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독사과2021.03.11.
엔지는 홀린 듯 계보를 읽어 내려갔다. 레지나 그라샤. 그라샤의 일곱 번째 왕. 18세에 왕위를 계승. 엔지는 혹시 레지나의 슬하에 니힐이 있을까 싶어 가족관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국서나 자녀는 없었다. 대신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엔지는 거기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 설핏 굳었다. 왕의 동생이자 1순위 왕위계승자로서 대공의 지위를 가진 자. 그의 이름은 클라비스 그라샤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 동명이인이겠지. 혼란이 연이어 찾아왔지만 엔지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썼다.
‘폐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어.’
그렇다고 공주라 불릴 만한 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엔지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레지나의 계보를 마저 읽었다. ―레지나 그라샤. 1790년 그라샤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 그 첫 문장부터 엔지는 울고 싶어졌다. 그가 알던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왕국이 멸망한 건 1784년인데 왜…….’
시간이 맞물리지 않는다. 고작 1, 2년도 아니고 무려 6년이나. 황제 폐하의 전기에선 1784년에 망자가 나타나 왕국이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정작 계보에서는 1790년에도 멀쩡하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일부러 은폐한 거야.’
엔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역사를 뒤트는 건 과거에도 종종 있던 일이다. 폭군들은 독재를 위해 그런 짓을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그게 그라샤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뭘 숨기려고 한 건지 알아내야 돼.’
그럼 수수께끼는 자연히 풀릴 것이다. 엔지는 다시 진실을 마주했다. ―유약한 왕자 대신 선왕에게 선택됨. ―즉위 다음날 공청회를 열어 성난 민심을 달래려 함. ―토지주와 대립 중인 무장 농민들에게 화해를 권고.
‘이게 무슨 말이지?’
성난 민심에 무장한 농민이라니.
“민란……?”
중얼대던 엔지는 문득 깨달았다. 사라진 6년이 무엇을 감추기 위함이었는지. 묘한 예감에 엔지는 레지나 그라샤 이전으로 책장을 넘겼다. 레지나 그라샤의 조부가 통치하던 시절, 정확히 1784년부터 이미 폭동과 소요가 시작되고 있었다. 원인은 가뭄으로 인한 식량부족. 아니, 그럼에도 가렴주구를 멈추지 않는 귀족들 때문이었다.
‘이걸 감추려고 한 거야.’
니힐의 전기에선 망자가 나타나기 직전의 그라샤가 풍요롭고 평화로웠다고 기술한다. 그 또한 거짓이었다. 그라샤는 광신도 히엠스 그라샤의 폭정으로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민심을 잃고 저무는 중이었다.
‘레지나는 그라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어.’
엔지는 이후 레지나의 행보를 보며 침음했다. 왕이 된 레지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바쁘게 다니며 문제를 수습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백성들의 불만은 끊이질 않았고 욕심 많은 귀족들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발 먼저 혁명이 시작된 동맹국에서는 그라샤에 원조를 요청했다. 분노한 민중에게 둘러싸여 수세에 몰린 동맹국의 왕이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다. 레지나는 깊이 고뇌했다. 자국민을 해치기 위해 타국에 군대를 요청하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지나는 그것을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귀족들이 동맹국을 도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동맹국은 레지나의 외가이기도 했다. 결국 레지나는 외삼촌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이웃 나라의 민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애당초 함정이기도 했다. 귀족들은 평민에게 친화적인 레지나를 싫어했고 그가 민심을 잃어 허수아비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파병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들의 계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라샤의 평민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앞에선 시민과 대중의 편인 척하더니 뒤에선 타국의 혁명을 힘으로 짓밟았다. 적게나마 피어나던 신뢰는 모두 깨지고, 여왕도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비방이 쏟아졌다. 여론이 기울자 귀족들도 기다렸다는 듯 선정적인 뜬소문으로 레지나를 헐뜯었다. 그렇게 여왕의 몰락이 시작됐다.
“1792년 7월, 폭도들이 왕궁을 포위…….”
혁명이 시작되었다.
“레지나 그라샤가 머리를 숙여 폭도들을 돌려보냄.”
국운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레지나 그라샤를 비방하는 전단이 회수됨.”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었고,
“1793년 1월, 폭도들이 의회와 법정을 장악함.”
그들은 필연적으로 희생양을 원했다.
“1793년 7월, 레지나 그라샤가 법정에 섬.”
엔지는 손을 떨며 빼곡히 적힌 계보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길고 지난한 재판 과정이 펼쳐졌다. 엔지는 그 행간에서 여왕이 겪었을 수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리던 엔지의 눈이 도중에 덜컥 멈췄다. 엔지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 ―1793년 10월. 레지나 그라샤, 단두대 앞에서 승하. 엔지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형장의 이슬이 된 그라샤의 마지막 왕, 목이 잘린 비운의 여왕.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이때, 황제 폐하의 목에 감긴 리본을 떠올리는 건 비정상일까……? 멍하니 생각하던 엔지의 뇌리에 황제의 전기 일부가 떠올랐다. 끝으로 ‘용서받지 못한 왕’이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가 너희를 지배하리라. 산 자는 죽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윽……!”
계보에 손을 대고 있던 엔지는 벌레가 기어오르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하지만 벌레 같은 건 없었다. 그를 몸서리치게 만든 건 다만 소름 끼치는 의혹, 이미 그를 사로잡은 확신이었다.
“말도 안 돼…….”
