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까마귀2021.03.25.
어느새 사방을 에워싼 뱀들이 술렁이며 맴돌고 있었다. 기사들은 레나와 이우라를 감싸며 엄습해온 망자들을 경계했다.
‘보통 망자는 아니야.’
레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확신했다. 평범한 망자는 저렇게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분명 머리가 따로 있다.
‘어느 쪽이지?’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직접 다스리는 건가? 아니면 배교자들에게 불려 나와 지배받고 있는 건가? 레나가 뱀들을 유심히 살필 때였다.
“비켜라.”
이우라가 검을 뽑으며 앞을 막아선 기사들에게 명했다. 기사들은 서둘러 말머리를 틀었고, 이우라는 벌어진 틈으로 단호히 참격을 날렸다. 핑!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참격이 뱀들을 향해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사사삭 기는 소리가 나더니 풀잎이 끊기고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졌다. 하지만 절단된 것 중에 망자는 없었고, 그걸 본 이우라의 단단한 이마가 구겨졌다.
‘피했나?’
아니, 읽힌 거다. 지성이 있는 게 확실한지, 한데 엉겨 있던 뱀들은 이우라가 나서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며 나무나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뱀들이 나무를 기어 올라가자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우거진 나무가 천장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위에서 뱀떼가 쏟아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림없는 짓을.”
이우라가 혀를 차며 검을 수평으로 들었다. 그러더니 세상을 양분할 기세로 다시 한번 참격을 날렸다. 이번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인다 싶더니, 그의 등 뒤를 제외한 전방의 나무가 모조리 잘려 나갔다. 우수수 가지 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나무가 쿵쿵대며 쓰러졌다. 그러자 숨어 있던 뱀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할 곳을 잃은 뱀들이 마치 쥐 떼처럼 어지럽게 뒤엉켰다. 이내 그것들은 몇 갈래의 큰 뱀이 되었고, 단숨에 이우라를 덮쳤다.
“저하!”
나무 덩쿨처럼 몸을 꼰 뱀들이 이우라가 탄 말을 물었다. 이우라의 흑마가 앞발을 들며 날뛰었고, 이우라는 뱀들이 말을 집어삼키기 전에 안장을 박차며 빠져나왔다. 이우라가 바닥을 짚을 겨를도 없이 뱀들이 다시 몰려왔다. 이우라는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그 새빨간 아가리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몰려드는 뱀들을 모조리 저며버렸다. 기사들은 물론, 레나조차 나설 기회가 없었다.
‘저 사람, 강해.’
레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루비드와 같은 권능을 지녔지만 두 사람의 저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성으로 빈약한 수준을 감추는 루비드와 달리, 이우라는 자신의 위치와 책임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을 수색해라.”
뱀들을 도륙한 이우라가 검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레나는 죽은 뱀들이 자욱한 안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며 잠시 위화감을 느꼈다.
‘뱀들이 죽을 때 소리가 들렸나?’
만약 배교자가 부른 망자라면 죽음의 충격이 불러낸 이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뱀들이 죽는 동안 절규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배교자가 아니라 뱀 왕의 망자들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아까 그 화살 자국은 사람이 있다는 흔적이었다. 레나가 이 명쾌하지 않은 상황을 골똘히 되짚을 때였다. 검을 거두던 이우라가 낯선 기척을 느끼고 희뿌연 안개 사이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눈앞을 온통 하얗게 물들인 안개 사이로 돌연 크고 검은 것이 덮쳐들었다. 그것은 몹시 빨랐다. 그저 무언가 번뜩인다 싶더니 이우라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큭!”
이우라가 이를 물며 검을 휘둘렀다. 불완전한 참격에 그를 덮친 것이 성큼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참격으로 흩어진 안개 사이로 그것이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안개도 차츰 걷혔고, 그와 함께 이우라를 덮친 것의 모습도 서서히 드러났다.
“까마귀……!”
이우라의 일갈에 까마귀 탈을 쓴 자가 빙긋 웃었다. 끼기긱. 이우라의 검과 까마귀의 비수가 마찰하며 비명을 질렀다. 여상히 웃는 까마귀와 달리 이우라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어깨의 상처가 방해였다.
“비켜요.”
그때였다. 잔잔한 음성과 함께 이우라의 등 뒤에서 레나가 치고 나왔다. 레나는 검을 휘둘러 까마귀의 몸을 크게 베어냈다. 까마귀의 몸에서 검은 깃털이 우수수 쏟아졌다. 하지만 단지 그뿐, 무언가를 베어낸 감촉은 없었다. 이우라를 몰아붙이던 까마귀는 성큼 물러나더니 레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 틈에 레나는 까마귀의 모습을 서둘러 살폈다. 까마귀. 서쪽의 지배자. 제국의 공적. 이우라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들과 달리, 레나는 이 기괴한 존재를 마주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첫인상만으로도 왜 그렇게 악명이 높은지 알 것 같았다. 까마귀의 탈을 쓰고 깃털로 몸을 부풀린 광대 같은 모습. 검정 일색이지만 까마귀의 부리 아래 드러난 턱은 분칠이라도 했는지 눈처럼 희다. 게다가 무슨 악취미인지 그 가운데 자리한 입술은 무섭도록 붉었다. 유독 거대한 체구는 남자 같고 짙게 칠한 입술은 여자 같은데, 상대를 향해 머금은 미소는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저토록 기괴한 모습으로 서부 접경지에 군림하는 존재, 북부를 비웃으며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온 존재. 그가 바로 까마귀였다.
