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유니의 주인님 (50/208)

50화. 유니의 주인님2020.10.22.

린은 예전부터 의심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겉으로만 따르는 척했을 뿐, 니힐 그라샤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제국의 선포를 다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서 비롯된 일이 전혀 신성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았으니까. 이미 레나에게도 말한 적 있다. 황제가 내린 권능은 신의 축복이라 하기엔 너무 기괴하다고. 레나의 말마따나, 능력 뒤에 저주가 있는데 그게 어떻게 축복일까. 뿐만 아니라 니힐이 정말 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왜 그 힘으로 다른 나라를 짓밟았을까. 그란디스 그라샤만이 신에게 선택받았고 나머지는 전부 그 먹잇감에 불과했나? 그런 편협한 존재가 과연 신이라 할 수 있나? 전부 린이 소년일 때부터 몰래 간직한 물음표였다. 그런데 어제 무덤에서 경험한 일이 그의 오래된 의문에 불을 지폈다.

16562808044333.jpg‘어제 날 지배한 건 분명 많은 심장을 가진 왕.’

그 망자의 왕은 린을 지배하고, 또 부추겼다. 그리고 그에게 휘둘리는 감각은 린에게 꽤 익숙했다.

16562808044333.jpg‘왜?’

지배하는 게 그 왕의 능력이어서? 그래서 린이 가진 약점을 터트린 건가? 아니면, 어떤 이유가 더 있나? 린은 고심하며 자신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엔 아까 깃펜으로 마구 휘갈긴 단어와 문장이 가득했다. ―동부공. 지배. 많은 심장을 가진 왕. 그리고 호색의 성향. ―남부공. 불. 태움과 그을림의 왕. ―북부공. 참격. 누구와 대응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서부공. 쇠약. 첫울음을 삼킨 왕? 클라비스가 약화시킨 기사, 첫울음을 삼킨 자들과 닮은 모습이었다. ―남은 건 사자를 가둔 왕과 용서받지 못한 왕. 이들은? 린은 제국의 공작과 망자들의 힘이 묘하게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여러 면면이 상당히 닮아 있다. 린은 일렁이는 등불로 책상을 비춰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16562808044333.jpg‘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아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정말 제국의 권능이 무덤에서 비롯된 거라면, 무덤 정복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거지? 린은 스멀대는 위화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무덤에서 본 나자 아이테르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무덤에서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 존재가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이미 생을 마감하고도 덧없이 배회하는 존재라는 걸. 하지만 아는 사람이 망자가 되어 나타난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차마 사랑할 수 없는 생모. 죽어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가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 황제가 정복하라고 명한 무덤에. 린은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려야 할까? 숨겨야 할까?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위험했다.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16562808044333.jpg‘레나는 알고 있었을까?’

주홍빛으로 물든 린의 눈이 돌연 가늘어졌다. 레나 루벨. 무덤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아는 숙녀. 그 만만치 않은 숙녀가 자신이 고작 며칠 사이에 느낀 의문을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레나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린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실을, 혼자서, 조용히. 그렇다면 레나 루벨은 대체……. 린은 레나에 대해 생각하다가 돌연 상체를 엎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매끈한 나무 책상과 이마가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지만 린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수치심이 목덜미를 뜨겁게 데우는 감각이 더 커서 이마의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린이 고심 중에 돌연 자해한 이유는 하나였다. 무덤에서 레나에게 저지른 치태가 다시 떠올라서, 몰려드는 자괴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린은 책상에 이마를 박은 채 또 한참을 앓았다. 정신을 잃고 레나를 덮쳤던 일은 이미 더 언급하기도 뭐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주저앉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 예고 없이 나자 아이테르너를 마주했을 때 린은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아득한 순간 레나가 그를 잡아주었다. 어디론가 추락하는 기분이었는데 레나가 막아주었다. 속절없이 기댄 그를 말 없이 안아주었고,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때의 손길이 다시 떠올라 린은 더없이 곤란해졌다. 연이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린은 미안해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민망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시달렸다. 창피함이 겨우 가시자 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일으키며 깜깜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었다. 그에게 밤은 레나를 만나는 시간. 하지만 오늘은 만남을 확신할 수 없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16562808044359.jpg

  ***

16562808044365.jpg“오늘 밤엔 산책 못 나가시겠네요.”

