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뱀과 금단2021.02.04.
동부공의 기분이 아침부터 저조하다. 평소보다 창백한 안색, 펴질 줄 모르는 미간, 낮게 깔린 목소리.
“내부의 불만이 더 큰 위협인 걸 왜 모르지? 병력 충원 논의는 의병제대자들의 처우가 결정된 후에 한다.”
“추기경에게 전달되는 보고를 전부 파악하라고 했을 텐데.”
“본토의 월말보고가 늦다. 부재중이면 더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무섭게 깐깐한 안건처리까지. 조례에 참석한 동부의 고위 귀족들은 군주의 심기불편을 일찌감치 깨닫고 몸을 사리기에 바빴다. 동부공은 안건을 가져온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조졌고, 귀족들은 하나같이 슬픈 눈으로 돌아섰다. 우리 젊은 군주가 아침댓바람부터 왜 지랄이신가 속으로 중얼대면서. 하지만 그건 순전히 가신들의 오해였다. 린은 언짢아서 날을 세우는 게 아니라 단지 피로한 거였다. 그리고 그걸 감추려고 더 철저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왜 이러지?’
조례를 마치고 혼자가 된 린은 긴장을 풀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몸이 무겁고 기분도 축 가라앉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하는 개인 단련도 건너뛰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시간을 내어 몸을 풀었는데,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고 심각한 일이었다. 그리고 린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가 답답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정말 이럴 때가 아니다. 린은 정신을 차리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돌연 현기증이 찾아와 그를 뒤흔들었다. 꼴사납게 휘청대길 몇 차례, 린은 결국 포기하고 소파에 몸을 늘어트렸다. 다행히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전날 레나의 의식 속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이다.
‘그뿐이야.’
린은 스스로를 위해 중얼댔다. 그래, 단지 그뿐이다. 그뿐이어야 한다. 좋아하는 여자가 쌀쌀맞게 굴었다고 이러면 너무 한심하니까. 린은 스스로의 못남을 경멸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정말 이럴 때가 아니라,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부공의 권능인 지배는 다른 공작들의 힘에 비하면 아주 얌전하다. 그래서 권능을 발현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 힘들다. 그런 이점 덕분에 린은 아무도 모르게 힘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펼쳐둔 권능이 레나의 의식에 접촉하며 상당히 어그러졌다. 눈을 감은 린은 자신의 지배력이 느슨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놈들이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린은 늘어진 지배력을 다시 조였다. 늘 그랬듯 놈들을 묶고, 가두고, 다스렸다. 그렇게 어긋난 부분을 다시 고치고 있을 때였다. 잠깐 괜찮다고 생각했던 머리가 다시 핑 돌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아…….”
린은 급작스러운 현기증에 당황했다. 실수했다. 좀 더 기다려야 했는데 마음이 앞서서……. 린은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몸은 무슨 수를 써도 멈출 수 없었다. 흐리게 떠진 린의 눈동자는 붉은 색이었다. 하지만 그 선연한 빛깔은 이내 사라졌고, 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화려한 집무실이었다.
“그래서요?”
그리고 그 가운데 앉은 건 성직자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화려한 남자였다.
“이틀 전 서부의 망자들이 또 술렁였습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엔 잠잠해졌다고 합니다만, 이게 무슨 조짐인지 알 수 없어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젠 정말 조치를 취해야…….”
“괜찮아졌다면서요. 그런데 무슨 조치?”
사제의 보고를 듣던 클라비스가 집무실 책상에 턱을 괴며 대답했다. 분명 심각한 이야기인데 클라비스의 태도는 여상히 가벼웠다. 그에 보고하던 사제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언했다.
“전하, 서부도 폐하의 영토이고 그 접경지에 사는 이들도 폐하의 백성입니다.”
“맞아요. 우린 다 폐하의 것이죠.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지만 클라비스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심지어 그는 뱀의 허물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폐하께선 무척 자비로우셔서, 자신의 소유가 살아 있든 죽었든 별로 개의치 않으신답니다.”
추기경이 새빨간 혀로 속살댄 말에 사제는 결국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가 뻣뻣이 굳어버리자 클라비스는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고, 결국 사제는 절망감만 짊어진 채 물러났다. 그 고위급 사제가 나가자 클라비스는 다시 맑게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기다렸지? 괜히 재미없는 얘길 듣게 했네.”
“아, 아닙니다. 전하.”
클라비스의 다정한 말에 소년이 떠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문도 모르고 추기경 앞으로 불려온 소년, 엔지 루벨은 조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 순진해 빠진 얼굴을 보며 클라비스가 짙게 웃었다.
“긴장 풀어,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아니면, 혹시 잘못한 거라도 있어?”
클라비스의 농에 엔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못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아버지가 떠올랐다. 혹시 아버지의 일을 문책하려고 부른 건가? 엔지가 바짝 긴장해서 눈치를 보자 클라비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농담이야, 괜찮으니까 편히 앉아.”
편히 앉으라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추기경의 명을 어길 수도 없어, 엔지는 필사적으로 편한 척했다. 클라비스는 그 가련한 모습에 다시 실소하더니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엔지 군은 역사에 조예가 깊던데, 누구한테 배운 거야?”
“어, 주, 주로 고서를 읽었습니다. 아버지 서재에서요.”
“훌륭하네. 저번엔 깜짝 놀랐어. 설마 첼레스테를 알고 있을 줄은. 나도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인데 말이야.”
엔지는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고, 클라비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사람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 엔지 군.”