엔지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발밑이 꺼지는 것 같았다. 어지러움이 밀려오며 속이 뒤집혔고, 매스꺼움을 참지 못한 엔지는 결국 석실에서 뛰쳐나왔다. . . . 밖으로 나온 소년은 한참 동안 구역질을 했다. 머릿속으로 난입한 정보가 버거웠다. 그래서 연약한 몸은 애꿎은 속을 게워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모든 게 너무 잘 맞물렸다. 100년을 살았지만 늙지도 죽지도 않는 황제. 강박적으로 감싸서 가리는 목. 만약 니힐 황제가 레지나라면, 정말 목이 잘린 왕이라면……. 엔지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안다. 이 세상엔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망자라 부른다.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뒤이어 무서운 가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하는 무덤 정복은 대체 무슨 의미인 거지? 공작 저하들께선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어, 어떡하지? 알려야…….”
알려야 하나? 알려도 되나? 혼자 감당하긴 너무 버거운데, 이걸 누구에게……. 엔지가 덜덜 떨며 두려워할 때였다. 등 뒤에서 자박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돌아본 엔지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 추기경 클라비스였다.
“왜…….”
엔지는 그를 보자마자 서글피 탄식했다. 입을 여는 순간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엔지는 그걸 소매로 급히 닦아내고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런 걸 저한테 알려주시는 거죠?”
소년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하얗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여서.”
클라비스의 나긋한 음성에 엔지는 다시금 몸을 떨었다.
“어때?”
겁먹은 소년에게 클라비스가 되물었다.
“조금 더 알고 싶지 않아?”
그에 소년은 몸서리를 쳤다. 조금 더? 이미 죽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엔지는 지옥 한복판에 끌려나온 기분이었다. 딛고 선 것이 땅이 아니라 살얼음인 걸 깨달은 자의 심정은 그저 암담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뭐가 더 남았다니. 엔지는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클라비스의 한마디가 그를 또다시 사로잡았다.
“여기 있어. 네 누나에 대한 것도.”
엔지의 두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걸 본 클라비스가 웃으며 물었다.
“엔지 군, 누나를 좋아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이미 안다는 듯 속삭였다.
“나도 그래.”
*** 황제 니힐은 깊은 밤중에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설령 기억난다 해도 그게 이번 꿈인지 10년 전의 꿈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일일이 분별하기엔 지낸 나날이 너무 많았다. 니힐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목이 아팠다. 잘 때도 꽁꽁 싸맨 목에 통증이 번졌다. 니힐은 두 손으로 목을 조르듯 감싸고 있다가 목에 감긴 리본을 신경질적으로 뜯어냈다. 폭이 넓은 리본이 떨어지며 니힐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의 목에는 금이 가 있었다. 원통형 목을 완벽히 가로지른, 마치 깨진 도자기를 도로 이어붙인 듯한 금이었다. 니힐이 손끝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러자 금이 간 부분이 투둑 하고 부스러졌다. 시간을 역행하고 섭리를 거스른 대가가 몸에 나타나고 있었다. 세상의 법칙이 죽은 자를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어림없다. 목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지만 니힐은 고통을 삼켰다. 그러곤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인장 반지와 왕관을 그러쥐었다. 죽은 왕들의 심장을 손에 쥐자 목의 붕괴가 멈추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목을 휘감은 뚜렷한 균열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니힐은 또다시 그날로 돌아갔다. 1793년. 온세상이 나를 향해 소리치던 그날, 온갖 저주로 내 모든 것을 부정한 그날. 니힐의 시간은 그날 멈췄다. 그리고 희대의 폭군은 자신을 위해 세상마저 멈추게 했다. 그래, 어림없다. 아직이다. 나는 너희를 지배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 이른 아침이었다. 막 깨어난 유니는 눈앞의 광경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아가씨?”
“네.”
“……왜 벌써 깨어계시죠?”
유니의 물음에 레나가 말없이 웃었다. 그 모습이 어째 수척해 보여 유니는 합리적으로 의심했다.
“설마 안 주무셨어요?”
“아뇨, 잤어요. 조금 일찍 일어난 거예요.”
“조금 일찍이요?”
안 깨우면 한없이 주무시는 아가씨가 꼭두새벽에 일어나 조금 일찍 일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어제 아가씨는 늦게 들어왔다. 유니가 기다리다가 깜빡 잠들 정도였으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혹시 어제 집에 다녀온 것 때문에……?’
유니는 아가씨가 전날 어디 다녀왔는지 떠올리며 안색을 살폈다.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 피로해 보이는 걸 제외하면 레나의 표정은 꽤 밝았다. 그래서 유니는 점점 더 미궁에 빠졌다.
“아가씨,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럴 리가요.”
“수상하게 강한 부정이네요. 뭔데요, 어제 오는 길에 린 씨라도 만났어요?”
물론 농담이었다. 그런데 예상도 못 한 순간 아가씨의 미소가 경직되었다. 유니가 그걸 보고 어어어, 손가락질할 때였다.
“레나 경, 계십니까?”
문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레나와 유니는 놀라서 문 쪽을 돌아보았다. 갸웃대던 유니가 잠옷 바람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레나를 찾아온 건 황궁의 관리였다. 그가 문이 열리기 무섭게 고했다.
“이른 시간 죄송합니다, 추기경 저하께서 긴급하게 호출하셨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새벽에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급보요?”
“서부 균열에서 망자들이 몰려나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