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7월 30일2021.06.21.
“……레나 경은 균열 안으로 사라졌고, 기사들이 남은 균열을 가까스로 막았습니다.”
이든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해가 상당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후 레나 경의 상황을 동부공에게 전하려 했지만, 저희는 오히려 동부 기사들에게 같은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동부공도 균열로 사라졌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북부공과 그 동생은?”
“북부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루비드 왕자는…….”
다만이라는 말에 남부공이 미간을 좁혔다. 그에 이든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왕자는 이곳이 우리 요새인 걸 신경 쓰지 않고 참격을 썼던 모양입니다.”
“참격을?”
“네, 그래서 유일하게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만…… 혼자 남게 되자 사방에서 망자들이 몰려들어 결국 균열로 내몰렸습니다.”
“속지는 않았지만 당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벽이 군데군데 부서져 현재 보수 중입니다.”
이든의 보고에 남부공은 낮게 탄식했다. 장벽이 왜 저렇게 부서졌나 했더니, 왕자의 소행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전원 균열 안으로 사라졌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공작들이 사라졌지만 기사들은 결국 방어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공작들이 사라진 걸 눈치챘는지, 서부의 큰 균열에서 나온 망자의 군대가 더 적극적으로 동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기사들은 지난 석 달간 탈환한 서부 도시를 포기하고 모두 성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있을 망자의 공세에 대비하던 차였다. 총체적 난국에 남부공은 긴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든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이 상황을 황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 말에 남부공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언제, 어떻게 말인가!?”
“어, 어제입니다.”
버럭 소리치는 남부공에게 이든이 죄지은 얼굴로 답했다.
“혹시 공작님들께서 돌아오실까 하여 이틀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식 없이 망자들만 가까워져서, 동부와 북부의 기사들과 협의한 끝에 황궁으로 파발을 보냈습니다.”
“당장 불러들이게!”
“느, 늦었습니다. 봉화도 함께 올려서 이미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졌을 겁니다.”
“이런 어리석은……!”
남부공이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쳤고, 그 매서운 기세에 기사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상관이 화를 내니 눈치를 볼 뿐, 내심 억울한 기색이었다. 상황이 엄중한데 이를 책임질 자가 없어 황궁으로 소식을 전했다. 젊은 기사들은 이게 왜 화낼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남부공은 그들의 순진함에 분노마저 느꼈다. 모든 힘은, 특히 무력은 존재만으로도 억제력을 발휘한다. 제국의 공작들도 마찬가지다. 황제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탈 없이 굴러가는 건 어쨌든 공작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제의 검이자 방패로 모든 소요를 억누르고 반역을 방지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돌연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살얼음판 같은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남부공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당장 내 생환 소식을 전해라.”
남부공은 다급히 말하면서도 회의감을 느꼈다. 그래 본들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이미 대리인에게 전권을 양보한 노인네가 살아 있다고 과연 뭐가 달라질까. 남부공은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물론 황제를 걱정해서 하는 기도는 아니었다.
*** 남부공의 예상은 여러모로 잘 맞아떨어졌다. 남부공의 생존 사실은 충격을 조금도 덮지 못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물론, 황궁 밖의 제국민들도 두 공작과 북부 왕자, 그리고 남부공 대리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술렁였다. 그리고 그 소식이 황궁에 전해진 지 정확히 일주일 후.
“이거야 원.”
침대에 누운 클라비스가 상체만 일으키며 중얼댔다.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러기야?”
클라비스는 한밤중에 찾아와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는 자들을 느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흘러내린 가운은 추스르지 않고 긴 머리만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많네. 다들 비주류구나?”
클라비스는 이들이 왜 찾아왔는지,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그저 다 안다는 듯 나른히 웃을 뿐이었다. 평소 추기경에게 간언하던 사제는 그 모습에 소름이 끼쳐 신음했다.
“……당신은 정말 미쳤군요.”
“뭘 새삼스럽게. 제국에 제정신인 사람은 없어요.”
클라비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아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제가 그 모습을 질린 얼굴로 쳐다보자 뒤에 있던 남자가 속삭였다.
“말 섞지 마시오.”
하위 귀족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사제를 제지하며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곤 클라비스의 침대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유를 묻지 않는 건 당신도 예상했다는 뜻이겠지.”