“그건,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맞아,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지. 인간은 한결 같아서 늘 같은 잘못을 해. 그러니 역사를 배워야 하지. 그래야 자신들이 얼마나 미천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알 수 있으니까.”
클라비스의 날카로운 말에 엔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웃어.”
“아……. 하하.”
엔지는 마지못해 웃었다. 고역이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엔지의 마른 웃음에 만족한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어느 때보다 과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엔지 군을 부른 건 그것 때문이야.”
“네?”
“조사단을 꾸리려고 해. 무덤을 정복하려면 나머지 왕들의 이름도 알아내야 하니까. 거기에 엔지 군이 힘을 보태줬으면 해.”
“저, 저 같은 게 어떻게…….”
엔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엔지는 그저 역사를 좋아하는, 그래서 조금 많은 것을 아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연구한 정식 학자나 사제님들에 비하면 지식의 수준도 사유의 깊이도 한없이 얕았다. 그런데 대뜸 조사에 힘을 보태달라니, 심지어 이렇게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하다니.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추기경이 직접 할 말도 아니었다. 엔지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추기경의 권유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클라비스가 웃으며 속삭였다.
“긴장할 필요 없어,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니까. 하고 싶으면 해. 진심이야.”
클라비스의 다정한 말에 엔지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잔뜩 얼어붙은 소년에게 추기경은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답답하지 않아?”
“네? 뭐가…….”
“어른들의 거짓말.”
상상도 못 한 말에 엔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경험해본 적 없어? 어른들이 뻔한 거짓말로 대충 넘기려 드는 거. 그거 어른들이 바보라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는 거지. 아이들은 어차피 진실을 찾지 못하는 걸.”
클라비스의 속삭임에 엔지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엔지의 동요를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그게 주도권을 가진 자와 아닌 자의 차이야. 결국 아는 사람은 모든 걸 알게 되고,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지.”
클라비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녹아내릴 듯 다정한 눈으로 뱀처럼 속삭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주 가끔 기회가 온다는 거야. 모르는 자로 남을지, 아는 자가 될지 선택할 기회가. 엔지 군은 어느 쪽이 되고 싶어?”
클라비스의 나긋한 물음에 엔지는 소름이 돋았다. 마치 뱀이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엔지는 직감적으로 클라비스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조사단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러지 않고서는 자신을 불러다 놓고 이런 얘기를 할 리 없었다. 그래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수상하고 무책임한 사람과 얽히면 안 된다고 이성이 외쳤다. 하지만 정작 엔지의 몸은 그 자리에 못 박혀, 클라비스를 하염없이 보고만 있었다. 아는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라니. 그건 소년이 언제나 갈망해오던 일이었다.
“저는…….”
엔지는 주저하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어째선지 어릴 적 누나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던 일이 떠올랐다. 진실에서 배제된 채 그저 어른들의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했던 나날. 그 답답한 심경을 클라비스는 소름끼치게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그 말이 엔지의 연약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뱀의 비늘 같은 게 살갗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엔 무섭도록 먹음직스러운 금단의 과일이 놓여 있었다.
“응? 엔지 군.”
클라비스의 채근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엔지는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소년의 대답에 클라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웃음을 보며 엔지는 설렘과 불안에 함께 사로잡혔다. 뱀에게 사로잡혀 금단의 사과를 받은 기분이었다.
***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그렇게 말하는 남부공의 앞엔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북부공이 보낸 친서였다. 그 안에는 나흘 전 두엄의 궁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유감 표시가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북부공과 한차례 으르렁댔던 남부공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루벨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더군.”
남부공이 레나에게 친서를 건네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니가 끼어들었다.
“그놈들은요?”
그놈들, 루벨에게 매수된 남부 기사들. 놈들에게 납치될 뻔했던 유니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묻자 남부공이 점잖게 답했다.
“군법으로 다스릴 걸세.”
본디 배신과 반역의 대가는 사형. 하지만 이번 일은 적에게 돌아섰다기보다는 같은 제국의 다른 귀족에게 줄을 댄 거라 사형까지 집행할 수는 없었다. 편의상 남부의 귀족이라 부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충성하는 대상은 황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의상의 분류는 실질적이기도 해서, 남부공은 처형에 준하는 수준으로 그들을 처분했다. 변절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남부의 영토에서 내쫓는 방식으로 말이다. 유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친서를 훑어 본 레나가 운을 뗐다.
“두엄의 궁에 있던 균열이 닫혔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논의 중일세. 다시 균열을 열자는 의견도 있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황제의 뜻대로 되겠지.”
남부공은 언짢은 목소리로 말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이마엔 황제에게 밟혀서 생긴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대비하고 있어야겠네요. 어떤 상황이 생기든.”
남부공은 묵묵히 끄덕이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동부공은 별말 없던가?”
“걱정되세요?”
“내가 왜!”
“아님 말지 왜 소리를 지른담?”
괜히 동부공의 상태를 궁금해하다가 기습당한 남부공은 벌컥 화를 냈고, 노인의 혈압을 성공적으로 상승시킨 유니는 흥흥대며 딴청을 피웠다. 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린에게 아직 제대로 인사를 못 한 걸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같이 춤까지 췄는데 정작 감사 인사를 안 했다.
‘어젠 엉망이었지.’
레나는 전날의 추태를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사실 처음 알았다. 자신이 동요하면 정색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어젠 몰라서 그 꼴이었지만 오늘은 좀 다르겠지. 레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밤이 오길 기다렸다. 밤에 린을 만나면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린은 아무리 기다려도 호숫가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