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서쪽으로2021.03.15.
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봉화로 촘촘히 연결되어, 국경 밖의 소식도 반나절이면 황궁까지 전해졌다. 특히 망자의 활동이 여전히 활발한 서부 접경지역은 북부의 감시 아래 매일같이 상황이 전달되었다. 이른 새벽 공작들이 호출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제 자정, 서부 접경지에서 다섯 개의 불기둥이 일시에 피어올랐다.
“관측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망자 떼가 확인되었습니다.”
추기경과 공작들 앞에서 북부의 기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고했다.
“또한 확인된 망자는 뱀의 형상과 네발짐승의 형상이었습니다. 두 종류 이상의 망자가 함께 출몰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것참 큰일이네요.”
클라비스가 공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두 공작은 그 뻔뻔한 작자를 싸늘히 노려보았다. 회담장에 모인 공작은 셋이 아니라 둘 뿐이었다. 북부공 이우라 플레누스, 남부공 빌 알레스. 그리고 남부공의 대리인인 레나 루벨까지 자리를 채웠으나 어쩐 일로 동부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측근인 데카 모닐이 경직된 모습으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린 씨는 아직 밖에 있나?’
레나가 데카를 보며 생각하는데, 클라비스가 말을 이었다.
“저쪽에서도 작정을 한 모양이네요. 두엄의 궁이 무너질 때도 그렇고, 서쪽 통로를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마음은 없나 봐요.”
그 말에 레나와 이우라, 그리고 데카는 자연히 떠올렸다. 불과 며칠 전, 두엄의 궁의 균열에서 무섭게 쏟아져 나오던 망자들을. 클라비스의 말마따나 망자의 왕들도 넋 놓고 심장을 빼앗길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나?”
성격 급한 남부공이 클라비스를 채근했다.
“음, 지금으로선 차라리 잘 된 일이죠.”
“잘 됐다고?”
“폐하께서 성화시거든요. 두엄의 궁이 복구될 동안 무덤 정복은 어쩔 거냐고. 그러니 이참에 서부에 있는 통로로 왕들을 칠까 해요.”
클라비스의 관점은 참으로 한결같았다. 그는 망자들이 서부로 밀려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니힐의 비위를 맞출 생각뿐이었다.
“서부로 가죠.”
남부공의 가늘어진 시선을 마주하며 클라비스가 말했다.
“북부공의 진두로 망자로 토벌하고, 서부에서 무덤을 마저 정복하세요.”
그의 말은 정말 쉽고 가벼웠다. 그래서 공작들의 시선은 한층 더 싸늘해졌다.
. . . 소집이 끝난 직후, 레나는 남부공을 따라가기 전에 데카에게 먼저 다가갔다.
“경.”
레나가 조심히 부를 때 데카와 동부의 기사들은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남부공 대리이자 군주의 약혼녀인 레나 루벨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혹시 동부공 저하가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레나가 데카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잠행 중인 린의 위치를 모른다면 그가 어젯밤 묵은 여관의 주소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데카는 오히려 레나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저하께서는 간밤에 서부로 출발하셨습니다.”
“네?”
“상황을 한발 먼저 인지하여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데카가 목소리를 낮춰 고했다. 그러더니 주저하며 덧붙였다.
“너무 긴급히 가시느라 레나 경께는 따로 연락을 남기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레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데카는 독단과 독선을 서슴지 않는 저하께서 겨우 만난 배필에게 차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레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그럼 합류 장소는 정해졌나요?”
“아, 네. 서부 접경지역의 관문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물음에 답한 데카가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저하께서는 원래 혼자 움직이는 걸 선호하십니다. 모쪼록 오해는…….”
“오해라뇨. 그저 걱정될 따름이에요.”
레나는 살포시 웃으며 데카를 안심시켰다. 그러곤 돌아서며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데카는 모르겠지만 레나는 어젯밤 린을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 급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 밤중에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서부로 떠났다고? 외부에 혼자 있었으면서 대체 무슨 수로? 게다가 공작이나 되는 자가 혼자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니. 지금이 고작 선호도에 따라 움직일 때는 아닐 텐데? 레나는 수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안타까웠다. 어제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있을걸. 대화를 멈추지 말고 끝까지 이야기할걸. 오늘 새벽 레나는 일찍 일어났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리고 조금 가슴이 뛰었다. 전날 린이 한 말이, 표정과 목소리까지 생생히 떠오른 탓이었다. 린은 그걸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마음인 사람과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그래서 레나는 묻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없는 당신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나에게도 과연 가능성이라는 게 있는지. 어제는 당황해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지만, 오늘이든 내일이든 만나면 다시 진중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못 만나게 되었다. 만약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렇게 달아나지 않았을 텐데. 레나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너무 오래 실망하지는 않았다. 곧 만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서부에서 망자들이 몰려나왔다는 소식은 의외로 무난하게 전해졌다. 서쪽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보고는 이전부터 계속 전해지던 중이었고, 황궁에 있는 귀족들은 그 머나먼 곳의 형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조금 초조해진 건 서부와 영토가 맞닿은 북부 귀족들 정도였는데, 어차피 접경지엔 거대한 성벽이 있어 그들도 크게 걱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 미온적인 염려 속에서 기사단이 편성되었다. 망자들이 몰려나온 면적만큼 전투가 어려워지기에, 지휘관으로 임명된 이우라는 루비드와 레나를 자신과 함께 속공에 나설 선발대에 편성했다. 그들을 수행할 소수의 기사도 빠르게 구성되었고, 급보가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출병식까지 마쳤다. 그리고 그사이 린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레나는 이우라가 낯설었지만 선발대가 된 것엔 만족했다. 이대로 서부로 가면 린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렇게 출발을 앞뒀을 때였다.