관찰을 마친 레나는 침착하게 까마귀를 쫓았다. 레나의 검과 까마귀의 비수가 몇 차례 부딪혔다. 하지만 그때마다 울리는 건 찻잔을 부딪칠 때나 날 법한 작은 쨍강댐뿐이었다.
‘뭐지?’
레나는 허상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거추장스러운 깃털 때문에 움직임을 읽을 수가 없어서인지, 레나가 내지르는 공격이 족족 막혔다. 그래서 레나는 춤추듯 한 바퀴 돌아 까마귀의 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적의 품에 안긴 레나는, 그대로 까마귀의 팔뚝을 내리그었다. 아니, 그으려 했다. 챙강. 또 한 번 잔소리가 나며 레나의 공격이 덧없이 막혔다.
‘내 움직임을 읽고 있어?’
레나가 까마귀를 매섭게 쏘아보자 까마귀의 입술이 긴 호를 그렸다. 까마귀가 짙게 웃으며 레나를 밀쳐냈다. 그러더니 훌쩍 물러나며 품에서 무언가를 흩뿌렸다. 그건 마치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가루였다.
‘독?’
레나는 입을 막으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 틈에 까마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고 부싯돌 소리가 나더니 불꽃이 일었다. 흩뿌려진 분진과 유황 냄새를 풍기던 망자의 시체에 화염이 몰아쳤다. 분진폭발이었다.
“윽!”
레나는 갑자기 치솟는 열기에 얼굴을 가렸다. 퍼엉! 펑! 뭔가 터지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눈앞은 불바다였다.
‘까마귀는?’
레나는 다급히 까마귀를 찾았다. 하지만 눈앞에 가득한 건 새빨간 불길뿐, 그 검고 기괴한 존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거센 불길 때문에 수색대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몇 시간 만에 요새로 돌아왔다. 이우라의 부상은 그리 깊지 않았다. 길게 베이긴 했지만 얕아서, 며칠 회복하면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군의관이 상처를 꿰매는 동안 이우라가 기사에게 물었다.
“불길은 잡았나?”
“병사들이 강물을 퍼 나르고 있지만 아무래도 쉽게 진화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이 더 번지지 않게 벌목을 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말마따나 불길은 맹렬히 타올라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아직 이른 봄이다. 안 그래도 건조한 서부는 특히 가무는 시기였다. 그 와중에 까마귀가 지핀 불은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과 물오름 직전의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넓게 퍼졌고, 결국 숲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불 벽이 생기고 말았다. 이우라는 인상을 쓴 채 숲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이우라도 서방을 감시하며 까마귀를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멀리서 망자들을 거느리는 모습이었지, 이렇게 직접 대치한 적은 처음이었다. 경계심 많은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산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막아섰다.’
게다가 나무에 있던 화살 자국. 어슬렁대는 망자들 때문에 접근도 못 하던 숲인데, 거기에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화살이라니. 화살로는 고통을 모르는 망자를 상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가설은 하나다.
‘사냥.’
그래, 사냥이다. 숲에 있는 새나 토끼 따위를 잡으려고 활을 쏜 거다. 만약 배교자들이 그 숲에서 사냥 따위로 식량을 조달했다면,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포착되지 않았다면……. 이우라가 여러 가능성을 추리고 있을 때였다.
“저하!”
문밖을 지키던 기사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급히 보고했다.
“불길을 잡던 부대가 까마귀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난데없는 소식에 이우라는 눈을 홉떴다.
“루비드 왕자 저하가 대항했으나 많은 수의 망자들과 함께 공격해 결국 후퇴 중이라고 합니다.”
“피해는?”
“부상자의 수를 파악 중입니다. 전사자나 실종자는 없다고 합니다. 왕자 저하께서도 부상을 입으셨지만 경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막 전해진 보고에 이우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까마귀가 재차 모습을 드러내며 그 숲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 숲에 까마귀의 본거지가 있다.’
이우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 같은 시간, 레나는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불길 앞에서 놓친 까마귀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 거대한 체구, 빠른 움직임, 그리고…….
“레나 경,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레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동부의 기사들이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레나가 나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들 무슨 일로…….”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레나는 고개를 기울였고, 그 사이 기사는 웬 상자를 내밀었다.
“리그난 저하의 짐을 추리다가 발견했습니다.”
그건 남자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벨벳으로 포장된 상자였다.
“서부의 소식을 듣기 전에 밖에서 구입하신 듯한데, 아무래도 경께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기사의 긴 설명에 레나는 의아해하며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레나는 기사들이 하는 말을 곧 이해했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상자 안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리본이 담겨 있었다. 레나가 평소에 하는 머리 장식과 비슷한 리본이었다.
“저하께서 이런 물건을 구입하실 이유는 하나뿐이라…….”
기사가 굳이 부연하는 동안 레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
레나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기사가 조심히 불렀다. 그러자 레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자를 덮었다. 그러곤 기사들을 향해 그린 듯 웃어 보였다.
“전해줘서 고마워요.”
그 담담한 대답에 기사들은 잠시 눈치를 봤다. 레나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부공 대리에게 슬프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기사들이 떠날 때까지 예쁘게 웃던 레나는 문을 닫으며 웃음을 지웠다. 그러곤 잠시 문에 등을 기댔다. 레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긴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는 건네받은 상자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침대로 들어갔다. 기분이 복잡했다. 마음이 술렁이는 감각이 불편했다. 문득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다들 선물을 다른 사람 손으로 떠넘기는 거지? 조금 화가 났다. 그래서 레나는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시를 외웠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시도 이번에는 레나를 위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