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재의 세계2020.12.28.
그 세계는 여인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재를 뒤집어쓴 듯 검은 자들이 장작을 쌓고 횃불을 던지며 여인들을 불살랐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막 눈을 뜬 레나가 그 모습을 바라보자, 재를 뒤집어 쓴 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개의 눈이 일시에 레나를 향하더니, 천둥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재판을 시작한다.
―재판을 시작한다.
―재판을 시작한다.
쏟아지는 목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죄를 인정하라.
―죄를 인정하라.
―죄를 인정하라.
그림자들이 레나를 다그치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레나는 미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자들을 쏘아보며 낮게 명령했다.
“비켜.”
왕의 명령에 망자들은 힘없이 녹아내렸다. 그림자가 사라졌지만 불길 속 여인들은 그대로였다. 레나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치솟던 불이 점점 작아졌다. 그들을 묶은 굵은 밧줄도 툭툭 끊어졌다. 레나는 까맣게 그을린 여인들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꼭 찾아줄게요. 당신들의 이름.”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여인들은 그대로 폭삭 무너져 재가 되었다.
“그 한미한 이름을 찾아서 뭘 하려고?”
그때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래알처럼 자잘하여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이름일진대.”
선하게 웃는 낯으로 신랄히 지껄인 그는 태움과 그을림의 왕, 히엠스 그라샤였다. 그는 레나의 바로 등 뒤로 나타났고, 레나는 그걸 깨닫자마자 그의 안면을 힘껏 후려쳤다. 레나의 주먹질에 히엠스는 재가 되어 흩어지더니, 레나의 어깨 반대편에서 다시 나타났다.
“소용없는 거 알면서.”
“잘도 이런 일을 꾸몄네요.”
레나가 노려보며 말하자 히엠스는 다정히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튕겨 공간을 바꿨다. 탄내가 진동하는 화형장에 카펫이 깔리고 푹신한 소파가 놓였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잠깐이지만 앉아서 얘기할까요?”
레나는 히엠스와 그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레나는 깔끔한 숙녀복을 입고 있었다. 손은 깨끗하고 잔 상처도 없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태와 너무 달랐다.
‘현실이 아니야.’
레나는 전신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에 확신했다. 이건 꿈이었다. 불청객에게 장악당한, 나갈 수 없는 꿈.
“상상도 못 했네요. 날 가두려고 심장까지 걸 줄은. 이게 당신한테 무슨 이익이죠?”
상황을 대강 파악한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히엠스의 손끝을 힐끔댔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한 그는 손끝부터 천천히 부스러지고 있었다. 심장을 빼앗긴 왕은 이미 힘을 잃고 무너졌다. 지금 레나의 앞에 있는 건 그가 남긴 아주 작은 조각, 레나가 삼킨 재에 담긴 히엠스 그라샤의 마지막 의지였다. 레나는 자신을 꿈에 가둔 걸로 모자라 이런 여흥까지 마련한 히엠스가 얄미워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히엠스 그라샤는 클라비스의 선조답게, 그 매서운 시선 앞에서도 태연히 웃었다.
“사자 왕에게 뒷일을 맡겼거든요.”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죠?”
“적의 적은 친구죠. 최악보다는 차악이고, 목 잘린 왕보다는 사자 왕이라야 그나마 소생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사자 왕, 소생. 레나는 그 두 마디로 안팎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망자의 왕들은 레나가 제국 편에 선 것을 알고 대책을 세운 모양이다. 태움과 그을림의 왕이 레나를 의식 밑바닥에 가두면, 그 틈에 사자를 가둔 왕이 지상으로 나가 제국을 친다. 이 양동작전으로 사자 왕이 니힐에게서 심장을 되찾으면 히엠스는 소생할 수 있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죽을 리는 없으므로, 힘의 근원이 존재하는 한 그는 불멸이다. 그래서 히엠스는 사자 왕과 모종의 거래를 한 거다. 건방지게 자신들의 심장을 노리는 황제와 레나에게 보복하려고. 레나는 황궁의 상태가 걱정스러워서 다시 바쁘게 상황을 살폈다.
