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자각 (81/208)

81화. 자각2021.02.08.

16562815729853.jpg―가세요, 저하. 보고 싶지 않아요.

16562815729853.jpg―용서하세요, 더는 모실 수가…….

16562815729853.jpg―어떻게 그런 짓을 해놓고……!

예쁜 모습으로 다가와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들은 그가 마음을 열면 어김없이 도망쳤다. 그의 일상에 자신들의 흔적을 잔뜩 채워놓고 정작 그가 다가가면 무서워하며 거부했다. 실연을 반복한 린은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곧 깨달았다. 남들처럼 사랑할 수 없는 걸 비로소 알게 된 후, 그는 잠깐이나마 곁에 있어준 여인들을 뒤에서 돌봐주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다른 연인을 만나고, 결혼해서 행복해지는 것을 돕고 지켜보았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16562815729853.jpg―더러운 매국노!

16562815729853.jpg―인두겁을 쓴 짐승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

16562815729853.jpg―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널……!

무섭게 원성을 쏟아내던 동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변두리 소국 출신의 포로들을 쓸어버리라고 명령했을 때, 린은 자신의 동족들을 서부로 보냈다. 그에 사람들은 린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제국의 개가 되려고 나라를 팔았다며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쏟아냈다. 그때도 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다.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다. 원한이 쌓이든, 오해가 쌓이든. 그건 전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 그렇게 견디다 피로해질 때면 나자 아이테르너를 떠올렸다. 당신도 이랬나? 내게 모든 것을 빼앗고 나서,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까? 대답 없는 물음 후에 이어지는 건 어김없는 자조뿐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어린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15729882.jpg―눈을 뜨면, 내가 널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16562815729886.jpg―어쩔 수 없지.

린은 자신의 대답에 힘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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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린은 흐린 눈으로 깨어났다.

16562815729886.jpg‘어떻게 된 거지?’

그는 자신이 왜 누워 있는지 멍하니 생각했다. 침소에 든 기억이 없다.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풀어진 지배력을 수습하던 아침이었다.

16562815729886.jpg‘……그대로 쓰러졌구나.’

린은 곧 상황을 이해했다. 권능을 펼치다가 결국 정신을 잃었나 보다. 그걸 데카가 보고 침실로 옮긴 모양이다.

16562815729886.jpg‘몇 시지?’

린은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이 어스름히 밝았다. 낮은 조도 위로 어린 것은 투명한 푸른빛이었다. 늦저녁이 아니라 새벽 같았다.

16562815729886.jpg“아…….”

때를 확인한 린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밤이 지나가버렸다. 레나를 만나야 하는 시간을 덧없이 놓쳐버렸다. 말도 없이 안 나갔는데 혹시 기다렸을까? 아니, 레나가 나오긴 했을까? 린은 연회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연회장에서 만난 레나를 종잡을 수 없었다. 본체만체하며 지나치더니 여느 때처럼 웃고, 상냥하게 대해준다 싶다가 또 갑자기 싸늘해졌다. 이쯤 되니 그냥 직접 물어볼까 싶기도 했다. 괜찮은 건지 싫은 건지 싫은데 참는 건지. 계속 눈치를 보는 게 괴로웠다. 린은 머리가 복잡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순간 이마에서 손수건이 툭 떨어졌다.

16562815729886.jpg‘뭐지?’

린은 얼굴에서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꽃무늬가 비쳐 보였다. 열이 나서 이마에 올려둔 모양인데, 그의 주변에 이런 진부한 간호를 할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데카를 비롯한 기사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손수건을 소지할 리도 없었다. 그래서 이게 뭔가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불 한 편에서 뜻밖의 무게가 느껴졌다. 동시에 상상도 못 한 소리가 들려왔다.

16562815729882.jpg“음…….”

나른한 목소리에 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놀라서 침대 옆을 돌아보았다. 웬 여자가 그의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자고 있었다. 린은 숨까지 멈추고 쿵쾅대는 심장을 붙잡았다. 설마 꿈인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새벽빛에 드러난 윤곽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린은 혼란에 빠져 그 여자, 레나 루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린이 바르작대며 움직이는 걸 느꼈는지 레나가 천천히 깨어났다. 자신의 팔을 베고 있던 레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린을 보며 하얗게 웃었다.

