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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레나 루벨의 초연 (93/208)

93화. 레나 루벨의 초연2021.03.22.

레나가 찢어진 망토를 허망하게 바라볼 때, 이우라는 동부의 기사에게 물었다.

16562818238677.jpg“동부공이 혼자 앞서간 이유가 뭐지?”

16562818238689.jpg“그건…….”

16562818238677.jpg“고해라.”

이우라의 고압적인 다그침에 기사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16562818238689.jpg“서부 접경지는 북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먼저 상황을 선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기사의 대답에 루비드가 혀를 찼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동부공은 공을 세울 생각에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던 거다. 예상이 맞아떨어졌지만 루비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눈엣가시 같은 놈이긴 했지만, 동부공의 죽음은 그에게도 매우 뜻밖이었다.

16562818238677.jpg“동부공의 흔적은?”

16562818238689.jpg“찾지 못했습니다. 망토의 찢긴 형태로 보아 아마…….”

망자들이 시체를 끌고 간 모양입니다. 기사는 이렇게 추측했지만 그 뒷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멍하니 망토를 안고 있는 레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삼킨 뒷말을 추측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가파른 협곡에서 추락했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게다가 망자들이 따라붙었는데 어찌 살아남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공작이다. 배교자들이 그 특별한 기념거리를 놓칠 리 없었다. 장벽의 요새로 막 도착한 이들은 뜻밖의 비보에 침묵했다. 비록 적대하던 상대지만 그럼에도 제국의 공작이 그토록 덧없이 죽어나간 건 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특히 그의 약혼녀, 레나 루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넝마가 된 망토를 끌어안고서 망부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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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리고 아주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네 발과 인간의 얼굴을 지닌 괴물, 아니 망자였다. 망자는 산 자들이 감지할 수 없는 먼 곳에서 기척을 죽인 채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보다 훨씬 더 멀리에 있는, 까마귀 탈을 쓴 한 인간에게. *** 여장을 풀기 무섭게 이우라는 접경지의 병사들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16562818238689.jpg“망자들은 시렌치움 성 주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 수는 어젯밤 만 단위에 도달했고,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군대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이우라는 보고를 받으며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쏘아보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지금껏 산 자가 망자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조직력 때문이었다. 본능과 습성만으로 움직이는 망자들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고, 산 자들은 전략을 이용해 그들을 몰았다. 그런데 저들에게 지성과 조직력이 생긴다면 상황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한없이 불리해진다. 죽은 자들과 달리 산 자들은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자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전력은 시시각각 소비되는 셈인데 망자들은 그렇지 않다. 저들은 지치지도, 쉬지도 않는다.

16562818238677.jpg‘망자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럼 또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토벌전이 이어질 것이다. 그 지경이 되기 전에 대안이 필요했다.

16562818238677.jpg‘왕이 죽으면 망자도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었지.’

첫울음을 삼킨 왕이나 태움과 그을림의 왕이 토벌되었을 때, 다스림 받던 망자들도 모조리 사라진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차라리 왕을 먼저 치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16562818238677.jpg‘하지만 왕들을 치려면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우라가 조용히 궁리할 때였다.

16562818268598.jpg“조금 늦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한 숙녀가 이우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씻고 온 듯 머리가 조금 젖어 있는 레나 루벨이었다. 뜻밖의 등장에 이우라가 차게 말했다.

16562818238677.jpg“부르지 않았다.”

16562818268598.jpg“상황 보고라면 저도 당연히 들을 자격이 있죠.”

하지만 레나는 눈도 까딱하지 않고 반박했다.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이우라는 그게 조금 의외였다. 아까 망토를 안고 있을 땐 꽤 놀란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의 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했다. 레나는 이우라의 시선을 뒤로한 채 병사에게 보고를 다시 요청했고, 병사는 이우라에게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16562818268598.jpg“이런 상황이면 전면전은 무모하겠군요.”

레나의 판단은 이우라와 같았다. 그래서 레나의 멀쩡한 안색을 관찰하던 이우라도 천천히 운을 뗐다.

16562818238677.jpg“전면전이 무모하다면 대안이 있나?”

16562818268598.jpg“왕들을 먼저 토벌하면 저 망자들도 사라지겠죠.”

16562818238677.jpg“그러려면 먼저 왕들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이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16562818238677.jpg“경은 첫울음을 삼킨 왕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

모종의 추궁이었다. 첫 원정 직후, 레나는 어떻게 무덤을 정복했는지 설명하며 우연히 이름을 들었다고 둘러댔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당시엔 확인할 방법도 굳이 캐물을 당위성도 없어 어물쩍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해, 이우라는 레나에게 되물었다.

16562818238677.jpg“다른 왕들의 이름은, 알고 있나?”

16562818268598.jpg“모릅니다.”

이우라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레나도 그렇게 대답했다. 이우라가 의심하듯 바라보자, 레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18268598.jpg“만약 알았다면 이미 혼자서 다 정복했겠죠. 남들이 넘보기 전에.”

그 천연덕스러운 말에 이우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연기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아니, 그는 지금 레나 루벨이 보이는 태도 자체가 의아했다. 약혼자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필사적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멀쩡한 건지 이우라는 좀처럼 판단할 수 없었다. 그걸 알 수 없으니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했다.

16562818268598.jpg“하지만 조금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레나가 이우라의 의혹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16562818268598.jpg“왕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왕들의 외견은 본 적이 있으니까요.”

뜻밖의 폭로였다.

16562818268598.jpg“그 정보를 황궁에 남겨두고 왔어요. 그러니 추기경이 곧 왕들의 이름을 알아내서 전달할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레나는 탁자의 지도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지도의 깃발을 한 칸 앞으로 옮기며 말했다.

