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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변곡점 (68/208)

68화. 변곡점2020.12.24.

엔지는 유니를 잡은 기사의 오금을 힘껏 걷어찼다.

16562812561919.jpg“윽!”

기사의 무릎이 덜컥 꺾이며 유니를 붙잡은 손이 헐거워졌다. 유니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냉큼 그를 뿌리쳤다. 유니가 뛰어내리자 엔지는 그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16562812561925.jpg“잡아!”

기사들이 소리치며 쫓아 왔고, 아이들은 그들을 피해 담벼락의 좁은 철창 사이로 빠져나갔다. 철창에 막힌 기사들이 허둥대는 사이, 유니가 달리며 소리쳤다.

16562812561929.jpg“린 씨!”

유니는 다급히 린을 불렀다.

16562812561929.jpg“린 씨이!”

그 와중에 등 뒤에서는 철컹철컹 소리가 났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본 엔지는 기사들이 철창을 넘는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16562812561998.jpg‘어떡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이대로 가다간 잡히고 만다. 마음이 절박해진 순간, 엔지는 돌연 숨이 막혔다.

16562812561998.jpg“허억, 윽!”

갑자기 찾아온 호흡곤란에 그는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너무 격하게 움직였다. 한계에 달한 폐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16562812561929.jpg“야!”

유니가 놀라서 엔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엔지는 숨을 몰아쉬며 그 손을 뿌리쳤다. 혼자 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쫓아온 기사들이 다시 유니를 낚아챘다.

16562812561929.jpg“이익, 이거 놔!”

몸이 들린 유니가 발버둥 치며 저항했다. 엔지도 기사를 붙잡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유니가 온몸으로 저항하는데 돌연 땅 울림이 느껴졌다. 말발굽 소리였다. 유니는 동부 기사들이 온 걸 알고 다시 목청을 높였다.

16562812561929.jpg“린……!”

기사가 유니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그에 유니는 입을 막은 손을 꽉 물어뜯고 다시 악을 썼다.

16562812561929.jpg“린 씨! 여기에요, 여기! 저하!”

16562812561919.jpg“이 망할……!”

초조해진 기사가 유니를 후려치려는 듯 손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쐐액 바람 소리가 나더니 번쩍이는 게 그의 손에 박혔다. 기사는 뭐가 날아왔나 돌아보다가, 손이 화살에 꿰뚫린 걸 뒤늦게 알고 기겁했다.

16562812561919.jpg“으아……!”

기사가 고통스러워하며 주저앉았다. 유니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쪽을 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활을 잡은 린이 이쪽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16562812561925.jpg“동부공……!”

한걸음 뒤에 있던 기사들이 린을 보고 급히 몸을 돌렸다. 두 기사가 쓰러진 동료를 버리고 돌아섰지만 린은 쫓지 않았다. 다만 활시위에 활을 걸고 두 발의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팍! 팽팽한 활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활이 도주하던 기사들의 어깨와 다리를 뚫었다. 동부 기사들이 거꾸러진 남부 기사들을 제압했고, 린은 곧장 말에서 내려 유니에게 달려왔다.

1656281259117.jpg“괜찮아? 왜 혼자 있어?”

린이 유니를 일으키며 물었다. 다정한 물음에 유니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사이 동부 기사들은 엔지를 일으켜 세웠다. 얼떨결에 부축을 받은 엔지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동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문과 아주 딴판이었다. 그리고 소문과 다른 것은 동부공만이 아니었다. 엔지는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으로, 동부 기사들에게 포박된 남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 . .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아버지의 사람들에게 쫓기다가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동부공을 만나 안심하다니. 무도하기로 유명한 동부공은 생각보다 정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격자로 통하는 루벨 후작은 어쩌면, 오히려……. 엔지는 입술을 몰래 깨물며 멀찍이 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후작은 아들의 시선은 까맣게 모른 채 자신의 딸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후작은 동부공에게 안긴 레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레나는 시체처럼 늘어져 동부공이 움직이는 대로 팔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16562812591174.jpg‘죽었나?’

