깔고 앉은 어린 하녀가 입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공작이면 같은 급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래?”
“나자 공이 그만큼 무시무시했나 봐. 사실 업적만 봐도 특출나긴 해. 망자 토벌은 가장 먼저 끝냈고, 동부도 성공적으로 평정했고. 그러다 보니 황제 폐하께서도 나자 공을 편애했다고 해.”
황제는 자신의 명에 충실히 따르는 자를 좋아했다. 그리고 과정이 아닌 결과로만 그 충성심을 판단했다. 나자 아이테르너는 그런 황제에게 남다르게 총애받던 공작이었다.
“한 번은 나자 공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는데, 그게 남부 고위 귀족이었대. 그런데 폐하가 편들어서 무마시킨 적이 있었다고 해.”
“나라 꼴 잘 돌아간다.”
“……너 딴 데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어린 하녀의 불경함에 소년 사제가 입단속을 시켰지만, 그 어린 하녀는 오히려 콧방귀만 탕탕 뀌었다. 그에 소년 사제, 엔지는 괜히 겁먹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마침 볕이 잘 드는 시간이라 다들 빨래를 널러 간 모양이었다. 엔지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어린 하녀, 유니는 다시금 코웃음 치며 그의 소심함을 비웃었다. 유니와 엔지, 그 두 꼬마가 재잘대는 장소는 황궁의 지하 세탁장이었다. 며칠 전 엔지가 찾아와 말을 건 이후, 두 사람은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금방 친해졌다. 언제나 당당한 하녀와 어디서나 촐랑대는 후작가의 도련님에게 신분의 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만난 두 꼬마는 세탁장에 쌓인 침대 시트에 앉아 시시덕댔는데, 어쩌다 보니 전대 동부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엔지의 질문에 유니가 다시 질문하며 이어진 주제였다.
“하여튼 나자 아이테르너 공은 포악한 성격 때문에 악명이 높았어. 평판이 안 좋은 건 리그난 아이테르너 공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나자 공에 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정론이야.”
“흠, 그래……?”
유니는 팔짱을 끼고 엔지가 해준 이야기를 곱씹었다. 동부공, 그러니까 린 씨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 평판이 나쁘다. 그럼 그 엄마라는 사람도 혹시? 유니는 가능성을 점쳐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자는 제국 동쪽의 나라들을 잔인하게 파괴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착할 리가. 그렇게 생각하던 유니는 돌연 깜짝 놀랐다.
“그럼 동부공은 자기네 나라를 침략한 사람의 아들인 거야?”
“응, 맞아.”
무지한 하녀는 그 유명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경악했고, 교양이 가득한 도련님은 으스대는 대신 친절히 대답했다.
“사람들이 동부공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야. 출신 자체가 모순이어서, 언제 돌아설지 모르니까.”
“그런데 어떻게 공작이 된 거야?”
“폐하께서 결정하신 거지, 뭐.”
엔지의 대답에 유니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분위기가 무겁다고 느꼈는지, 엔지가 목소리의 결을 바꿔 되물었다.
“하여튼 그래.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남부공 대리는 동부공하고 사귀는 거야?”
“집요하긴.”
엔지가 눈을 반짝 빛내며 묻자, 그의 역사수업을 쏠쏠히 듣던 유니는 짧게 혀를 찼다. 애당초 엔지가 전 동부공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한 건 이 질문 때문이었다. 오늘 엔지는 유니를 보자마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에 유니는 높으신 분의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아냐, 동부공 정도면 당연히 혼약자가 있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자 엔지는 혼약자는 없을 거다, 전대 동부공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로 대답하다가 나자 아이테르너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서 하던 이야기를 까먹은 건 아니었다.
“응? 무슨 사이야? 사귀는 거 맞아?”
“아, 모른다니까?”
“정말 몰라? 너도 어제 얘기 들었을 거 아니야.”
바로 어제,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는 두엄의 궁에서 아주 묘한 상황을 연출했다. 엔지가 평소보다 흥분해서 유니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그 두 사람은 같이 무덤을 수색하며 수상한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던 중이었는데, 어제 의혹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무덤으로 들어가고, 동부의 기사들과 교회의 사제들은 그들이 돌아오길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어서 더는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반 시간 후 동부공이 혼자 돌아왔다. 게다가 옷은 어디로 갔는지 상의를 벗은 채였고, 얼굴이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뜻밖의 모습에 동부 기사들은 그에게 변고가 생긴 줄 알고 다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기사들이 묻기도 전에 동부공이 명했다. 망토를 가져오라고. 그렇게 말하는 동부공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기사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명령을 먼저 따랐다. 그 후 동부공은 아무 설명 없이 망토를 들고 다시 균열로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을 때, 그 옆에는 동부공의 망토를 두른 남부공 대리가 있었다. 어딜 봐도 수상한 상황에 기사와 사제들은 놀란 토끼 눈으로 반라의 남자와 반라로 추정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동부공이 뒤늦게 ‘재를 옮기는 자들 때문에 옷이 탔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옷이 타버렸다 한들, 동부공이 그렇게 챙겨줄 이유는 없잖아?”
