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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역광 (79/208)

79화. 역광2021.02.01.

역광을 받는 등이 무섭도록 어두웠다. 창가를 향해 섰을 뿐인데 이우라 플레누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그는 제왕이었다. 고결한 혈통과 견고한 입지, 그리고 단단한 성정을 지닌 태생적 왕. 미쳐버린 폭군의 그림자에 가려진 비운의 왕. 그럼에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존재감을 드러내는 완성된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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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법이자 선고. 그것은 날고 긴다는 루벨 후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6562815306778.jpg“남부의 기사들을 매수한 게 경인가?”

이우라의 서릿발 같은 물음에 루벨 후작은 암담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16562815306783.jpg“주제넘었습니다.”

16562815306778.jpg“무덤에서 망자를 유인해서 두엄의 궁까지 끌고 온 건?”

16562815306783.jpg“……제가 한 일이 맞습니다.”

후작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우라가 이렇게 묻는 건 이미 다른 증거나 진술을 모두 확보했다는 뜻이기에, 섣부른 변명은 안 하는 것만 못했다. 후작의 자백에 이우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15306778.jpg“경의 가족사에 관여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지나쳤다.”

후작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었다. 애당초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계획했다. 예를 들자면 남부의 이빨 빠진 호랑이의 눈을 피해 그의 기사들을 매수한다든지, 두엄의 궁으로 망자들을 조금 끌어들여 경계 임무 중인 남부를 문책받게 한다든지. 그 정도는 설령 틀어져도 후작이 자기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두엄의 궁이 무너지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망자가 군대 단위로 몰려온 것도 그에겐 뜻밖이었다. 게다가 두엄의 궁을 무너트린 게 루비드 플레누스라는 걸 떠올리면 사실 이 추궁은 부당했다. 제 모자란 동생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건데 그걸 내게 뒤집어씌우다니. 후작은 내심 억울했지만 눈치껏 입을 닫고 머리를 숙였다.

16562815306783.jpg“송구합니다.”

16562815306778.jpg“이 일은 내가 남부와 매듭짓겠다.”

16562815306783.jpg“그런…….”

16562815306778.jpg“퇴궁하고 근신하도록.”

이우라의 명령에 후작은 눈을 홉떴다. 지금 퇴궁하라는 건 일선에서 물러나라는 말과 같았다. 물러나라니, 여태 망나니 왕자의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 누군데. 저가 외면한 놈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사람구실하게 만든 게 누군데. 배신감과 함께 이후 벌어질 일들이 후작의 머릿속을 채웠다. 지금 뒤로 물러나게 되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정적들이 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특히나 레나 루벨에 대해서. 레나가 루벨의 성을 쓰며 활보하는데도 그 일이 루벨 후작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건 사람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괴물의 말은 모두 옳다. 힘없는 자는 그저 엎드려 복종할 뿐. 카르도 루벨이라는 괴물, 그리고 그가 등에 업은 이우라 플레누스라는 더 큰 괴물. 그 괴물들 앞에서 입을 놀릴 수 없어 침묵할 뿐, 귀족들은 뒤에선 이미 카르도 루벨과 레나 루벨의 관계에 대해 가루가 되도록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후작이 권세를 잃으면 그 소문도 둑이 무너지듯 범람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실컷 차오른 소문은 결국 진실에 닿기 마련. 궁지에 몰린 후작의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을 도로 삼키며 입을 더 꾹 닫았다. 이우라는 항변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변명이나 애걸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후작은 겸허히 대답했다.

16562815306783.jpg“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때 후작의 목소리엔 후회가 가득했다. 물론 연기였다. 그의 마음속에선 분노가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 . . 근신 명령을 받은 후작은 북부공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황궁의 출입문이 아니라 루비드 왕자의 처소였다.

16562815306783.jpg“내가 왔다고 전하게.”

후작은 문 앞에 선 기사를 통해 루비드에게 기별을 넣었다. 하지만 방 안에서 돌아온 답은 처참했다.

16562815334748.jpg“지금은 바쁘시니 나중에 오라고 하십니다.”

바쁘다고? 하는 일이라곤 놀고먹는 게 전부인 놈이? 후작은 어이가 없었지만 애써 품위를 지켰다.

16562815306783.jpg“……알겠네. 일정이 빌 때 다시 오지.”

원래는 일정이 있든 없든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그 옆에서 보좌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딴 식으로 날 내치다니. 그렇게 충성한 나를, 금수 취급이나 받던 널 돌봐준 나를. 이우라의 경질은 차라리 납득이 됐다. 하지만 루비드의 변심은 후작의 속을 형편없이 긁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걷던 후작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이우라야 그렇다 쳐도 루비드가 자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놈이 제 형의 말을 들을 리도 없고, 평소의 왕자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큰소리나 쳐야 맞다.

