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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혹시 날 좋아해? (88/208)

88화. 혹시 날 좋아해?2021.03.04.

16562817185938.jpg“린 씨……?”

레나는 놀란 눈으로 린의 달처럼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16562817185938.jpg‘린 씨가 왜 여기에……?’

소리 없이 묻던 레나는 곧 떠올렸다. 아까 루벨 가의 저택으로 향하던 중 눈이 마주친 남자. 린을 닮은 사람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본인이었나? 레나는 갑자기 나타난 린 때문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간밤에 차갑게 돌아선 후 처음이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레나는 멍하니 굳어버렸고, 그사이 길 저편에 있던 린이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린이 레나에게 물었다.

16562817185948.jpg“괜찮아?”

평범하게 친절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16562817185938.jpg“네?”

16562817185948.jpg“다친 거야?”

린이 레나의 맨발을 보며 물었고, 레나는 자신이 어떤 꼴인지 퍼뜩 깨달았다. 레나는 발꿈치의 아픔도 잊고 서둘러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16562817185938.jpg‘하필 이런 때…….’

레나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린이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몸을 굽혔다.

16562817185948.jpg“왜 이러고 있어? 혼자야?”

곤혹스러운 레나와 달리 린은 스스럼이 없었다. 행동도 목소리도 아주 멀쩡했다. 그래서 레나는 더 당황했고, 린은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맞췄다. 짐짓 놀란 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16562817185938.jpg“집에 다녀왔어요.”

16562817185948.jpg“집?”

16562817185938.jpg“아버지가 초대해서…….”

레나는 말끝을 흐렸다. 린이 레나의 얼굴과 발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 납득했기 때문이다. 레나는 수치를 느끼며 입을 꼭 다물었다. 집에 다녀와서 정처 없이 떠돌다니, 상처받아 방황한다고 소문내는 꼴이었다. 레나는 제 모습이 궁상맞게 느껴져 서둘러 말을 돌렸다.

16562817185938.jpg“린 씨는요?”

16562817185948.jpg“어?”

16562817185938.jpg“왜 그런 차림이에요? 시찰을 간다더니…….”

린은 레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남루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공식 업무 중인 동부공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레나가 옷차림을 지적하자 이번엔 린이 머뭇댔다. 그는 곤란한 듯 대답을 미루다가, 레나가 한 것처럼 슬쩍 말을 돌렸다.

16562817185948.jpg“혹시 누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

16562817185938.jpg“아뇨…….”

레나는 솔직히 대답하고 조금 후회했다. 그에게 대책 없는 모습을 들킨 게 민망했다. 무엇보다도 주워달라고 야옹대는 고양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는 뒤늦게 꾸민 듯 웃었다.

16562817185938.jpg“혼자 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16562817185948.jpg“걸어서 가려고?”

하지만 린은 좀처럼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레나가 알아서 하겠다고 재차 말하려 할 때였다.

16562817185948.jpg“따라 와.”

린이 한발 먼저 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레나가 린을 따라 여관에 들어가는 것도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린은 대로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급 여관에 투숙 중이었다. 레나는 별수 없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린은 이번에도 오갈 곳 없는 레나에게 선뜻 방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전처럼 침대까지 양보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배인에게 마차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조금 긴장했던 레나는 마음을 놓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게 편치는 않지만, 잠깐이라면 못 견딜 일도 아니었다.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마냥 입을 다물 수는 없어 레나가 먼저 운을 뗐다.

16562817185938.jpg“제가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별생각 없이 던진, 솔직하게 궁금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린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16562817185948.jpg“몰랐는데…….”

16562817185938.jpg“네?”

16562817185948.jpg“너인 줄 몰랐어. 그냥 밤길에 혼자 있는 게 위험해 보여서 가본 거야.”

이번엔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했던 레나는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16562817185938.jpg‘괜히 물어봤어.’

레나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니, 당연히 날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우연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큰데!

16562817185938.jpg“아, 우연, 이었군요.”

레나는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다행히 안색이 잘 변하지 않는 체질이라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16562817185938.jpg“린 씨답네요.”

그리고 덧붙인 말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레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해 보여서 가봤다니, 생각해보면 레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린은 그런 이유로 움직였다. 레나는 이 한결같은 사람을 기특하게 생각하다가 돌연 입가에서 웃음을 지웠다.

