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물론 좋아해요2021.03.08.
‘함정인가?’
혹시 날 좋아하냐는 질문에 레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다. 이건 함정이다. 덫이야. 뭐지? 이 사람 대체 누구지? 레나는 더 없이 심각한 얼굴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레나는 이런 불한당 같은 놈 모른다. 예쁘고 귀여운 린 씨를 돌려줘. 레나는 두서없이 생각하며 표정을 차게 굳혔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길 좋아하냐고 묻는 린의 얼굴도 레나 못지않게 차가웠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 그 얼굴을 본 순간 불한당이라는 매도는 싹 사라지고 레나는 뒤늦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저런 표정으로…….’
레나는 처음이었다. 저토록 냉랭한 시선은, 린은 단 한 번도 레나를 이런 식으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놀라서 린을 쳐다보던 레나는 퍼뜩 떠올렸다. 그가 처음부터 했던 말, 자신에게 연애 감정을 갖지 말라던 엄중한 경고를. 혹시 내 마음을 눈치채고 추궁하려는 건가? 새로운 가능성이 레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혼란이 긴장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레나가 할 수 있는 건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린은, 그런 살벌한 눈빛의 레나 루벨을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표정이 또 굳었네.’
그 얼굴에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린은 열심히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화내겠지. 분명 화낼 거야. 레나는 자존심이 강하니까. 그래서 린은 최선을 다해 표정을 지켰다. 그래서 겉보기엔 냉랭해 보이지만 그의 속은 정 반대였다. 레나의 감이 맞았다. 린은 지금 파렴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감추는 레나를 미치도록 사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당황하면 정색하는 성격이었어.’
린은 대놓고 경계하는 레나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린이 원래 하려던 말은 ‘아직도 날 좋아해?’였다. 여기서 ‘아직도’라는 말을 눈치껏 뺀 건 레나가 감정을 자각한 지 얼마 안 된 걸 아는 탓이었다. 린은 레나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레나보다 먼저. 아는 게 당연했다. 그는 레나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온 사람이었다.
*** 무수한 기억, 방대한 정보, 광활하다 해도 좋을 인간의 의식 밑바닥. 린은 히엠스 그라샤의 저주로 쓰러진 레나를 깨우기 위해 레나의 내면에 접촉했고, 맨몸으로 사막을 헤매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다. 그것은 마치 영원한 형벌 같았다. 정신이 흐려지다 못해 영혼이 마모되는 감각이 그를 지배했고, 당연히 의문이 들었다. 아,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누굴 이렇게 찾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그땐 더 이상 레나가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조각조각 부서져 자신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만 가까스로 인지할 뿐. 그 마지막 인지마저 희미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이대로 부서져 영영 잠들기 전에. 린의 본능이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고, 린은 당초의 목적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했다. 멈추면 후회하지 않을까? 여기서 멈추면. 아, 애당초 내가 여기 왜 왔지? 누구였지? 내가 찾으러 온 사람. 그리고 나는, 누구지……? 린이 황망히 멈춰 설 때였다.
―괜찮아?
―경비대라고 무턱대고 따라가면 안 돼.
―데려다 줄게.
린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 하얀 얼굴. 이건…….
“나?”
린은 눈앞의 청년이 자기 자신인 걸 가까스로 알아챘다. 그러자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정말 따라올 줄 몰랐는데.
―난 동부 소속이야.
―당신이 남부공의 손님이라는 얘길 들었어.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그걸 보며 린의 흐려졌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이건 레나가 기억하는 나…….’
자신이 누군지 깨닫는 순간 정신도 차츰 돌아왔다.
―안전 장치. 내가 접근하면 찔러.
―나를 너무 좋아하지 마.
―나는 반려를 맞을 수 없어.
그리고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까지 눈앞에 펼쳐지자, 정신이 번쩍 들며 약속된 수치심이 몰려왔다.
“이건 왜…….”
린은 질색하며 자신의 추태를 멀리 밀어버렸다.
‘설마 저런 것만 골라서 따로 기억하는 건가?’
끔찍한 가설이다. 린은 부끄러움을 삼키며 새로 나타난 구역을 둘러보았다. 그곳엔 여러 순간의 린으로 가득했다.
‘나에 대한 기억을 따로 모아놨구나.’
지금까진 시간 순이나 사건별로 기억이 펼쳐졌다. 이렇게 인물을 중심으로 기억이 수집된 건 처음이었다. 린은 이런 식의 분류도 가능하구나 싶어 사방에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건 잠시 후였다.
‘이건 언제지?’
린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레나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가 동부의 기사들과 황궁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이 좀 멀다. 아무래도 복도 저편에서 잠시 스쳐본 모습 같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개전제 때의 모습, 추기경의 만찬 때의 모습, 그 외의 여러 순간들이 조각조각 남아 있었다. 그때마다 린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레나는 그 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그가 움직이면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그 무수한 순간들을 보며, 린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천천히 깨달았다.
‘나를 보고 있었어…….’
레나는 늘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이 마주치려 하면 서둘러 시치미를 뗐다. 레나는 그렇게 모은 사소한 조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린은 숨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벅찼다. 기뻤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다. 아, 그랬구나. 너는 날 좋아하는구나.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 그래서 경고한 거다.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그걸 깨닫는 순간 아까와 다른 의미로 걸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린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더 지체할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결과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내 사람이. . . . 린은 그때 이미 레나의 마음을 확신했다. 동시에 그 감정이 모조리 끊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는데 레나가 그를 지나치고 루비드의 손을 잡아서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찾아온 레나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린 씨를 싫어한 적 없어요. 그때, 린 씨가 구하러 와서 정말 기뻤어요.