“혹시 동부공을 만나면 전해줘, 레나 경. 너무 앞서가면 오해를 사기 쉽다고 말이야.”
황궁의 입구에서 이우라의 기사단을 축복하던 클라비스가 레나에게 다가와 빈정댔다. 그래서 레나도 곱게 웃으며 화답해주었다.
“동부의 일은 동부에 말씀하시죠.”
“쌀쌀맞긴.”
레나의 칼 같은 대답에 클라비스가 히죽댔다. 그러더니 더 나긋이 속삭였다.
“이 정도는 전해줘도 되잖아? 명색이 약혼녀인데. 아, 혹시 약혼자가 레나 경한테도 말없이 떠난 건 아니지?”
레나는 웃는 표정 그대로 울컥했다. 일부러 그런 건지 우연인지 클라비스는 레나의 아픈 구석을 잘도 건드렸다. 안 그래도 싸늘한 레나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지자 클라비스가 해맑게 웃었다.
“농담이야, 설마 그랬겠어? 명색이 연인인데. 가짜 연인이라면 또 모를까.”
‘이 인간…….’
혹시 뭘 알고 이러나? 레나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클라비스는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얄밉게 말을 돌렸다.
“자, 여러분이 망자를 토벌하는 동안 교회에서는 왕들의 이름을 조사할 거예요. 알아내는 대로 조속히 전달할 테니 그때까지 다들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크게 염려하진 않지만요.”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와 이우라, 그리고 루비드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멋대로 자리를 이탈한 동부공도 이미 출발했으니, 명실상부 최강의 전력들이 서부로 몰려가는 셈이었다. 클라비스는 그들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정말로 서부를 토벌해 버리면 조금 곤란한데.’
하지만 그는 더 하얗게 웃으며 속내와 전혀 다른 말로 인사했다.
“그럼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 지난 한 세기 동안 제국의 영토는 밖으로 한없이 팽창했다. 제국이 특히 공격적으로 영토를 늘려간 것은 건국 초기였고, 주요 대상은 인접 국가였다. 개중엔 마지막까지 저항한 나라도 있었고 스스로 굴복한 나라도 있었다. 서부는 그중에서 스스로 그라샤가 된 나라였다. 서부를 호령하던 시렌치움 왕조는 그라샤 왕조와 가까운 친인척 관계였고, 때문에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그라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서부엔 ‘진정한 제국민’이라는 기묘한 자부심이 있었으나 서부공이 서부를 버리고 달아나며 그 묘한 우월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그리고 현재의 서부는 6년 전, 레나가 지나칠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땐 굉장히 복잡한 도시였는데…….’
6년 전, 레나가 클라비스와 함께 서부 성으로 향할 때 서부는 아직 건재했다. 그래서 레나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서부의 도시들이 수도 못지않게 크고 활기차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고, 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지금은 도시마다 음울함만 감돌았다. 레나는 도시의 잿빛 풍경을 둘러보며 관문으로 다가갔다.
“아, 무슨 용무라도……?”
도시의 관문지기가 레나를 보고 공손히 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동부공도 이 관문을 통과했나요?”
“예, 이미 이틀 전에 넘어가셨습니다.”
이틀. 시간이 더 벌어졌다. 지난번 관문에선 하루 전이라고 했는데. 레나는 이우라가 이끄는 기사단에 편입해 서부 접경지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목요일에 출발해 오늘이 벌써 일요일. 사흘째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 동부공을 따라잡지 못했다.
“쉬지도 않고 말만 바꿔서 출발하셨습니다. 동행중인 기사의 말로는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우라의 기사단이 사흘 걸린 거리를 고작 이틀 만에 주파했다니. 몸이 부서져라 달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레나는 린이 왜 이토록 서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하고 걱정됐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무작정. 레나는 린의 소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경.”
“아, 경.”
그런데 막 돌아서는 레나를 관리자가 다시 불렀다.
“여기서 접경지역의 장벽까지는 이틀이 걸립니다. 앞서 간 동부공 저하도 거기서는 멈추실 겁니다.”
관리자가 덧붙인 말에 레나는 다시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틀 후면 린 씨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은 화요일, 레나의 생일이었다. 레나는 그 사실이 공교로워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생일이네.’
생일 같은 거 벌써 몇 년이나 잊고 지냈는데, 유니가 전해준 책갈피 때문에 다시 생각나고 말았다. 레나는 그게 반갑다기보다는 씁쓸했다. 레나는 그날, 생일 선물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며 아버지를 찾아갔던 자신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생일을 일부러 지웠는데, 하필 이때 그 날을 떠올리게 되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지만 레나는 괜한 생각이라며 저었다. 그때였다.
“볼일 끝났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건들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퍽 예쁘게 생긴 금발 청년이 괜한 시비를 걸어왔다.
“뭘 쳐다봐?”
그의 이름은 루비드 플레누스. 클라비스도 루벨 후작도 없는 와중에 형과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괜히 레나에게 집적대는, 관심이 정말 많이 필요한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