레나 루벨이라는 불청객의 죽음. 그건 후작이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레나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속이 허전했다. 직전에 저 애가 채찍으로 망자를 떨어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찬란한 모습이 아직 망막에 선한데, 그걸 좀 더 자랑하고 싶은데 이렇게 죽다니. 후작은 자신이 레나의 생존을 바라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인간이란 이다지도 간사하다.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마음을 뒤집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겠다고 아등바등. 후작은 제 처지가 새삼 처량해 조금 더 웃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짓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인간이었다. 마음이 있고, 감정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후작은 쓰러진 레나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만약 죽는다면 진심으로 애도하기로. 그리고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이번엔 정말 아껴주기로. 이미 후작은 딸을 다시 들일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루벨 가의 시선이 엇갈릴 때였다. 균열이 다시 일렁이더니, 무덤에서 북부 기사가 뛰쳐나왔다. 혼자 밖으로 나온 그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16562812561919.jpg“모두 대피하십시오!”

기사의 외침에 밖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두런댔다. 사람들이 굼뜨게 반응하자 기사는 다시금 외쳤다.

16562812561919.jpg“망자들이 몰려옵니다!”

기사가 소리친 직후 균열에서 검고 붉은 기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색깔별로 나뉘어 좌우로 갈라졌다. 기사들은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원을 크게 그리며 달리더니, 이내 전열을 갖추고 균열을 향해 섰다.

16562812591187.jpg“전군 대기.”

가장 앞에 선 이우라가 나직이 명했다.

16562812591187.jpg“지금부터 두엄의 궁을 봉쇄하고 망자들을 막는다.”

이우라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에 기사들은 동과 북을 가리지 않고 따랐다. 기사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자 레나를 돌보던 린도 다시 말에 올랐다. 동부공과 북부공이 균열 앞에 나란히 서고, 그의 기사들이 균열을 포위했다. 붉은 균열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밖에 있던 기사들은 무덤의 입구를 처음 열던 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안에서 나온 기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 몰려오는 게 그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균열의 붉음이 폭발하며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북부공의 참격이 이미 죽은 자들의 주검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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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812561919.jpg“전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시종장의 공손한 알림에 침대에서 나른한 대답이 돌아왔다.

16562812618817.jpg“안 그래도 일어났어요.”

어둠 속에서 클라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종과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침실로 들었다. 그들은 창문의 암막 커튼을 열고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다. 그리고 궁중악사는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손을 씻는 그릇은 금, 발을 씻는 대야는 은. 침대에 드리운 주렴은 진주였다. 손과 발을 씻은 클라비스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주렴을 헤치고 나왔다. 그러곤 창가에 앉아 느긋이 찻잔을 들었다. 부드러운 햇살도 잔잔한 음악도 갓 우린 홍차의 향기도, 무엇하나 감미롭지 않은 게 없었다. 이른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며 클라비스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16562812618817.jpg“두엄의 궁은 어떻게 됐죠?”

16562812561919.jpg“저하께서 침소에 드신 후 궁 밖까지 망자가 몰려나왔었다고 합니다.”

16562812618817.jpg“저런, 그래서요?”

16562812561919.jpg“다행히 다른 궁까지 넘어간 망자는 없었고, 자정 경 통로가 닫혔습니다.”

16562812618817.jpg“누가?”

16562812561919.jpg“통로를 닫은 건 동부공입니다만 제단까지 길을 낸 건 북부공이라고 합니다.”

16562812618817.jpg“하긴, 그 둘밖에 없죠. 역시 주인공들.”

클라비스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금 찻잔을 기울였다. 햇살을 받으며 차를 음미하는 클라비스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 모습은 시종장마저 질리게 만들었다. 지난밤 황궁은 아비규환이었다. 그 일로 두엄의 궁 주변은 아직 난장판이고, 무수히 많은 기사가 다치고 심지어 죽었다. 밤새 그런 난리가 났었는데 정작 추기경이라는 자는 평소와 같은 시간 침소에 들어 다음날에 결과 보고를 받고 있다. 시종장은 그 무책임한 행태에 기막혀하다가 곧 깨달았다. 클라비스가 서부공으로 있던 땅이 지금 어떤 꼴인지를. 시종장이 한숨을 삼키는데, 클라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62812618817.jpg“남부공 대리는요?”

16562812561919.jpg“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6562812618817.jpg“그럼 안 되지…….”