16562817185948.jpg“왜?”

16562817185938.jpg“……아뇨.”

린이 레나의 안색이 어두운 걸 보고 까닭을 물었다. 하지만 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상상하고 말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도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걸. 다른 숙녀가 그에게 도움을 받고, 그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레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고 그 후엔 자괴감을 느꼈다. 선을 긋고 밀어낸 게 누군데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고 있다. 레나는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며 일부러 밝게 말했다.

16562817185938.jpg“황궁 근처라 그런지 이 주변은 치안이 좋던데요? 밤중이어도 별로 위험할 것 같지 않아요.”

16562817185948.jpg“그래도.”

16562817185938.jpg“네?”

16562817185948.jpg“누가 잡아가면 어떡해.”

미쳤나 봐. 과하다 못해 낯간지럽기까지 한 걱정에 레나는 기가 막혀서 린을 쳐다봤다. 이걸 어떻게 받아쳐야 하나 고민하는데,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온 여관의 직원이었다.

16562817185948.jpg“식사 못 했지?”

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덕분에 레나는 또 한 번 대답이 궁해졌다. 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레나가 후작과 마주 앉아 무언가를 느긋하게 먹을 리 없다는 걸. 연이어 당황스럽지만 여기서 빼는 것도 이상해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테이블에 샌드위치와 수프, 절인 과일 따위를 내려놓고 눈짓했다. 와서 먹으라는 뜻이었다. 레나는 잠자코 따르면서도 내심 고민스러웠다. 어젯밤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린의 생각이 궁금했다. 혹시 어제 내가 한 말을 이해 못 했나?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받아들였나……?

16562817185948.jpg“후작을 만난 건 어땠어?”

샌드위치 앞에서 골몰하던 레나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일순간 마주친 린의 얼굴은 역시 평온했다. 이래저래 속 시끄러운 레나와 달리 그의 두 눈은 밤처럼 고요할 따름이었다. 레나는 그게 조금 야속해 짓궂게 받아쳤다.

16562817185938.jpg“린 씨는 저한테 정말 관심이 많은가 봐요.”

16562817185948.jpg“그야 동맹이니까.”

안 하는 만 못한 짓이었다. 돌아온 대답에 레나는 오히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레나는 다시 적당한 대답을 찾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모든 게 버거웠다. 평소처럼 여유만만하게 굴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게다가 레나를 지치게 만든 당사자는 아무 악의 없이, 오늘도 눈앞에서 예쁘다.

16562817185938.jpg“……엉망이었어요. 생각보다 더.”

결국 레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중얼댔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16562817185948.jpg“집으로 초대한 거면 화해할 의도였을 텐데.”

16562817185938.jpg“맞아요. 시작은 그런 분위기였는데 입장이 너무 달라서 결국 틀어졌어요.”

16562817185948.jpg“그래서 실망했어?”

16562817185938.jpg“아뇨. 아버지에 대해선 굳이 놀랄 것도 실망할 것도 없어요. 다만…….”

16562817185948.jpg“다만?”

레나가 말끝을 흐리자 린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의 차분한 기다림에 레나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말투도 태도도 딴판이지만 왠지 레지나가 생각났다. 그래서 주저하던 레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16562817185938.jpg“조금 혼란스러워졌어요. 내 감정이 과연 정당한가 싶어서.”

16562817185948.jpg“어떤 감정?”

16562817185938.jpg“그러니까, 아버지를 원망하는 거요.”

말로 정리하는 순간 레나는 비로소 자신의 기분을 이해했다. 오늘 레나는 평소와 달리 감정적이었다. 전날 린에게 선을 그은 일이 못내 마음에 남아서, 그래서 치미는 원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자 뒤이어 혼란이 찾아왔다.

16562817185938.jpg“오늘 아버지가 새삼 원망스러웠어요.”

16562817185948.jpg“왜?”

16562817185938.jpg“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레나 루벨의 인생은 평온했다. 고난을 모르는 삶. 고상한 가족, 겸손한 하인, 아침의 바이올린, 오후의 독서, 그리고 데뷔탕트를 위한 드레스로만 이루어진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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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가의 영애였던 레나는 사교계에 데뷔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근사한 신사와 춤추고 싶었다. 그것은 욕심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래할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대체 뭐가 원래대로지?