16562815306783.jpg‘뭐 때문이지?’

그럼에도 루비드 플레누스가 자신을 문전박대한 이유. 순간 후작의 뇌리에 어제 일이 떠올랐다. 어제 승전제에서 루비드는 레나와 춤을 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비드 왕자가 레나와 정답게 춤을 추다니. 그들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서로에게 샴페인을 퍼부으며 모욕하던 사이였다. 그건 이미 유명한 일이어서, 어제 두 사람의 모습은 후작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을 놀라게 했다.

16562815306783.jpg‘설마 무덤에 들어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거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16562815306783.jpg‘그럼 동부공과의 약혼은?’

어제 레나 루벨은 황제와 춤을 춘 후 동부공을 지나쳐 루비드 왕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동부공과는 그다음에 춤췄다. 후작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부공 대리 레나 루벨. 동부공과 약혼한 상태로 북부 왕자까지 손에 쥐었다? 동부공을 뒷전에 세워둘 만큼 길들여 놓고서? 북부 왕자는 상대가 동부공의 약혼녀인 걸 알면서도 순순히 춤을 추고? 루비드 플레누스와 리그난 아이테르너처럼 서로를 격렬히 싫어하는 사내들이 한 여자를 두고 사이좋게 춤춘다고? 후작은 머리가 지끈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젊은 남녀 간의 일이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상상을 하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후작은 객관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레나는 리그난 아이테르너에 이어 루비드 플레누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성립했다. 그리고 루비드는 이제껏 보필해온 자신을 버렸다. 왕자의 심경 변화에 레나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 리 없다.

16562815306783.jpg‘역시 아들보다는 딸인가.’

후작은 궁지에 몰린 와중에 한탄했다. 지금 숨통을 조이는 것이 원래는 자신이 쥐고 있던 패라는 사실이 새삼 아까웠다. 동시에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였다. 그래서 후작은 다시금 결심했다. 레나를 다시 집에 들여야겠다고. ***

16562815334832.jpg“괜찮겠어?”

왕자의 시큰둥한 옆얼굴로 나긋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16562815334832.jpg“후작을 저렇게 보내도.”

그렇게 속삭인 건 멀쩡한 소파를 두고 꼭 남이 앉은 소파 팔걸이에서 얼쩡대는 클라비스였다. 클라비스는 루비드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루비드와 몸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고 있었다. 루비드는 클라비스가 뒤에서 뭘 하는지 모르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16562815306783.jpg“참견 마.”

16562815334832.jpg“우리 루비드 군은 말도 참 예쁘게 하지.”

16562815306783.jpg“개소리 하지 말고, 넌 뭐 하러 온 건데?”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걸 그제야 눈치챘는지, 루비드가 신경질을 내며 클라비스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루비드의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대며 중얼댔다.

16562815334832.jpg“간만에 루비드 군하고 얘기 좀 할까 해서.”

16562815306783.jpg“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해.”

클라비스가 여우처럼 치근대자 루비드는 성가시다는 듯 채근했다. 왕자의 한결같은 태도에 클라비스가 짙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16562815334832.jpg“너 죽을 뻔한 거 알아?”

빨리 말하라고 한 건 본인이지만 막상 클라비스가 치고 들어오자 루비드는 짐짓 당황했다. 클라비스는 이틀 전, 루비드가 황제에게 말대꾸하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불편한 화제에 루비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시끄럽다거나 닥치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때 니힐을 말린 게 클라비스인 걸 아는 탓이었다. 대뜸 루비드를 걷어차고 밟아버린 이우라에 비하면, 그래놓고 나와서는 말 한마디 없이 그를 다시 무시한 빌어먹을 형에 비하면 클라비스에겐 상당한 빚을 진 셈이었다. 때문에 루비드는 별수 없이 얌전해졌고, 클라비스는 그런 루비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16562815334832.jpg“황제 앞에서 그러면 못 써. 한 번은 도와줬지만 두 번은 나도 장담 못 해. 루비드 군은 똑똑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16562815306783.jpg“……말 같지도 않은 트집을 잡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루비드의 반박에 클라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크게 웃더니 반달 모양 눈으로 말했다.

16562815334832.jpg“무슨 소리야, 트집 잡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해. 너도 이유 없이 트집 잡았잖아? 레나 경한테.”

루비드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바락 대들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신기해하며 되물었다.

16562815334832.jpg“마침 말 나온 김에, 레나 경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16562815306783.jpg“뭐가?”

