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2021.06.24.
“레나 경!”
망자에게 떠밀린 직후, 이든 경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무덤에 들어와 버린 레나는 다시 나가려고 황급히 땅을 디뎠다. 하지만 레나가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균열이 사라져버렸다.
‘통로가……!’
레나가 당황할 틈도 없이 사방에서 망자들이 덤벼들었다.
“윽!”
레나는 급히 검을 들어 망자들을 밀쳐냈다. 그러곤 기울어졌던 중심을 바로잡고 망자들의 목을 베어냈다. 망자들은 하나둘 쓰러져 바닥으로 녹아들었고, 겨우 한숨을 돌린 레나는 무덤의 붉은 하늘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이걸 노린 거였나?’
목적을 알 수 없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속내를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당장 돌아가야 돼.’
레나는 곤혹스러움을 삼키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레지나.”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과거, 레지나가 옆에 있을 땐 그의 이름을 불러서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레지나가 작은 문을 만들어주면 그 문에다 레지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 레지나는 없고, 과거의 방식도 더는 통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던 레나는 실망하며 다시 궁리했다.
‘결국 균열을 통해서 가야 하는 건가?’
레나는 자연히 지금 서부에 열린 대 균열을 떠올렸다. 망자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는 서부의 악몽. 지금으로선 그게 유일한 출구였다.
‘하지만 그쪽엔 망자들이 너무 많아.’
군대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수의 망자들이 그쪽에 포진해 있다. 심지어 왕의 지배를 받는 듯 제법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이다. 천하의 레나도 그걸 혼자 뚫을 자신은 없었다. 결국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처지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 레나는 머리를 짚으며 탄식했다.
‘유니…….’
유니의 생사조차 모르는데 이런 곳에 발이 묶이다니. 평소라면 무덤에 잠시 갇혀 있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레나는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었다.
‘남부공을 습격한 것도 그 까마귀겠지.’
레나는 그 낯선 까마귀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칭이 분명한 그 작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망자들이 몰려오는 와중에 장벽을 지키는 공작들을 공격하다니. 아무리 배교자라 해도 이건 심하다. 혹시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지배한 인간인가? 과거 어린 레나의 목을 조른 미치광이들처럼, 그 변태 왕에게 지배받아서 공작들은 공격한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급함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어쨌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레나는 일단 높다란 절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높은 곳에서 위치라도 살펴볼 셈이었다. 그런데 레나가 고작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위에서 타타타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무언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얼굴을 훔친 자들이었다. 십여 명의 망자들이 절벽을 내달리며 이쪽으로 향했고, 레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다시 검을 세웠다. 하나, 둘, 그리고 세 명째의 망자를 막 베어 넘겼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인다 싶더니, 핑 소리가 나며 투명한 참격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익숙한 소리와 느낌에 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지나?’
저도 모르게 레지나를 떠올린 레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네 명째의 망자를 걷어찼다. 그때 다시 한번 참격이 하늘을 갈랐다. 절벽 위에서도 한창 싸우는 모양이었다.
‘루비드 씨인가?’
어쩌면 루비드도 레나와 같은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비슷한 장소에서 열린 균열이니, 가까운 곳에 떨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레나는 자신에게 달려온 망자들을 몰아치웠다. 그러곤 거듭 도약하며 가파른 절벽을 올랐다. 함정에 빠진 사람이 더 있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지만, 레나는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내심 안도했다. 게다가 루비드는 투덜대는 입만 빼면 제법 괜찮은 협력자였다.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절벽을 빠르게 올랐다. 그러곤 반가운 마음으로 절벽 위에 섰지만, 정작 거기서 마주한 것은 레나가 상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레나 루벨.”
그 낮은 목소리에 레나의 표정이 대놓고 굳었다.
“함정에 빠진 건가?”
절벽에 선 남자, 이우라 플레누스가 말했다. 그래서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라고. 이우라에게 들릴 듯 말듯하게.
*** 비슷한 시각, 린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는 레나와 거의 비슷한 경위로 무덤에 갇혔다. 그리고 역시나 망자들의 무분별한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린의 상황은 레나보다 조금 나았다. 린을 습격한 것은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망자들이었고, 그 중엔 날개를 가진 용이 있었다. 린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 망자를 제압해 자신의 피를 먹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타고 무덤의 하늘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균열이다.’
하늘 높이 오른 린은 서부의 대 균열을 쉽게 찾아냈다. 다행히 균열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저기로 나가면 돌아갈 수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위험한 짓이다. 저곳엔 망자가 가득하고,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망자들은 이 용처럼 비행이 가능한 개체가 있다. 결국 저쪽으로 날아갔다간 순식간에 포위되어 공격당할 게 뻔했다. 게다가 린에겐 공중에서 싸우는 재주가 없었다.
‘레나라면 채찍으로 주위를 정리할 수 있을 텐데.’
린은 덧없이 생각하다 질근 눈을 감았다.
‘레나는 무사할까?’
린은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간 레나가 걱정스러웠다. 남부공의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란 얼굴이었는데, 제대로 싸우긴 했을까? 린은 레나를 혼자 보내지 말걸 뒤늦게 후회했다.