이미 침대에 누운 유니가 테라스 앞에 선 레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연신 하늘을 보던 레나는 얼른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16562808044373.jpg“어차피 오늘은 쉬려고 했어요.”

16562808044365.jpg“정말요?”

16562808044373.jpg“그럼요.”

16562808044365.jpg“설마 린 씨의 품에서 쉰다는 뜻은…….”

16562808044373.jpg“유니…….”

16562808044365.jpg“네, 그다음 무슨 말 하실지 알아요. 유니는 쉿 할게요.”

유니는 깜찍하게 제 입을 손으로 막았고, 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밤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린을 만나러 나가지 못했다. 종일 흐리더니 저녁부터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사방에 주적대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사람을 재우는 차분한 소리였다. 하지만 레나는 자장가 같은 빗소리에 굴하지 않고 아까부터 테라스 앞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니가 자그마하게 물었다.

16562808044365.jpg“아쉬우세요?”

16562808044373.jpg“아뇨.”

16562808044365.jpg“그럼요?”

16562808044373.jpg“린 씨가 나올까 봐 걱정돼서요.”

16562808044365.jpg“그러니까 린 씨가 비를 뚫고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16562808044373.jpg“유니…….”

레나가 힘없이 부르자 유니는 헤죽헤죽 웃으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린 씨를 소재로 아가씨를 놀릴 수 있어서 기쁜 모양이었다.

16562808044365.jpg“맞아요, 그 정도 정성은 보여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가씨의 약혼자라면.”

16562808044373.jpg“아직 약혼 안 했어요.”

16562808044365.jpg“그러네요. 언제 하실 거예요?”

16562808044373.jpg“다음 원정 날짜가 발표되면 운을 띄워보려고요.”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었다. 남부공의 반응이 약간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의 관계가 발전하는 것을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후부터는 움직이기가 아주 수월해진다. 연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이 생기니 지금처럼 눈치껏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이걸 두고 북부가 비열한 야합이라 비난할 수 있지만, 레나든 린이든 북부와는 척을 진 상황이니 그 역시 오히려 유쾌할 터였다. 레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니가 돌연 심각하게 되물었다.

16562808044365.jpg“그렇게 되면 저는 린 씨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16562808044373.jpg“그러고 싶어요?”

16562808044365.jpg“아뇨, 별로.”

16562808044373.jpg“그럼 그냥 린 씨라고 부르면 되죠.”

레나는 가볍게 답하며 테라스에서 그만 돌아섰다. 더 이상 서성거려서 유니에게 놀릴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비도 꽤 많이 내렸다. 이 정도 비면 린이 나올 리도 없을 것 같아, 그만 미련을 버리고 레나도 침대에 누웠다. 레나가 맞은편 침대로 오자, 유니가 이불에 숨어서 다시 종알댔다.

16562808044365.jpg“그래도 린 씨는 아닌 것 같아요. 아가씨의 남편이잖아요.”

16562808044373.jpg“……왜 벌써 남편이죠?”

16562808044365.jpg“전통에 따라 주인님으로 하겠어요.”

16562808044373.jpg“아뇨, 왜 남편인지부터…….”

유니가 거창한 포부를 세우느라 아가씨의 질문을 연거푸 무시할 때였다. 거센 바람과 함께 테라스의 문이 요란하게 재껴졌다. 비바람이 몰아닥치며 방 안으로 빗줄기가 쏟아졌고, 갑작스러운 소동에 유니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62808044365.jpg“제가 닫을게요.”

유니는 레나가 일어날 새도 없이 테라스로 달려갔다. 그러곤 활짝 열린 테라스의 유리문을 착착 밀어 닫다가, 돌연 바깥을 보고 중얼댔다.

16562808044365.jpg“어?”

16562808044373.jpg“왜요?”

16562808044365.jpg“린 씨다.”

16562808044373.jpg“장난치지 말고요.”