16562812561919.jpg“네?”

시종장이 무슨 뜻인지 몰라 영문을 물었지만 클라비스는 그저 짙게 웃었다. 레나 루벨이 혼수상태로 동부공에게 구조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정말 안 될 일이다. 내가 어떻게 만든 괴물인데, 설마.

16562812618817.jpg“이렇게 실망시키진 않겠지.”

클라비스는 가볍게 중얼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나이트가운을 벗었다. 매끄러운 실크가 흘러내리며 희고 마른 몸이 드러났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눈부신 나신에, 시종들은 시선을 피한 채 성의를 들고 다가갔다. 사람들은 클라비스를 싫어했다. 무책임하고 사치스러운, 의무보다 향락에만 몰두하는 그를 존경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클라비스를 좋아했다. 선하게 웃으며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아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너무 아름다워서. 클라비스는 미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제게 과분한 성의를 몸에 걸쳤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명했다.

16562812618817.jpg“공작들을 소집하세요. 폐하께서도 어제 일을 궁금해하실 테니.”

  *** 그 시각, 남부공은 침울한 얼굴로 병상에 누운 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62812646941.jpg“좀 어떤가?”

16562812561919.jpg“외상은 없고 호흡도 체온도 정상입니다.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16562812646941.jpg“그런데 왜 안 일어나는 건가?”

16562812561919.jpg“송구스럽지만 지금으로선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레나의 상태를 살피던 의사가 곤혹스럽게 답했다. 그에 남부공은 폐부에서부터 긴 숨을 뱉어냈다. 어제 무덤에서 구조된 레나 루벨은 잠을 자듯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남부공은 그 모습이 야속해 또 한 번 침음했다. 그러곤 침대에 딱 붙어 앉은 유니에게 말했다.

16562812646941.jpg“시중 들 사람을 보낼 테니 너도 좀 쉬어라.”

16562812561929.jpg“아가씨 옆에 있을래요.”

하지만 어린 하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운 모양이었다. 남부공이 그 수척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차는데, 비서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16562812561919.jpg“저하, 황제 폐하께서 공작들을 소집하셨습니다.”

비서의 전언에 남부공은 올 게 왔다는 심정이었다. 두엄의 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황궁 한복판에선 간밤에 망자들이 날뛰었다. 황제는 분명 이 일을 문책할 테고, 경계 임무를 맡았던 남부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부공은 애써 쓴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62812646941.jpg“알겠네, 곧 가지.”

16562812561919.jpg“그리고 문병……을 오셨습니다.”

16562812646941.jpg“문병?”

시종은 누가 찾아왔는지 말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남부공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문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늘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던,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였다. 앙숙을 발견한 남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거부감은 동부공의 목에 감긴 붕대와 팔에 덧댄 부목을 보고 주춤 사그라졌다.

16562812646941.jpg‘저 망할 종자가 왜 여길…….’

남부공은 애써 못마땅한 척했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덤에서 레나를 구조해온 게 저 작자인 걸. 남부공은 그에게 빚을 지는 것도 고마워하는 것도 싫어, 축객령을 내리는 대신 굳은 얼굴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남부공과 그의 사람들이 린을 못 본 척 나가버리자 린은 곧장 레나에게 다가갔다.

1656281259117.jpg“아직 안 일어났어?”

린의 물음에 유니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62812561929.jpg“아가씨랑 얘기 나누세요.”

유니까지 자리를 비켜주자 린은 레나와 단둘이 되었다. 린은 침대 옆에 앉으며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무너질 것 같은 기분에 그는 더 깨달았다. 자신이 레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그래서 레나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무섭다는 것도. 린은 손등으로 레나의 뺨을 쓸며 그를 불러보았다.

1656281259117.jpg“레나.”

대답 대신 보드라운 뺨의 감촉만 남았다. 그게 더 괴로워 그는 쉰 목소리로 신음했다.

1656281259117.jpg“일어나…….”

  ***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느낌에 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곳에 레나를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레나의 눈앞엔 치솟는 불길과 흩날리는 재, 그리고 그 가운데 묶인 가련한 여자들뿐이었다. 그 지옥 같은 광경에, 레나는 혼잣말로 중얼댔다.

1656281270194.jpg“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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