―혹시라도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미리 말할게요. 그러니까, 연애 감정이 생기면 알리기로 한 것처럼요.
―그게 우리 약속이잖아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죠?
그 새침하고 변덕스러운 말은 린에게 오히려 정답을 알려줬다. 린은 레나의 마음이 여전한 걸 알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다. 레나도 자신처럼,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인 걸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
“……물론 좋아하죠.”
경계 어린 눈으로 린을 쳐다보던 레나가 비로소 답했다.
“린 씨에겐 늘 신세지고 있으니까요.”
그러곤 꾸민 듯 곱게 웃는다. 아무래도 레나는 또 시치미 떼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걸 본 린이 옅게 미소 지었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새침하다는 건지, 잘 들여다보면 레나야말로 정말 새침한 사람이었다.
“나도 그래.”
“네?”
“나도 좋아해.”
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했고, 덕분에 레나는 또 한 번 곤경에 처했다.
‘미쳤나 봐, 진짜.’
아까부터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차라리 때릴까? 아니, 대체 무슨 의도냐고. 진짜 때릴까?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왜 때려주고 싶게 구는 건데?
“린 씨, 혹시 어디 아파요?”
“안 아파. 멀쩡해.”
레나가 심각하게 묻자 린은 힘없이 웃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맺히자 레나는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다만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어.”
“……뭐가요?”
“가능성.”
긴장한 레나에게 린이 고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과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그 단아한 표현에 레나는 조용히 탄식을 삼켰다. 가능성이라니, 이 무슨 잔인한 표현인가. 미래가 정해진 자에게 가능성이라니. 가슴 정중앙에 여러 감정이 얽혔다. 그 순간 린이 아까 한 말이 생각났다. 정당하지 않은 감정은 없다. 그 말에 새삼 아파하며, 레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만 가볼게요.”
“어?”
“고마웠어요, 황궁에서 봐요.”
레나는 하려던 말을 깨끗이 잘라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린이 놀라서 마주 일어났지만 레나는 본 척도 안 하고 문을 열고 휭 나가 버렸다. 따라갈 수도 없었다. 레나가 여보란 듯 문을 쾅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레나는 린이 따라올세라 아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곤 여관 밖에 서 있는 마차에 올라타 겨우 숨을 돌렸다. 마차는 곧 출발했고, 드디어 안전하다고 느낀 레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도망쳐버렸다. 레나는 자신의 꼴이 참담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레나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한탄했다. 어떡해. 좋아하는 걸 들켰나 봐.
*** 깊은 밤, 등불의 주홍빛이 지하 서고를 밝혔다. 두엄의 궁 지하에 위치한 그 서고엔 고서가 가득했고, 엔지는 그것을 둘러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왕실의 자료는 다 소실 됐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남아 있을 줄이야. 엔지는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몇 시간 전, 클라비스가 엔지에게 웬 열쇠를 주었다.
―엔지 군에겐 기대하고 있으니 열심히 활약해 줘.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서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엔지는 반신반의하며 숨겨진 석실을 찾아냈고, 클라비스가 준 열쇠로 그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엔지를 기다린 것은,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고 전해지는 그라샤 왕국 시절의 기록들이었다.
‘소실된 게 아니라 황실에서 숨긴 거였어…….’
엔지는 백년도 더 된 책들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비밀을 아는 쪽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이건 좀 과하다. 갑자기 제국 단위의 비밀과 마주하게 되다니.
‘뭘 숨기려고 한 거지? 아니, 그 전에 누가 이런 짓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답은 뻔했다. 이걸 은폐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뿐이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황제 폐하의 비밀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의 솜털이 곤두섰다. 엔지의 가슴이 쿵쿵대며 뛰었다. 이제라도 돌아서서 나가야 하나 싶었다. 그 순간 엔지의 뇌리에 누나의 모습이 스쳤다. 왕가의 진실처럼 은폐되어 비밀이 된 누나. 눈앞에 있는데 부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내 누나. 아무것도 모른 채 구경만 하는 건 이제 싫어. 결국 엔지는 작심하고 성큼 나아갔다. 그러곤 주위의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금장으로 장식 된 커다란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책은 서가가 아니라 진열대에 홀로 놓여 있었다.
“이건…….”
엔지는 무심코 표지를 열어봤다가 눈을 홉떴다. 그건 그라샤 왕가의 계보였다. 그 커다란 책 안에는 초대 왕부터 시작해 각 왕들의 통치 기간, 업적, 그리고 자손과 친족들의 관계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라샤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기록이 불분명하다. 그럼 이 계보를 보면, 마지막 왕이 누군지 알면 적게나마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엔지는 흥분해서 책장을 넘겼다. 거의 끝으로 가자 히엠스 그라샤의 이름도 보였다. 거기서 몇 장을 더 넘기자 비로소 기록의 마지막 부분이 보였다. 그걸 본 엔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없다.
‘그럴 리가…….’
엔지는 놀라서 계보를 다시 찬찬히 훑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니힐 그라샤. 그 이름은 그라샤의 계보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엔지는 놀라서 마지막 왕의 이름을 확인했다. 오히려 거기 있는 건 엔지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엔지는 혼란을 삼키며, 그 낯선 이름을 어색하게 발음해 보았다.
“……레지나 그라샤.”
그때,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클라비스는 그리운 이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