16562808044365.jpg“진짜로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에게 손짓했다. 레나는 반신반의하며 테라스로 다가갔다. 그러곤 유니가 가리킨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한 남자가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서 있었다. 언뜻 괴기스러울 만한 광경인데, 유난히 큰 키와 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져 그런 으스스한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저건 모로 보나 린이었고, 레나에게 린은 예쁘거나 귀엽거나 불쌍하거나 셋 중 하나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혼자 비를 맞고 선 모습은 압도적으로 불쌍했다. 레나는 놀라서 쏟아지는 비를 무시하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16562808044373.jpg“린 씨!”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불렀다. 그런데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이쪽을 아까부터 보고 있던 건지 린은 레나가 나온 것을 곧장 알아챘다. 비에 쫄딱 젖은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그 처량 맞은 모습에 레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레나는 안 되겠다 싶어 테라스의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 레나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리자, 멀뚱히 서 있던 린이 갑자기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두 팔을 뻗어 위에서 내려온 레나를 극적으로 받았다. 그로써 린의 두 팔에 안기게 된 레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16562808044373.jpg“뭐 하시는 거예요?”

16562808044333.jpg“떨어져서 받은 건데…….”

16562808044373.jpg“뛰어내린 거예요.”

16562808044333.jpg“아.”

린은 자신의 착각을 금방 수긍하고 레나를 땅에 내려주었다. 레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린을 손목을 잡고 나무 밑으로 끌고 갔다. 그러곤 무성한 나뭇가지로 비를 피하며 물었다.

16562808044373.jpg“어떻게 된 거예요?”

린은 말없이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을 아끼자 레나는 재차 물었다.

16562808044373.jpg“비가 이렇게 오는데.”

16562808044333.jpg“그래서.”

16562808044373.jpg“네?”

16562808044333.jpg“비 오는데 혹시 나올까 봐 걱정돼서.”

대답이 궁했던 린은 그럴싸한 핑계를 떠올리고 몰래 안심했다. 실은 레나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막연히 나온 거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련해 보이거나 싫게 느껴질 것 같아서 있는 그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핑계를 대도 이 꼴이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린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16562808044373.jpg“이러면 안 나온 제가 너무 비겁해 보이잖아요.”

16562808044333.jpg“나왔으면 다 젖었을 거야.”

16562808044373.jpg“이미 젖었어요. 린 씨가 받는 바람에.”

아까 두 팔로 받으며 린의 젖은 셔츠가 레나의 잠옷까지 젖게 만들었다. 레나는 젖어서 달라붙는 잠옷을 가다듬으며 덧붙였다.

16562808044373.jpg“그래도 잘 찾아왔네요.”

16562808044333.jpg“계속 바래다줬으니까.”

그 몇 마디를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궁했다. 나뭇잎은 비를 다 막지 못했고, 이렇게 비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나눌 만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없었다.

16562808044373.jpg“비가 너무 많이 오네요.”

레나의 중얼댐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까지 오는데 너무 불쑥 찾아왔나 싶었다. 그래서 그만 가야겠다 생각하는데, 레나가 자그맣게 말했다.

16562808044373.jpg“괜찮으면 잠깐 들어올래요?”

  . . . 린으로 레나를 놀리는 것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유니는,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오히려 깊이 고뇌했다. 린 씨가 정말 비를 뚫고 나타났다. 아까 한 말은 그냥 우스갯소리로 한 소리였는데, 린이 정말 저러고 나타나니 너 이 자식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수작이냐 싶었다.

16562808044373.jpg“유니, 수건 좀 가져다줄래요?”

린과 함께 테라스로 올라온 레나가 말했다. 린만큼은 아니었지만 레나도 잠깐 사이 비를 맞아 꽤 젖어 있었다. 유니는 사이좋게 촉촉한 남녀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로 수건을 들고 왔다. 린은 이미 얼굴을 아는 아이가 수건을 가져다주자 머뭇대며 인사했다.

16562808044333.jpg“안녕.”

그 어색한 인사에 유니의 눈빛이 묘하게 매서워졌다. 아이는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린을 쏘아보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대답했다.

16562808044365.jpg“정말 오셨군요.”

그러곤 약간의 패배감을 담아 덧붙였다.

16562808044365.jpg“주인님…….”

16562808189195.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