“어느 정도는.”
“유언은 듣지 않겠소. 이것은 시대의 명령이오.”
사내가 검으로 클라비스를 겨누었다. 그럼에도 클라비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냥 날 죽이고 싶다고 해요. 핑계 대지 말고.”
클라비스는 달빛이 내린 고운 속눈썹으로 그를 힐난했다. 그 농염한 눈짓에 사내는 짐짓 당황했다. 이 와중에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깨를 드러낸 채 침대에 몸을 늘어트린 추기경의 모습은 지독히도 요염했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사내는 수치스러워하며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이 클라비스의 마른 몸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클라비스가 피를 토하자 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사내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 눈부신 몸을 다시 내리쳤다. 자신을 홀린 그를 벌하듯, 인간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는 요사스러움을 지워내려는 듯이. 추기경의 새하얀 침대가 붉게 물들고 찬란한 진주 주렴에도 피가 튀었다. 그 소리를 듣다 못한 사제가 사내를 말렸다.
“어, 얼굴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내는 그제야 행동을 멈추고 제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황제 쪽은 아직입니까?”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사내가 물러나자 사제는 피투성이가 된 추기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러곤 그를 위해 짧게 기도했다. . . . 같은 시각, 니힐의 처소에도 초대받지 못한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호위는 없었다. 애당초 황제는 곁에 아무도 두지 않았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도 이미 매수되어 몸을 피한 지 오래였다. 니힐은 침실이 아니라 화랑에 있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곳에서 쿠션에 몸을 기댄 채 곤히 자고 있었다. 화랑으로 접근하던 자들은 니힐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조용히 석궁을 꺼냈다. 황제는 공작들에게 권능을 나누어준 장본인. 그에겐 어떤 힘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침입자들은 신중히 니힐을 겨눴다. 팍! 벼락처럼 날아간 석궁이 니힐의 가슴에 박혔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그의 새하얀 옷에 피가 번졌다.
“됐나?”
“혹시 모릅니다.”
그들은 다시 석궁을 장전했다. 그러곤 다시 일제히 니힐을 쐈다. 파바박! 대여섯 발의 석궁이 니힐의 몸에 박혔다. 이제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자, 침입자들은 황제에게 조심히 접근했다. 지척까지 다가갔지만 황제는 그대로 숨이 끊긴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기울어진 니힐의 턱을 들어 올렸다. 죽은 후여서일까, 평소엔 감히 마주 보지 못한 황제의 얼굴이 새삼 어리게 보였다.
“머리만 가져가면 됩니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래서 괜한 감상에 빠졌던 자는 정신을 차리고 황제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거추장스러운 리본을 치우고 목을 벨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리본에 닿는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니힐이 부스스 눈을 떴다. 황제가 일어나자 침입자들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러곤 다시 석궁을 장전하고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정작 니힐은 태연히 눈을 비빌 뿐이었다. 니힐은 순진하기까지 한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피투성이가 된 가슴에 시선이 닿았고, 분위기가 급변했다. 니힐은 살벌한 눈으로 침입자들을 쏘았다. 황제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친 건 그다음 일이었다. . . . 쿠웅! 굉음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그 진동은 추기경의 침실에 있던 자들에게도 전해졌다.
“뭐지?”
추기경을 시해한 자들이 동요하며 두리번댔다.
“황제의 둥지에서 난 소리 같습니다.”
“확인을…….”
그때 말하던 자가 돌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그는 숨이 막힌 듯 쌕쌕대다가 덜컥 주저앉았고, 동료들은 놀라서 그를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이건…….”
쓰러진 자의 몸이 말라가고 있었다. 뺨과 눈이 오목하게 꺼졌고 손의 거죽은 뼈와 달라붙어 앙상해졌다.
“쇠, 쇠약……!”
“아직 살아 있나!”
추기경을 난도질했던 사내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피투성이로 늘어져 있던 추기경이 고개를 들며 중얼댔다.
“하지 마.”
“이익!”
사내는 질겁하며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핏빛 입술로 미소지었다.
“이러면 더 많이 죽어.”
클라비스의 다정한 충고와 함께 사내의 몸도 시든 풀처럼 말라갔다. 클라비스가 그걸 보며 애석하다는 듯 속삭였다.