‘빨리 돌아가야 돼.’
“못 나가요.”
그런 레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히엠스가 말했다.
“혼자서는 못 깨어날 거예요. 무슨 수를 써도. 그리고 그대가 잠든 동안 지상은 멸망할 터, 모두 그대가 자초한 일입니다.”
히엠스는 무덤의 비밀을 멋대로 폭로하고 침략한 레나를 그렇게 힐난했다. 그에 레나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가능하겠어요? 황제에게 진즉에 깨졌잖아요, 당신들.”
레나의 조롱에 히엠스의 웃는 낯이 꿈틀 움직였다. 말마따나 망자의 왕들은 이미 100년 전에 황제에게 패했다. 그리고 그날의 패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대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한 세기 전의 일. 그리고 지상에서의 100년과 지하에서의 100년은 다르지요.”
아픈 곳을 찔렸지만 히엠스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고 끄덕였다. 그러곤 태연을 가장하고 한층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간 그 힘도 쇠했을 터, 그래서 우리의 심장을 마저 빼앗으려는 거겠죠.”
“글쎄요, 그런 속사정까진 모르겠네요.”
“거짓말.”
“거짓말?”
“그대는 우리와 달리 아직 살아 있는 자, 시간에 구애를 받는 자. 분명 모든 걸 알고 그 자리를 택했겠지.”
레나의 시치미에 히엠스가 낮게 읊조리며 물었다.
“대체 왜 그곳에 있는 겁니까, 축복을 빼앗긴 왕이여.”
레나 루벨.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 무덤에 왕이 생긴 이래 가장 이질적이고 불순한 존재. 산 채로 죽은 자들의 왕이 된 가짜. 생전 정복자도 지배자도 아니면서 왕이 된 이단.
―갓 태어난 왕이여! 너를 저주한다!
―무엄하다! 참람하다! 건방지다! 썩은 장작들을 끌어다가 왕 노릇 하는 너를 저주한다!
심장을 빼앗기기 전 그가 퍼부은 저주도 그런 레나 루벨을 향한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엠스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아는 레나는 싱긋 웃기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그러자 시간이 얼마 없는 히엠스가 재차 물었다.
“왜 목 잘린 왕의 편에 계신 겁니까. 그의 통치가 옳다고 여기십니까?”
“옳다?”
대뜸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말에 레나의 얼굴이 멍해졌다. 레나는 되게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애매하게 웃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레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히엠스 그라샤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닮았다. 당연하다. 핏줄이니까. 그렇다고 성미까지 이렇게 닮을 필요는 없지 않나? 레나는 클라비스를 떠올리게 하는 그 시체를 향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텐 다 똑같은 놈이에요, 너희들은.”
*** 맨발이었다. 바닥에 조아린 남부공의 머리를 밟은 것은, 황제 니힐의 맨발이었다.
“밟아 부숴달라고 내민 거니?”
니힐은 언젠가 그런 것처럼 짧은 코르셋 한 벌만 걸친 채, 노인의 머리를 발로 누르며 중얼댔다. 비참하게 짓밟힌 남부공은 차라리 칼로 난도질을 당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힘주어 문 어금니에서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그는 참았다. 참고 다시 참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숨을 죽이고 이 수모를 견디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는 몸부림치듯 참았다.
. . . 이른 아침, 클라비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공작들을 소집했다. 그래서 세 공작과 전날 무덤에 갔던 루비드 왕자는 알현실로 모였다. 그때 그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팔에 부목을 댄 동부공과 머리와 얼굴 반쪽을 붕대로 감은 북부공. 그나마 남부공은 멀쩡한 모습이지만, 그의 대리인은 침상에 누워 있으니 동․남․북 모두 성치 않은 셈이었다. 세 공작은 빈 황좌를 향해 섰다. 황제를 기다리는 그 잠깐, 남부공이 낮게 으르렁댔다.
“이우라 플레누스, 내게 할 말이 없는가?”
