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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끓는점의 앙숙 (121/208)

121화. 끓는점의 앙숙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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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웅! 굉음을 내며 용의 뱃가죽이 땅을 긁었다. 동시에 탑승자들은 허공으로 튕겨 나갔고, 한데 얽힌 그들은 속수무책 바닥을 굴렀다. 만약 상대의 멱살을 놓았다면 그보다는 나은 꼴로 착지했을 텐데, 린과 루비드는 끝내 서로를 용서하지 않고 온몸으로 땅과 조우했다. 루비드와 굴러버린 린은 짙은 환멸을 느꼈고, 루비드는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꿋꿋이 욕했다.

16562824397997.jpg“이 재수 없는 새끼…….”

구하지 말걸. 린은 진심으로 후회하며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린을 쏘아보던 루비드가 바락 소리쳤다.

16562824397997.jpg“무시하지 마!”

16562824398007.jpg“……소리치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모양이지?”

16562824397997.jpg“물론이지!”

만신창이가 된 주제에 따박따박 대꾸는 잘한다. 그 꼴이 가소로워서 린은 더 화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처맞던 걸 끌고 나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랬다간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할 것 같아 그냥 입 다물고 뻗어버린 용을 살폈다. 용은 한쪽 날개의 피막이 찢어진 채였다. 과연 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린은 날지 못하면 달리기라도 할 생각으로 다시 용에 올라탔다. 덕분에 루비드는 조금 당황했다. 돕는 척하던 동부공 새끼가 대뜸 목을 조르더니 도로 훌쩍 가버리려고 한다. 저딴 놈 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는 게 마냥 괜찮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망자를 사로잡은 저놈이 괜히 치사하게 느껴져서, 그 와중에 조금 초조하기도 해서, 동시에 그게 상당히 자존심 상해서. 결국 루비드는 용에 올라타는 린에게 신경질적으로 참격을 날렸다. 참격이 땅을 긁으며 린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위협을 당한 린이 살벌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16562824398007.jpg“진짜 죽고 싶냐?”

16562824397997.jpg“해보시던가.”

어쨌든 린을 붙잡는데 성공한 루비드는 속내를 숨기고 사납게 대답했다. 그의 도발에 린은 결국 용에서 뛰어내렸다. 한시 빨리 레나를 찾고 싶은데 이대로 돌아섰다간 등에 칼자국이 나게 생겼다. 게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루비드를 한 번 밟아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린이 흉흉한 생각을 하며 다가오자 루비드도 차가운 얼굴로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은 표정과 전혀 달랐다.

16562824397997.jpg‘젠장, 어떡하지?’

사실 루비드는 리그난 아이테르너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보단 저놈이 사로잡은 용을 얻어 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나도 데려가달라고 말하는 건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꼭 이런 분위기가 아니어도 루비드 플레누스가 리그난 아이테르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성큼 다가온 린이 검을 휘둘렀다. 루비드는 레이피어로 흘려보내다가 돌연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다. 먼저 멱살을 잡은 건 이놈인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짜증을 내던 루비드는 직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렸다. 그래서 뒤늦게 아차 싶어 물었다.

16562824397997.jpg“……잡견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거슬렸냐?”

정말 몰라서 물은 건데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그마저도 도발로 받아들였다. 쾅! 린이 미끄러진 검을 다시 들어 휘둘렀다. 루비드가 이를 악물며 막자 망치로 철판을 치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체격 차이만큼 힘의 차이도 상당했다. 그러나 루비드에게 마냥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16562824397997.jpg‘이 새끼가…….’

린의 진심을 느낀 루비드가 눈을 파랗게 빛냈다. 아무리 도움이 필요해도 이렇게 기어오르는데 굽혀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핑, 루비드도 악에 받쳐 참격을 날렸다. 그 화풀이 같은 반격에 동부공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나갔고, 동부공의 눈빛은 더더욱 살벌해졌다. 그 매서운 눈빛에 루비드는 주춤했다가 다시 이를 아득 갈았다.

16562824397997.jpg‘역시 이 자식은 재수 없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요 석 달간 루비드에겐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동부공에게 굳이 날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였다. 애당초 이 왕자가 린을 미워한 건 그가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루벨 후작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시절, 루비드는 황제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관심이 저와 나이대가 비슷한 다른 놈에게 향하니 괜히 초조해 사사건건 견제해왔다. 거기에 동부공의 냉랭함이 더해져 지금의 관계가 되었는데, 히엠스 그라샤를 치면서 루비드는 린을 싫어할 동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우선 후작을 향한 신뢰가 싹 사라졌고, 황제가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닌 걸 확인했고, 무엇보다 이우라가 자신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 더 이상 동부공과 경쟁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 와중에 레나 루벨과 제법 편해져서 그의 약혼자인 동부공에게도 덩달아 마음이 내심 풀렸다. 여전히 마주치면 버릇처럼 으르렁대지만 그것도 수년간 쌓아온 악감정 때문이지 예전처럼 진심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비드와 달리 린은 여전히 그를 정말 싫어했고, 그걸 느낀 루비드는 간만에 부아가 치밀었다.

16562824397997.jpg‘나도 너 싫거든!’