모두 엔지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망토를 가져다줬다는 건 상당한 배려가 담긴 행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동부공이 그런 배려를 하다니. 사람들은 동부공이 남부공 대리에게 모종의 감정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엔지 역시 그중 하나였고, 그래서 유니는 조금 기가 막혔다.
“이미 결론 내려놓고 뭘 묻는 건데?”
“결론 아니고 확신이야. 확신에는 지지와 격려가 필요해.”
“얼씨구.”
“게다가 오늘은 둘 다 안 나왔다며. 응? 왜 그런 거야? 너희 아가씨가 별말 안 해?”
엔지가 조르듯이 재차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 주 들어 매일 두엄의 궁으로 출석하던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가 오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 다 나오지 않았다. 이 또한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엔지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신의 계시를 구하듯 유니에게 열렬히 의존했지만, 정작 유니는 얄밉게 시치미만 뗐다.
“별말은 무슨, 비약하지 마. 망토 좀 구해다 줄 수도 있지. 그리고 뭐가 있어도 너한테 말하겠냐?”
“뭐야, 나는 물어보는 거 다 말해줬잖아.”
“그건 네 얘기가 아니라 누구나 아는 얘기잖아.”
“치사하게…….”
“치사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란다.”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빨래 바구니를 챙겼다.
“어디 가?”
“내가 누구처럼 한가한 줄 알아?”
“가지 마, 할 일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됐네요, 침대 시트도 제대로 못 갈면서.”
유니는 엔지를 타박하며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엔지가 마지막까지 얘기해달라며 찡찡댔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복도로 나왔다. 거기서 유니는 루벨 가의 노집사와 마주쳤다. 집사는 조금 어색한 표정이었고, 그래서 유니는 일부러 그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 그 시각, 레나는 방에서 모처럼 쉬고 있었다. 하지만 쉬는 것은 몸뿐, 머릿속은 린에 대한 걱정으로 엉망이었다.
‘린 씨, 괜찮을까?’
레나는 한숨을 쉬며 린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제 린은 무덤에서 한 여자를 봤다. 아는 사람인지, 그를 보자 얼굴에서 핏기가 다 빠져나갔다. 너무 심하게 동요해서 차마 누구냐고,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는 레나에게 한참이나 기대있었고, 겨우 진정했을 땐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는 말만 중얼대고 입을 닫았다. 그래서 레나도 오늘은 두엄의 궁에 가지 않았다.
‘하필 그런 걸 보게 될 줄이야.’
레나는 어제 일을 곱씹으며 또 한 번 한숨을 뱉어냈다. 어제 일은, 그러니까 망자가 생전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흔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다. 레나도 무덤에 있던 7년 동안 딱 한 번 본 게 고작이었다. 죽어서도 자아를 유지하는 건 망자의 왕뿐, 그에게 종속된 망자들은 자신의 속성이나 왕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왕의 의지를 거스르고 생전의 모습을 드러내다니. 어지간히 강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에게 예속된 그토록 강한 존재. 그리고 린이 알아볼 만한 존재. 예상되는 인물은 하나뿐이라, 레나도 린의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상태가 더 걱정스러웠다. 무덤의 진실은 살아 있는 자에겐 너무 잔혹하다. 그 일면과 마주한 자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그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레나가 그러하니까. 그래서 레나는 린이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며, 그를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 같은 시간, 린도 레나처럼 방에 홀로 남아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레나가 걱정하는 것처럼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쏟아지는 의혹에 홀로 맞서고 있었다.
‘환상은 아니야.’
린은 어제 본 것이 환상이나 가짜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만약 가짜라면 레나가 얘기했을 테니까.’
어제 나타난 나자 아이테르너가 환상이었다면 레나는 분명히 말했을 거다. 가짜예요, 무덤에선 그런 걸 볼 수도 있어요, 속지 말아요, 라고. 하지만 레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뱀의 외피를 벗고 나타난 여자를 향해 경악하자, 오히려 그 혼란을 이해하고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린은 나자 아이테르너가 망자로서 존재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의문을 솎아냈다.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자 여러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기분은 더없이 끔찍했다. 차라리 미칠 것 같았지만 린은 외면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황제가 공작들에게 부여한 권능이, 망자들의 힘과 묘하게 닮은 이유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