16562815334832.jpg“어제 같이 춤췄잖아. 전처럼 끌려 다닌 건 아닌 것 같던데.”

16562815306783.jpg“봤으면서 뭘 물어봐, 그쪽에서 부탁해서 좀 어울려준 것뿐이야.”

루비드는 괜히 신경질을 냈고, 그 뻔한 반응에 클라비스의 눈은 가늘어졌다. 이렇게 티를 내서야 눈치를 안 채려 해도 안 챌 수가 없다.

16562815334832.jpg‘무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러니 왕자가 후작을 내쳤지. 수년간 옆에서 수발한 후작을 한 번에 날려버리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철없는 왕자를 길들이다니. 클라비스는 레나 루벨의 능력보다 그의 매력에 더 감탄했다. 그러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비드를 슬쩍 떠봤다.

16562815334832.jpg“잘 어울리던데.”

16562815306783.jpg“웃기지 마.”

루비드는 곧장 콧방귀를 꼈다. 안타깝게도 이 애송이는 레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클라비스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는데, 루비드가 문득 생각난 듯 되물었다.

16562815306783.jpg“너 히엠스 그라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16562815334832.jpg“히엠스 그라샤?”

클라비스가 되묻자 루비드는 제법 진지한 눈으로 끄덕였다.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16562815334832.jpg“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실까?”

16562815306783.jpg“알아, 몰라. 그것만 말해.”

16562815334832.jpg“당연히 모르지. 알잖아, 왕국 시절의 기록은 다 타버린 거.”

물론 거짓말이다. 모른다는 것도, 왕국 시절의 기록이 다 타버렸다는 것도. 하지만 루비드는 별수 없이 속았다. 루비드가 아닌 누구라도 속았을 것이다. 그라샤 왕국의 기록은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는 게 제국의 정설이자 상식이니까. 그래서 클라비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16562815334832.jpg“히엠스 그라샤가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16562815306783.jpg“너랑 똑같이 생겼어.”

루비드의 말에 클라비스는 놀란 척했다. 루비드는 어딘지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몰래 웃었다. 슬슬 때가 된 모양이다. 무덤의 비밀이 드러날수록 아이들이 진실을 원하게 될 것이다. 이제 천천히 알려줘야 하지만, 이 귀여운 금발 왕자님한테 맡기려니 영 불안하다. 진실을 가르쳐줘봤자 전처럼 황제 앞에서 짖으면 모든 게 끝장. 이 녀석은 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클라비스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 달게 웃었다. 마침 머릿속에 적당한 인물이 떠올랐다. *** 왕자에게 박대당한 후에도 루벨 후작은 여전히 황궁에 있었다. 그가 퇴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황궁 내의 교회였다.

16562815416799.jpg“왕자 저하께요?”

엔지는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권유에 짐짓 놀랐다. 그에 후작은 태연히 부연했다.

16562815306783.jpg“그래, 큰일을 치르고 피로하실 테니 네가 가서 말벗을 해드려라.”

후작은 임시방편으로 왕자에게 엔지를 보내기로 했다. 루비드 왕자는 난폭하지만 어린애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다. 게다가 엔지에겐 꽤 관대하기도 하니, 아들을 보내서 마음을 풀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예상도 못 한 단계에서 차질이 생겼다.

16562815416799.jpg“저, 아버지.”

늘 고분고분하던 아들이 그의 말에 토를 단 것이다.

16562815416799.jpg“만약 저하께서 알현을 거부하신 거라면 제가 가도 소용없을 거예요.”

16562815306783.jpg“무슨 말이냐?”

16562815416799.jpg“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한 일이요.”

엔지는 작심한 듯 고백했다. 두엄의 궁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낸 용기였다. 그에 루벨은 말을 멈추고 엔지를 바라보았다. 그로써 엔지가 마주한 건 생각보다 더 싸늘한 아버지의 시선이었다. 이건 엔지의 잘못이었다. 엔지는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더 정확히 말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후작도 여기서 엔지의 목을 졸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작은 엔지가 말한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건지 헤아리며 엔지를 쏘아보았고, 엔지는 난생처음 본 아버지의 살의에 저도 몰래 주춤했다. 그때 마침 응접실로 노크 소리가 울렸다.

16562815334748.jpg“엔지 사제님.”

16562815416799.jpg“아, 네! 사제님.”

엔지에겐 구원과도 같은 소리에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문이 열리며 사제 한 명이 들어왔고, 후작은 엔지가 자신과 면담 중인 걸 알면서도 끼어든 사제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젠 별 볼 일 없는 평귀족 출신 사제마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후작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16562815334748.jpg“추기경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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