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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다 똑같은 놈들 (70/208)

70화. 다 똑같은 놈들2020.12.31.

16562813436923.jpg“폐하.”

루비드가 니힐을 부른 것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특히 이우라는 눈을 부릅뜨며 동생을 쏘아봤다. 하지만 루비드는 여느 때처럼 뻔뻔한 얼굴이었다. 한편 니힐은 루비드가 익숙지 않은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중얼댔다.

16562813436929.jpg“북부공의 동생.”

16562813436923.jpg“할 말이 있습니다.”

루비드가 짧게 고했다. 니힐은 뭔가 싶어 쳐다보다가, 저 녀석이 심장을 가져온 걸 떠올리고 작게 끄덕였다.

16562813436929.jpg“해 봐.”

16562813436923.jpg“어제 히엠스의 심장을 꺼낸 건 남부공 대리입니다.”

루비드는 가감 없이 고백했다. 뜻밖의 폭로에 공작들은 물론, 니힐도 루비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니힐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남부공의 머리에서 발을 뗐다. 그러곤 남부공을 몰아붙일 때와 똑같은 투로 물었다.

16562813436929.jpg“그럼 너는 뭐 했어?”

16562813436923.jpg“왕관을 가져왔습니다.”

16562813436929.jpg“왕을 쓰러트린 건 레나 루벨인데 그걸 가져온 건 너다?”

니힐이 투명한 눈으로 되물었다. 그러더니 낮게 중얼댔다.

16562813436929.jpg“날 기만한 거니?”

16562813436923.jpg“기만이 아니고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루비드의 대답에 공작들은, 이우라와 린뿐만 아니라 아직 바닥에 머리를 댄 남부공마저도 당황했다. 하지만 루비드는 홀로 당당했다. 그는 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 쓰레기 같은 궁전 하나 무너진 게 뭐가 대수냐 하는 눈으로 니힐을 쳐다보고 있었다.

16562813465657.jpg‘대체 무슨 생각으로…….’

린은 당황을 삼키며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행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가로챌 수 있던 공을 레나에게 돌린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속셈인지 의심했으나, 애석하게도 루비드에게 속셈 따윈 없었다. 실은 내심 짜증이 나서,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 싶어서 저지르는 중이었다. 황제의 난폭한 성정을 알지만 루비드 본인도 눈치껏 남에게 숙이는 성미는 아니었다. 심지어 본인이 떳떳할 때는 더 그랬다. 지금까지 루비드는 공을 세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라 믿었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무덤에서 겪은 일이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실은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이 아주 형편없는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황제는 제가 쥐락펴락하는 인형들을 매우 하찮게 여긴다는 것.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왕자는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작작 좀 하라는 뜻으로 고하는 중이었다. 그 기색을 읽은 니힐이 조금 놀랍다는 듯 물었다.

16562813436929.jpg“너 살기 싫으니?”

루비드는 대답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이우라가 그를 걷어찼다.

16562813436923.jpg“컥!”

옆구리를 차인 루비드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루비드는 괴롭게 기침을 하더니, 숨이 돌아오자마자 이우라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16562813436923.jpg“너……!”

16562813465675.jpg“닥쳐라.”

루비드가 일어나 덤비려 하자 이우라는 겁 없는 동생의 어깨를 그대로 밟아버렸다. 루비드가 괴로워했지만 이우라는 전혀 봐주지 않고 그를 강하게 압박했다. 모두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니힐은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16562813436929.jpg“닥치는 걸로는 안 되지.”

니힐이 남부공을 뒤로한 채 루비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표정은 없었지만 이우라와 루비드는 느꼈다. 황제의 눈동자에 서린 냉혹함을. 그 눈이 남부공을 향하고 있을 땐 몰랐다. 하지만 마주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지금 누구 하나를 죽일 작정이었다.

16562813436929.jpg“네가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린 건지는 아니?”

니힐이 그렇게 말하며 루비드에게 천천히 손을 뻗을 때였다.

16562813465685.jpg“폐하.”

또 다른 목소리가 돌연 끼어들었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클라비스였다. 평소보다 집요한 니힐의 신경질에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클라비스가 단상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16562813465685.jpg“두엄의 궁이 무너져 심려가 크신 것을 압니다.”

16562813436929.jpg“글쎄, 저 애들은 모르는 것 같은데.”

니힐은 그렇게 중얼대며 공작들을 돌아보았다. 말마따나 공작들은 모르고 있었다. 황제가 그들을 불러놓고 짜증을 내는 이유가 뭔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폐허로 취급받지만, 니힐에게 두엄의 궁은 나름 특별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 궁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니힐은 공작 한 명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라도 분을 풀 생각이었다.