“그것 봐.”
“으, 으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리친 자들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고, 반대로 추기경의 몸은 상처가 아물며 이전보다 더 투명하게 빛났다. 클라비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인 몰골로, 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고결한 모습으로 널브러진 시체 사이를 걸었다. 그 가운데엔 유일한 생존자인 사제가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죠?”
클라비스가 조롱기 없이 상냥하게 물었다.
“시도는 좋았어요. 그래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죠. 덤비고 싸우고 빼앗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사시나무처럼 떠는 사제를 내려다보며, 클라비스가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했어.”
그사이 쾅쾅대는 울림이 더 커졌다.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공포로 질식할 것 같던 사제는 죽을힘을 다해 견디며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질퍽이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왔다.
“왔어?”
클라비스가 태연히 그를 반겼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머리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황제였다. 니힐을 본 사제는 더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니힐은 그 가련한 자를 무시하며 클라비스에게 물었다.
“뭐야.”
“반역.”
클라비스의 가벼운 대답에 니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러자 클라비스가 니힐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의심하지 마.”
클라비스는 달콤하게 웃으며 피투성이가 된 몸을 보여주었다.
“봐, 나도 당했어. 누나가 원하던 대로야.”
그렇게 말하는 클라비스의 눈은 환희로 빛났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것은 울며 원망하다 못해 미쳐버린 미소였다.
니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100년 7월 30일.”
선선히 대답한 클라비스는 이내 힘없이 웃으며 사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일부러 이날을 고른 거예요?”
87년 7월 30일이었다. 니힐이 독을 먹고 피를 토한 날. 그날 황제는 그 날짜의 수만큼 제국민을 처형해 화풀이했다. 13년 전과 절묘하게 맞물린 날짜에 클라비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만약 일부러 그런 거라면 이들은 대단한 착각이자 실패를 한 셈이고, 우연이라면 그 또한 공교롭다. 대답 없는 사제에게 니힐이 명했다.
“귀족 100명, 관료 7명, 제국민 30명이다. 네가 골라 머릿수를 맞춰라.”
“나, 나는 그런 명령을……!”
“못하겠다면 네 가족과 네 친구, 또 그들의 친구와 그들의 가족으로 채우겠다.”
저항하던 사제는 니힐의 선언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신실한 사제의 눈에 점차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 자리에 그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라.”
니힐의 싸늘한 일갈에 혁명을 꿈꾸던 사제는 쫓기는 여우처럼 도망쳤다. 말라비틀어진 시체들 틈에 단둘만 남자, 클라비스는 손수건을 꺼내 피투성이가 된 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오랜만이네, 이런 꼴.”
“쓸모없는 것들.”
니힐이 돌연 누군가를 힐난했다. 클라비스는 누나가 누굴 욕하는지 알고 되물었다.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니힐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부여한 권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공작들이 모두 살아 있다는 뜻. 하지만 부재가 너무 길다. 버러지들이 황제의 침소에 들어올 만큼, 미천한 패자들이 감히 제국의 영토를 침범할 만큼.
“서부는 이대로 내줄 거야?”
클라비스의 물음에 니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내주다니, 가당치도 않다.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었다. 사자를 가둔 왕과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동맹을 맺었다지. 감히 내 영토를 노리고. 그걸 막으라고 보낸 공작들은 멍청하게 함정에 빠졌고, 놈들은 이 기회를 즐기며 천천히 제국을 침식해 온다. 하지만 어림없다.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설령 모든 것이 내 손에서 바스러지더라도. *** 달빛마저 불길한 밤이었다. 서부 접경지의 기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검은 파도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우아하게, 기품 있게. 어스름한 달빛 아래 파도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기사들은 숨 막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날렵한 연미복을 입고 걸어오는 그들은 신사였고, 황홀한 드레스를 끌고 다가오는 그들은 숙녀였다. 동시에 그들은 까마귀였다. 접경지 숲에 가둬둔 정체불명의 망자들이었다. 돌연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치 무도회에 나온 연인들처럼 정답게 손을 잡고 장벽을 에워쌌다. 그러곤 균열이 치솟은 서쪽을 향해 부리를 크게 열고 울부짖었다. 그날은 7월 30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