16562815729882.jpg“일어났어요?”

그 천연한 물음에 린은 얼이 빠져 중얼댔다.

16562815729886.jpg“왜, 뭐, 어?”

나름 애를 썼지만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레나는 린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16562815729882.jpg“데카 경이 알려줬어요. 린 씨가 쓰러졌다고.”

충신이로다. 린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15729886.jpg“쓸데없는 짓을…….”

16562815729882.jpg“좀 괜찮아요? 열이 심하던데.”

레나가 린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가만히 열을 쟀다.

16562815729882.jpg“아직 미열이 있네요. 아, 배고프진 않아요?”

린은 갑자기 상냥해진 레나가 얼떨떨했다. 아프다니까 다시 평소처럼 대해주는 건가? 아니, 아무리 아파도 싫어졌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동정인가? 린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며 물었다.

16562815729886.jpg“……언제부터 있었어?”

16562815729882.jpg“밤부터요.”

16562815729886.jpg“왜…….”

16562815729882.jpg“린 씨도 와줬잖아요. 제가 쓰러졌을 때요.”

아, 빚을 갚는 거구나. 린은 레나의 철저함에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빚진 건 철저히 갚는 성격이었지. 린은 자조하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물어볼까. 괜히 죄책감을 주진 않을까. 어쩌면 레나도 갈등하고 있을지 모른다. 도움을 받았는데 싫어하는 게 말이 되냐고, 스스로를 채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차라리 먼저 괜찮다고 해줄까? 이해한다고, 어쩔 수 없는 거 안다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나면 너무 힘들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린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레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길어지자 린을 향해 마주 웃던 레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레나는 조금 동요하는 듯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16562815729882.jpg“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네요.”

나름 자연스러운 말 돌리기였다. 하지만 예민한 린은 또 눈치채고 말았다. 레나가 방금 어색해하며 시선을 피했다는 걸. 연신 버림받는 기분에 린은 마음이 또 상했다. 하지만 애써 속내를 감추고 대답했다.

16562815729886.jpg“어차피 같은 방인데, 뭐.”

16562815729882.jpg“그래도요. 린 씨가 쓰는 방이라니 괜히 새삼스럽네요.”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린도 계속 누워 있기가 불편해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하지만 린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고, 발로 바닥을 딛기 무섭게 휘청하고 도로 쓰러졌다. 털썩 소리가 나자 레나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16562815729882.jpg“……뭐한 거예요?”

16562815729886.jpg“……그래도 노력했어.”

뜻밖의 재롱을 본 레나가 실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에 린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이쯤 되니 자길 놀리나 싶었다.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하나만 해주면 안 되냐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16562815729882.jpg“안 일어날 거예요?”

린이 손을 잡지 않자 레나가 채근했다. 그에 고민하던 린은 레나의 손을 외면하고 스스로 일어났다. 괜한 고집이었다. 혼자 일어난 그는 어김없이 비틀댔고, 레나가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그 후 이어진 참사는 꽤 낭만적이었다. 린은 레나가 잡아 세울 겨를도 없이 도로 쓰러졌고, 그를 잡아주려던 레나는 오히려 그에게 깔리고 말았다. 레나가 품 안으로 들어오자 린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침대를 짚는 팔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을 세우고 버티려니 꽤 힘들었다. 그래서 레나의 위에서 비키려던 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다시 푹 누워버렸다. 몸 아래서 레나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지금은 아무렴 좋았다. 그는 지쳐 있었고, 약해진 마음은 스스로 정한 선을 가뿐히 넘어버렸다. 아프니까 봐달라는 심정이었다.

16562815729882.jpg“린 씨?”

16562815729886.jpg“……힘들어.”

평소라면 사과부터 했을 텐데, 린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신음했다. 그 잠긴 목소리에 레나가 걱정스레 되물었다.

16562815729882.jpg“괜찮아요?”

16562815729886.jpg“아니.”