‘혹시 나처럼 무덤에 떨어진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까 그들은 우후죽순 솟아난 균열을 닫기 위해 임의로 흩어졌다. 누가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복도에서 눈치껏 갈라졌을 뿐이다. 함정을 준비한 가짜 까마귀도 누가 어디로 갈지는 당연히 몰랐을 터. 그러니 그놈은 모든 장소에 같은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누가 되든 걸리도록.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린은 지상으로 눈을 돌렸다. 혹시 무덤에 있을지도 모르는 레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비행하며 탐색하던 린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망자들이 한 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설마.’
린은 혹시나 싶어 그쪽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근처로 날아간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리더니 무언가가 린이 탄 용의 외피를 스걱 베어버렸다. 날카로운 충격에 용은 급히 선회했고 린은 놀라서 눈을 홉떴다.
‘참격?’
방금 이쪽으로 날아온 건 분명 참격이다. 그럼 저 밑에 있는 건 이우라 플레누스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잠시 몸을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린은 이 모습을 이우라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망자를 지배하는 걸 들키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린은 이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젠장, 꺼져!”
그 높은 목소리에 린은 움찔하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몰려드는 망자들 틈에서 화려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루비드 플레누스?’
형이 아니라 동생 쪽이었다. 린은 그 바보 같은 금발을 보자마자 마음이 싸늘히 식는 걸 느꼈다. 싫은 녀석을 발견했다. 하지만 저쪽은 여길 아직 못 봤으니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 되겠지. ……그런데 저 놈은 왜 저렇게 만신창이지? 린은 루비드를 못 본 척 외면하려다가 그의 몰골을 보고 잠시 멈췄다. 어쩐지 루비드는 너덜너덜했다. 포위된 채 한참을 싸웠는지, 몰려드는 망자들을 버겁게 밀어내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았다.
‘죽든지.’
위험해 보이지만 린은 그다지 돕고 싶지 않았다. 제국인 중에서 가장 싫은 인간을 꼽으라면 고민하지 않고 고를 수 있는 놈이 저놈이다. 멍청한데 목소리만 커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녀석.
―그래도, 형보다는 동생 쪽이 낫지 않아요? 그나마 인간적이잖아요.
하지만 레나는 저 녀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레나의 목소리가 떠오른 린은 짧게 혀를 찼다. 정말 돕고 싶지 않은 놈인데, 레나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말로는 루비드와 안 친하다고 하지만, 레나는 이따금 저 놈을 챙긴다. 마치 습관처럼, 동생을 대하듯이. 갈등하던 린은 다시 혀를 차며 방향을 바꿨다. 아무렴 모르는 사람도 위기에 처하면 구해주는데, 뻔히 아는 인간을 놔둘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건 저 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레나를 위해서다. 남부공과 유니의 생사가 불분명한 와중에 저놈까지 죽으면 레나에게 좋을 게 없다.
‘바보니까 대충 입막음할 수 있겠지.’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활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격이 날아들어 재빨리 피하고, 루비드의 근처를 에워싼 망자들을 밀어버렸다. 용의 육중한 몸이 바닥을 긁자 망자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 틈에 린은 용의 머리를 돌려 루비드를 낚아챘다. 린이 그대로 날아오르자, 흙먼지를 뒤집어 쓴 루비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모르고 소리쳤다.
“뭐야! 이익……!”
“발버둥치지 마.”
허공으로 끌려와 기겁하던 루비드는 그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잡견?”
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놈, 그냥 떨궈버릴까? 레나와 린이 이미 합의하고 규정한 바, 플레누스 형제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인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피차 최악과 차악이 있었다. 린은 그중에서 형이 동생보다는 백번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필 여기서 더 싫어하는 쪽과 만나버린 린은, 도움 받은 주제에 잡견이란 소리부터 지껄이는 이놈이 진심으로 짜증났다. 그래서 참지 않았다.
“윽!”
순식간에 멱살을 잡힌 루비드가 신음했다. 하지만 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루비드의 몸을 용의 몸체 밖으로 떨어트릴 듯 밀어붙였다.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하시지. 고맙다는 말을 못 하는 입이라면 차라리 닥치던가.”
린의 살벌한 목소리에 루비드도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 새끼가……. 큭!”
린은 루비드의 멱살을 더 강하게 휘어잡았다. 목이 졸린 루비드는 괴로워하면서도 린을 악착같이 쏘아봤다.
망자들하고 정신없이 싸우다가 돌연 허공으로 몸이 들렸다. 망자에게 붙잡힌 줄 알았는데 재수 없는 동부공의 면상이 보여서 루비드도 적잖이 놀란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뜸 목을 잡고 이따위 협박이라니.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고압적인 눈으로 루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루비드를 진저리나게 만들었다. 루비드는 전부터 저 눈이 싫었다. 거만하고 냉정한, 이우라와 겹쳐 보이는 저 눈이 정말 싫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주제에 이우라와 비슷하게 굴며 자신을 경멸하는 저놈이 언제나 짜증났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 파악이라니, 감히 누구한테.
“근본 없는 잡종 주제에…….”
루비드는 이를 아득 물며 눈을 파랗게 빛냈다. 그러곤 린이 대응할 틈도 없이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어디서 잘난 척이야!”
피잉! 루비드의 격노와 함께 형성된 참격이 그들을 태운 용의 날개를 베었다. 피막 날개가 찢어지며 고도를 높이던 용이 기울어졌다. 그러더니 마치 힘껏 뛴 그네처럼 지면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 정신 나간 놈……!”
“어쩌라고!”
하지만 린과 루비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그 두 사람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으르렁댔다. 결국 한데 얽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