16562813465685.jpg“하지만 폐하, 대신 예정보다 일찍 히엠스 그라샤의 심장을 얻었고 몰려나온 망자들도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궁은 북부에서 이전과 같이 수복할 겁니다.”

클라비스가 그렇게 말하며 이우라를 돌아보았고, 이우라는 여전히 동생의 어깨를 밟은 채 대답했다.

16562813465675.jpg“명하시면 따르겠습니다.”

16562813465685.jpg“북부공도 저렇게 대답하니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심이.”

클라비스는 옅게 웃으며 간청했고, 니힐은 중재에 나선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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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길 잠깐. 클라비스의 설득이 통하기라도 한 건지, 니힐은 남부공과 루비드에게 흥미를 잃고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다시 황좌에 앉으며 명했다.

16562813436929.jpg“일어나.”

니힐의 명령에 이우라가 발을 치웠다. 그러자 루비드는 제 형의 다리를 팔로 뿌리치며 옷을 털고 일어났다. 남부공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로 선 그의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심하게 밟힌 탓에 눈앞에선 빛이 점멸했지만, 남부공은 내색하지 않고 황좌를 향해 곧게 섰다.

16562813436929.jpg“그 궁을 무너트린 죄는 무겁지만 심장을 거둔 공로를 인정하겠다.”

니힐이 황좌에 비스듬히 앉은 채 말했다.

16562813436929.jpg“그리고 자비를 베풀어 다시 알려주마.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왕 노릇을 하는지.”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제라기 보단 차라리 야생동물 같은 모습으로 니힐이 말을 이었다.

16562813436929.jpg“너희의 존재는 나의 존재로 성립된다. 너희의 힘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너희의 안위도 내가 뒤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너흰 내게 기생할 뿐 나를 보호하진 못하며, 내게 필요한 건 너희가 아니라 내 권능을 빌려 일할 종이다. 기왕의 방식으로 나와 가깝게 피를 나눈 자를 택했으나 대를 거듭해 그 또한 무색해진 터.”

니힐의 푸르고 투명한 시선이 공작들의 얼굴을 하나씩 담았다. 니힐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듣더라도 곧 잊었다. 방향으로 지칭해도 충분하기에 굳이 기억하지 않았다. 니힐이 사는 동안 저들은 곧 사라지고 대신 같은 옷을 입은 다른 이가 저 자리에 서게 될 터. 니힐에게 저들은 계절마다 바뀌는 실내 장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지금 니힐이 하는 말은 그야말로 자비였다.

16562813436929.jpg“그러니 쓸모를 보여라. 내가 너희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도록.”

그 말을 끝으로 니힐은 황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했다. 하지만 공작들은 황제가 떠난 후에도 그 자리에서 미동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각기 다른 감정을 견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적막을 깨트린 건 이번에도 역시 클라비스였다.

16562813465685.jpg“다행히 잘 넘겼네요. 우리 폐하께선 자비롭기도 하시지.”

클라비스의 농담에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고 누군가는 한숨을 삼켰다. 분통을 터트리는 놈도 있었다. 루비드였다. 루비드는 매서운 눈으로 옆에 선 제 형을 쏘아보더니, 이내 알현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요란한 문소리에 남부공의 표정은 더더욱 침통해졌다. 젊은이들 앞이라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길거리의 쓰레기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황제의 무책임함에는 이미 질릴 대로 질린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바닥이 더 있었다. 군주로서 신하를 처벌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원한을 품은 신하가 언제 반역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힐은 규범이나 예법뿐만 아니라 군신의 규율에서도 자유로웠다. 집 지키는 개도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을 텐데, 남부공은 자신의 처지가 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에 고통을 느꼈다. 이마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 . . 하지만 남부공의 수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처소로 돌아와 상처를 치료하고 어수선한 마음을 겨우 다스리던 중이었다. 대뜸 황제가 남부로 커다란 선물을 보냈다.

1656281351928.jpg“이게 뭐지?”

16562813519287.jpg“폐하께서 하사하셨습니다.”

남부공은 입을 꾹 다물고 눈앞의 커다란 하사품을 바라보았다. 사각 틀에 벨벳 천이 덮여 내용물은 아직 알 수 없었으나, 크기가 상당해 보통 물건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남부공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고, 그에 선물을 가져온 시종이 천을 걷었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드레스였다. 금실과 보석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그 드레스는 문외한의 눈에도 대단히 훌륭해 보였다. 뜻밖의 선물에 남부공이 의아해하자, 시종은 어두운 얼굴로 고했다.