“용무가 있으면 직접 말하십시오, 모호하게 묻지 말고.”
남부공의 추궁에 이우라는 차게 대꾸했다. 그에 남부공의 얼굴이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
“자네가 지시한 일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내 기사들을 매수한 것과 망자들을 유인해 나온 것, 네 잔머리냔 말이다!”
남부공이 이를 악물고 일갈했다. 하지만 이우라는 그것을 외면한 채 침묵했고, 부아가 치민 남부공이 매섭게 경고했다.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말게. 이 일은 끝까지 파헤쳐 책임을 물을 테니.”
북부공이 굳은 얼굴로 받아치려 할 때였다. 황좌의 휘장이 걷히며 클라비스가 나타났다.
“다들 오셨군요.”
클라비스는 빙그레 웃으며 아는 체 하더니 옆으로 공손히 비켜섰다. 그 뒤로 여느 때처럼 표정이 없는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들과 왕자가 그를 보고 몸을 낮췄지만, 니힐은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곤 중얼대듯 물었다.
“누구 책임이야?”
밑도 끝도 없는 추궁에 공작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 책임이냐니, 굳이 책임의 소재를 따져야 한다면 여기서 가장 잘못한 사람은 황제다. 저 위험한 균열을 황궁 한복판에 열어 둔 것도, 공작들에게 무덤을 정복하라고 명령한 것도 니힐이니까. 하지만 정작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고한 사람인양 묻기만 했다. 이제부터 누굴 벌하면 되는지, 벌을 받아야 할 당사자들에게 태연히 묻기만 했다.
“레나 루벨은 어디 있지?”
공작들이 침묵하자 니힐이 고개를 기울이며 레나를 찾았다. 누굴 문책할지 정한 모양이었다. 황제가 정했으면 돌이킬 수 없다. 그걸 아는 남부공은 별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남부의 대리인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병상에 있습니다.”
“왜?”
남부공의 보고에 니힐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궁을 못 지켰는데 왜 누워 있지?”
니힐의 물음에 남부공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모든 게 북부의 탓이라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부공은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니힐은 정황에나 사연엔 관심 없다. 그가 원하는 건 깨끗하게 재단된 인과뿐. 성공도 실패도 불운도 함정에 빠진 것도 모두 각자의 책임이다. 남부공은 면피가 불가능한 걸 알고, 아직 누워 있는 레나에게 이 불똥이 튀지 않게 제 몸을 낮췄다.
“제 책임입니다. 부족한 자를 대리인으로 추대해 폐하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니힐은 그런 입바른 말에는 흥미가 없었다. 고뇌하던 남부공은 결국 체면을 버리고, 동부공과 북부공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모두 제 책임이니 부디 저를 벌하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명령하는 거야?”
니힐이 속삭이듯 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 하나로 끝내든 족속까지 멸하든 그건 내 마음인데.”
남부공은 결국 황제의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코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니힐은 남부공의 주제 넘는 청에 황좌에서 일어나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그러더니 엎드린 남부공의 머리에 발을 대며 속삭였다.
“이건 밟아 부숴달라고 내민 거니?”
“……통촉하여 주십시오.”
“싫어.”
니힐은 남부공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눌렀다. 천천히, 하지만 단호히. 남부공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지만 니힐의 발은 멈춤 없이 계속해서 내려갔다. 노인의 이마가 단단한 대리석에 압착되며 우두둑 소리가 났다. 머리가 터질 듯한 압박에 남부공은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윽……!”
강직한 노인의 입에서 결국 통성이 흘렀다. 그 소리에 린은 이를 악물고 갈등했다. 노인이 밟혀 죽는 걸 그저 지켜봐야 하는지, 아니면 구해야 하는지, 만약 구한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린이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는데, 니힐이 남부공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염려 마라, 네 권능은 더 쓸모 있는 아이에게 전해줄 테니.”
그건 사형선고였다. 결국 린이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폐하.”
린이 목소리를 내기 전에 뜻밖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비드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