16562818268598.jpg“밖으로 나온 망자의 수를 줄여놔야 합니다.”

레나의 주장은 타당했다. 난관에 봉착했던 이우라의 입장에서는 반갑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기뻐하는 대신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16562818238677.jpg“경이 동부공과 약혼한 사이라고 들었다.”

바라볼 뿐 아니라 가감 없이 물었다.

16562818238677.jpg“그래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이우라의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나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놀라더니 이내 곱게 웃었다.

16562818268598.jpg“그런 배려를 받을 줄은 몰랐네요.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미룰 순 없죠.”

레나의 대답은 단정했다. 혼약자를 잃은 사람의 태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설령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 정략적인 관계였다 해도, 이토록 초연한 태도는 죽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우라는 레나의 심정도 행동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레나를 바라보던 이우라의 시선은 동부공을 바라볼 때와 비슷하게 차가워졌다. . . . 레나가 이우라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 루비드는 요새의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제 딴엔 우연히 마주친 척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디로 보나 레나를 기다린 모습이었다.

16562818268598.jpg“피곤할 텐데 왜 나와 있어요?”

루비드를 발견한 레나가 먼저 아는 체했다. 꽤 밝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안 그래도 뚱한 루비드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16562818323914.jpg“너 아무렇지도 않냐?”

16562818268598.jpg“뭐가요?”

레나의 시치미에 요령 없는 루비드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천하의 망나니지만 상당한 겁쟁이이기도 해서 사람이 죽었을 때까지 큰소리 칠 담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관심을 끄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레나에겐 무덤에서 진 빚이 있었고, 루비드는 빚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인상만 쓰고 있는데, 대답을 기다리던 레나가 웃으며 되물었다.

16562818268598.jpg“왜요, 제가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레나의 물음에 루비드는 말문이 더 막혔다.

16562818268598.jpg“하지만 저는 루비드 씨처럼 울보가 아니라서.”

16562818323914.jpg“뭐?”

레나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루비드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루비드가 화를 내자 레나는 농담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가볍게 묵례하고 그를 지나쳤다. 루비드는 거기에 휘말려 레나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혼자 중얼댔다.

16562818323914.jpg“뭐야, 저거…….”

  . . . 할 일을 마친 레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직후 레나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빈자리에 슬픔이나 허탈함이 차오른 것도 아니었다. 혼자가 된 레나의 얼굴은 차가웠다. 그저 차갑고 차가울 뿐이었다. *** 이른 새벽, 하늘이 쪽빛으로 물드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장벽의 서쪽은 여전히 황혼의 핏빛이다. 하늘을 찢는 거대한 균열 때문이었다. 하늘에 새겨진 십자형 균열이 마치 묘비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바스러진 도시는 하나하나가 무덤의 형상이다. 그 균열이 펼쳐진 곳은 과거 서부의 중심이었던 시렌치움 성 위였다. 그것만으로도 저 균열이 벌어졌을 때 어떤 아비규환이 펼쳐졌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저 균열은 5년 전, 서부공이었던 클라비스의 성에서 발생했다. 난데없는 재앙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도시 단위의 인구가 급히 이주했다. 제국의 100년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큰일이었지만, 그 일은 망자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이 그러하듯 원인 불명으로 취급되었다. 레나도 이 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무덤에서 레지나에게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지만 서부의 균열은 너무 최근 일이라 레지나도 그 경위를 다 알지 못했다. 다만 레나는 레지나에게 들어온 이야기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일도 그 미치광이의 짓일 거라고,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일을 하는 레지나의 남동생, 클라비스 그라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레나는 무감한 눈으로 6년 전과 전혀 달라진 서부를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그 새벽, 레나는 이우라를 비롯한 기사들과 장벽 너머를 정찰 중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은 요새의 망루에서 확인이 가능하기에, 그들은 도시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그곳엔 개척되지 않은 거대한 산림이 있었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그 내부를 확인할 수 없는 숲이었다. 만약 배교자들이 은신처를 만들었다면 저 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이우라는 기습을 피하고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침묵 속에서 숲속을 헤맬 때였다.

16562818238677.jpg“동부공과는 정략적인 관계였나?”

거의 반 시간가량 말없이 말을 몰던 이우라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16562818268598.jpg“그건 왜 물어보시죠?”

16562818238677.jpg“정략이라면 표적이 북부일 테니까.”

16562818268598.jpg“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오해하셨어요.”

16562818238677.jpg“오해?”

16562818268598.jpg“표적은 무덤의 왕들이었어요. 북부는 그다지…….”

안중에 없었는데. 레나는 웃는 눈으로 뒷말을 삼켰다. 그 모습이 도발하는 것도 같고, 장난을 치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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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18238677.jpg“경은 동부공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레나의 태도를 관찰하던 이우라가 낮게 중얼댔다. 그래서 레나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16562818268598.jpg“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관심은 저에 대한 건가요, 동부공에 대한 건가요?”

레나의 여상히 가벼운 태도에 이우라가 뭐라 대답하려 할 때였다.

16562818238689.jpg“저하,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앞쪽에서 수색하던 기사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뜻 이상할 게 없는 아름드리나무였는데, 잘 보니 나무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16562818238689.jpg“화살이 박힌 흔적입니다.”

16562818238677.jpg“……생긴 지 얼마 안 됐군.”

기사가 나무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자 톱밥 같은 나뭇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말마따나 화살을 박았다가 빼낸 흔적 같았다. 활을 쐈다는 건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의미. 기사들이 그 흔적을 중심으로 주위를 경계할 때였다. 바스락대는 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검은 뱀들이 어느새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망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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