16562813519287.jpg“내일 저녁 승전제를 베풀기로 하셨습니다.”

1656281351928.jpg“그래서?”

16562813519287.jpg“그래서 이 옷을 레나 경에게 하사하셨습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드레스를 하사하다니. 남부공이 불안한 눈으로 그 드레스를 바라보자, 시종이 나직이 덧붙였다.

16562813519287.jpg“친히 옷을 하사하니 내일 반드시 입고 나오라 하셨습니다.”

시종이 전한 말에 남부공의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당황하는 남부공에게 시종이 쐐기를 박았다.

16562813519287.jpg“황명입니다.”

그 말은 즉 내일까지 깨어나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정녕 개처럼 취급했다. 그 진저리나는 사실에, 그리고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찾아온 위기에 남부공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 바깥에서 황제의 횡포가 한창일 때, 의식 속의 레나는 영문도 모른 채 황제를 욕하고 있었다.

16562813519315.jpg“나한텐 다 똑같은 놈이에요, 너희들은.”

16562813519287.jpg“똑같은 놈?”

히엠스가 레나의 발언을 재미있다는 듯 따라 했다. 왜 황제를 따르는지, 황제가 옳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히엠스에겐 퍽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16562813519287.jpg“똑같다는 건 어떤 의미죠?”

히엠스의 물음에 레나는 말없이 생긋 웃었다. 아무렴 숙녀복을 입고 거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나가 침묵으로 답하자 히엠스도 알만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상황이 다소 묘해졌다. 레나는 태연을 가장한 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고민했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히엠스가 갑자기 나타나 차를 대접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이유가 뭘까? 혹시 이것도 함정의 일부인가? 레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히엠스의 속내를 의심했다. 하지만 정작 히엠스의 의도는 제법 순수했다.

16562813519287.jpg“내가 그대를 오해했나 봅니다.”

16562813519315.jpg“오해요?”

16562813519287.jpg“그대가 우리를 쳐서 황제의 환심을 사려는 줄 알았거든요. 그대는 아직 살아 있으니, 황제의 곁에 있으면 풍요로울 테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요.”

가당치도 않은 오해에 레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히엠스는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16562813519287.jpg“실은 그대의 기억을 훔쳐보려고 했습니다.”

연신 웃던 레나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그에 히엠스는 재빨리 변명했다.

16562813519287.jpg“안심하세요, 실패했으니까. 기억의 통로에 뱀 왕을 죽이던 시절의 그대가 버티고 있더군요.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16562813519315.jpg“몰랐네요, 나한테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줄은.”

16562813519287.jpg“많을 수밖에요.”

레나가 곱지 않은 투로 말하자 히엠스는 더 자세를 낮추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더니 은근히 속삭였다.

16562813519287.jpg“나는 그대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16562813519315.jpg“왜요?”

16562813519287.jpg“이해되지 않으니까.”

좋게 말하면 원론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대답에 레나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러자 히엠스가 친절히 부연했다.

16562813519287.jpg“그대는 스스로 왕이 아니라 하지만 지금 그대가 가진 힘과 능력은 분명 왕의 것. 나는 그것이 왜 허락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왕관을 쓸 자격도 자질도 없던 그대가, 대체 왜 우리와 동등해졌는지 말입니다.”

레나는 히엠스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더니 푸념하듯 대답했다.

16562813519315.jpg“말해본들 이해 못 할 거예요.”

16562813519287.jpg“왜죠?”

16562813519315.jpg“그걸 묻고 있으니까요.”

별로 따라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아까 히엠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엔 히엠스의 고개가 기울어졌고, 레나는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덧붙였다.

16562813519315.jpg“내가 왜 당신들과 동등해졌는지 궁금하다고요. 미안하지만 질문부터 틀렸어요.”

16562813519287.jpg“틀렸다 함은?”

16562813519315.jpg“우린 처음부터 동등했어요. 당신들이 그걸 간과했을 뿐이지.”

당신들은 모른다. 공작들을 장기 말처럼 쓰고 버리는 니힐 그라샤도, 여자를 불태운 히엠스 그라샤도, 뒤늦게 후회하는 첼레스테도,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나 사자를 가둔 왕도. 그리고 레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카르도 루벨 후작 각하께서도. 그들은 하나같이 모른다. 자신들이 이용하고 버린 존재가 어떤 존재들인지, 버림받고 짓밟힌 그들이 무엇이 되었는지. 그걸 까맣게 모르는 왕의 얼굴이 가증스럽고도 가련해, 레나는 혼잣말하며 웃었다.

16562813519315.jpg“정말이지, 누가 똑같은 놈들 아니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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