16562817185938.jpg“그런데, 애당초 그건 아버지에게 받은 거예요. 내가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들이요.”

레나는 쓰게 웃으며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밤길도 고요하다.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판자를 지붕삼아 비를 피하는 이들이 있는데, 여기엔 그 흔한 길고양이도 없다. 이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권인 걸 그 어릴 땐 몰랐다. 그러니 클라비스의 말도 틀린 게 없다. 넌 예쁜 옷 입고 케이크를 먹느라 아무것도 몰랐겠지. 그래, 몰랐다. 운 좋게 자작의 딸로 태어났으니까. 비록 수 백 명을 몰살시키고 자리를 꿰찬 가짜 자작이지만, 어쨌든 그의 딸로 태어나 퍽 유복하게 살았다. 내가 마땅히 누린 것은 당신이 죄를 지어서 내게 준 것. 당신의 죄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고상한 세계를 몰랐겠지. 그럼 당신이 준 것을 당신이 도로 가져갔다고 내가 원망하는 게 과연 정당할까?

16562817185938.jpg“어쩌면 우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러주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건.”

16562817185948.jpg“그래서?”

16562817185938.jpg“그래서…….”

고민하던 레나는 이내 자조하며 대답했다.

16562817185938.jpg“그냥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요.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는데,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우습네요.”

16562817185948.jpg“안 우스워.”

힘없이 중얼대는 레나에게 린이 대답했다.

16562817185948.jpg“계속 돌아보는 편이 고민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아.”

린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래서 레나는 조금 놀랐다.

16562817185948.jpg“그리고 정당하지 않은 감정은 없어. 정당하지 않은 표현이 있을 뿐이지.”

16562817185938.jpg“네……?”

16562817185948.jpg“원망스러우면 원망해. 다른 이유를 찾지 말고. 어쨌든 네가 느낀 감정이니까.”

린의 말은 단호하다 못해 엄한 면이 있었고, 때문에 레나는 아까보다 더 놀랐다. 린 씨가 오늘따라 귀엽지 않다. 이건 귀엽다기보다는……. 린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레나는 이 자리가 새삼 불편해졌다. 내리 한 고민들도 린의 대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머뭇대던 레나는 애꿎은 샌드위치를 쏘아보며 말했다.

16562817185938.jpg“그렇군요.”

16562817185948.jpg“그럴 거야.”

돌아온 목소리도 어쩐지 짓궂다. 이 사람 뭐지 싶어 힐끗 보니 린은 턱을 괸 채 레나를 보고 있었다. 이 사람 정말 뭐지? 린의 시선에 레나는 괜히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울컥했다.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레나는 주도권을 빼앗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6562817185938.jpg“……조언 감사해요. 린 씨는 정말 친절하네요.”

레나는 긴장한 티를 모두 감추며 여느 때처럼 곱게 웃어보였다. 그러곤 자그맣게 속삭였다.

16562817185938.jpg“이것도 동맹에게 베푸는 친절인 거죠?”

굳이 덧붙인 그 말은 네가 뭘 하든 동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너무 다정하게 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알아들었는지 린의 눈빛이 변했다. 그저 다정하던 눈에 약간의 의문, 약간의 고민, 그리고 약간의 결심이 담겼다. 그런 눈으로 린이 입을 열어 속삭였다.

16562817185948.jpg“단지 동맹이면 이렇게까지 안 할걸.”

그 순간 레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숨이 멎는 기분에 레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무슨 뜻이지? 왜 이런 말을? 레나는 린이 못 보게 마른침을 삼키다가 작심하고 되물었다.

16562817185938.jpg“……어제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

16562817185948.jpg“새겨들었어.”

내심 긴장한 레나와 달리 린의 대답은 쉬웠다. 심지어 그는 정말 편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16562817185948.jpg“아직 대답은 안 했고.”

레나의 단단한 심장이 또 한 번 추락했다. 대답은 안 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린도 가만히 마주 보았다.

16562817185948.jpg“하나만 물어볼게.”

그렇게 운을 뗀 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레나에게 나직이 물었다.

16562817185948.jpg“혹시 날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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