16562815729882.jpg“사람 부를까요?”

16562815729886.jpg“아니…….”

린은 연신 아니라고만 했다. 그래서 그의 밑에 깔린 레나의 심정도 점점 곤란해졌다. 평소의 린은 소심하게 귀여웠다. 이렇게 대놓고 귀엽게 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레나는 애써 차분히 말했다.

16562815729882.jpg“그럼 그만 일어날래요?”

16562815729886.jpg“……일으켜줘. 힘세잖아.”

이 자식 봐라? 레나는 자신에게 안긴 채 투정 부리는 린 때문에 잠깐 얼이 빠졌다. 말마따나 한 발로 번쩍 들어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치대는 린을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뭔가 평소와 달랐다. 고민하던 레나는 린의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한탄하듯 중얼댔다.

16562815729882.jpg“정말 몸이 안 좋나? 왜 이렇게 어린애가 됐지?”

레나의 웃음 섞인 혼잣말에 린이 낮게 신음했다.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레나는 더 웃으며 린을 토닥였다.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손길에 린은 차라리 안심했다. 그러길 얼마, 침묵이 길어지자 어색해진 레나가 다시 운을 뗐다.

16562815729882.jpg“무리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찾으러 와줘서.”

레나가 다정하게 인사했지만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 후,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 중얼댔다.

16562815729886.jpg“싫지 않아?”

16562815729882.jpg“뭐가요?”

16562815729886.jpg“……나.”

맥락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레나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엄중히 경고했다.

16562815729882.jpg“물지 마세요.”

16562815729886.jpg“안 물어…….”

린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린은 다시 심각해져서 속삭였다.

16562815729886.jpg“기분 나쁘잖아.”

16562815729882.jpg“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16562815729886.jpg“정말?”

16562815729882.jpg“정말.”

린이 레나의 어깨에 묻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한 뼘 거리에 놓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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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그를 마주 보는 레나의 눈에 혐오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린의 태도를 진심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 무구한 눈빛에 린이 비로소 담아둔 말을 꺼냈다.

16562815729886.jpg“……네 기억을 봤어.”

16562815729882.jpg“알아요.”

16562815729886.jpg“아무렇지도 않아?”

린의 물음에 레나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이었다. 그래서 린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16562815729886.jpg“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

16562815729882.jpg“누가요?”

16562815729886.jpg“레나 루벨이.”

레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길 한참, 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간신히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의식 속으로 구하러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억을 뒤지면서 뭔가를 만났던가, 어떤 위협을 당했던가. 레나는 린이 벌 받는 강아지마냥 소심해진 이유를 깨닫고 한숨 쉬듯 말했다.

16562815729882.jpg“그런 거 생각도 못 했어요.”

싫어하게 된다니. 린이 의식 단위로 접촉한 걸 알지만 싫다는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16562815729882.jpg‘어?’

린에게 해명하려던 레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싫어야 정상이다. 기억이 여과 없이 유출된 건 심각한 일이다. 실제로 레나는 루비드가 자신의 기억을 봤다고 할 때 은근슬쩍 날을 세웠었다. 그래놓고 정작 린에겐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다. 루비드보다 훨씬 많은 걸 봤을 텐데, 린이 직접 말하기 전까진 눈치도 못 챘다. 레나는 자신의 관대함에 당황했다. 레나가 말을 멈추자 해명을 기다리던 린이 도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15729886.jpg“그럼 왜 계속 피했어?”

16562815729882.jpg“네?”

16562815729886.jpg“날 불편해한 거 아니야?”

린의 물음에 레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피한 것도 불편해한 것도 사실이니까. 한편으로는 놀랐다. 린의 생각보다 빠른 눈치에, 여태 참다 뱉어낸 그의 한마디에. 마치 상처받은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그로써 레나는 그만 깨닫고 말았다. 린에 대한 것도, 스스로에 대한 것도.

16562815729882.jpg‘그랬구나.’

레나는 더 이상 모를 수 없는 사실에 대고 작게 탄식했다. 아, 그랬구나. 너는 날 좋아하는구나.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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