루비드는 이를 악문 채 다시 검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대치는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다. 돌연 느껴진 기척 때문이었다. 스스스 땅 긁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언덕 저편에서 뱀들이 까맣게 밀려왔다. 아까 루비드를 에워쌌던 망자들이었다. 서로 싸우느라 놈들의 접근을 눈치 못 챈 두 사람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16562824398007.jpg“운 좋은 줄 알아라!”

16562824397997.jpg“누가 할 소릴!”

마지막까지 으르렁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뒤를 맡긴 채 몰려드는 망자들과 맞섰다. 어째선지 뱀들은 주로 루비드를 노렸고, 결국 그는 아까처럼 수세에 몰렸다.

16562824397997.jpg‘이것들은 아까부터 왜 이렇게 끈질기게……!’

하지만 뱀들은 집요하게 구는 것에 비해 위력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 마치 사로잡으려 하는 것 같았다. 루비드는 진저리를 내며 참격을 날렸다. 전방의 뱀들이 썰려 나가는 순간, 후방의 뱀들이 기다렸다는 듯 루비드의 팔다리에 엉겨들었다.

16562824397997.jpg“이익!”

루비드가 그걸 뿌리치려고 버둥대는데 다리를 감은 뱀들이 돌연 느슨해졌다. 뭔가 하고 뒤를 보니 막 그것들을 베어낸, 언짢은 표정의 동부공이 보였다.

16562824397997.jpg‘하!’

루비드는 어이가 없어 신경질을 터트렸다. 썩은 얼굴로 마지못해 루비드를 도운 린은 용이 공격받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등 뒤에서 참격이 날아와 그의 옆을 휘잉 스쳤다. 린은 루비드가 또 시비를 거는 줄 알고 이를 악물다가 옆을 노리던 뱀이 토막 난 걸 뒤늦게 깨달았다.

16562824398007.jpg‘……젠장.’

힐끗 루비드를 돌아본 린은 짜증을 내며 혀를 찼다. 루비드는 아까 린이 그랬던 것처럼 상당히 아니꼬운 얼굴이었다. 어쩌다 보니 한 번씩 도움을 주고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차라리 뱀에게 물리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하나보다는 둘이 확실히 나았다. 한참 후, 몰려온 뱀들은 전부 조각나 널브러졌다. 물론 린과 루비드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16562824397997.jpg‘끝났나…….’

루비드가 후들대는 다리로 겨우 몸을 지탱하는데, 동부공이 데리고 있던 용이 돌연 뱀들의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북부 왕자가 혐오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린은 개의치 않고 용이 그것들을 먹게 했다. 일전에 뱀들이 한데 뭉쳐 더 커지는 걸 봤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먹여봤는데 예상이 맞았다. 용의 덩치가 더 커지며 찢어진 날개도 수복되었다. 용을 회복시킨 린은 다시 그 위에 올라탔다. 그때 루비드가 어, 하고 소리를 내서 린은 그를 싸늘히 돌아보았다. 저 자식 때문에 괜히 체력만 낭비했다.

16562824398007.jpg“잡종과 상대할 뜻이 없는 건 알겠으니 네 갈 길 가라. 나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린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루비드는 잠깐 움찔했다. 동부공은 묘하게 형을 닮은 면이 있었다. 싸늘함, 살벌함, 그리고 자신을 내려보는 고압적인 태도. 생각해보니 저런 모습 때문에 더 싫어했던 것도 같다. 마치 이우라를 생각나게 해서.

16562824397997.jpg“……당장 꺼져.”

결국 루비드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린은 말없이 돌아섰고,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16562824397997.jpg“레나 루벨은 왜 너 같은 놈하고 약혼했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부당하다는 투였다. 루비드의 입에서 연인의 이름이 나오자 린이 멈칫했다. 그가 다시 무어라 대꾸하려 할 때였다. 새빨간 하늘에 돌연 금빛이 번졌다. 린은 움찔 놀라 말을 멈췄고, 루비드는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6562824397997.jpg“뭐야, 저건.”

하늘에서 금빛이 펄럭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말려 있던 카펫이 펼쳐지듯, 아주 거대한 황금색 휘장이 물결치며 쏟아졌다. 그 기이한 광경에 루비드는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린은 아니었다. 린은 그걸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용에 올라타 루비드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아직 하늘 구경이나 하는 놈에게 소리쳤다.

16562824398007.jpg“손!”

16562824397997.jpg“어?”

루비드가 끝까지 멍청하게 굴자 린은 짜증을 내며 팔을 뻗었다. 이윽고 린이 낚아채자 루비드는 쉽게 딸려갔다.

16562824397997.jpg‘뭐야, 이 자식!’

얼떨결에 붙들린 루비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하지만 린은 루비드처럼 성질을 낼 겨를조차 없었다. 린은 저게 뭔지 안다. 전에 레나와 함께 있을 때 봤다. 린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용을 채근했고, 용이 홰치며 도약했다. 린의 다급함을 이해한 용은 빠르게 날아올랐다. 이대로 휘장 안에서 벗어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휘장에서 뱀들이 쏟아져 린과 루비드를 덮쳤다.

16562824398007.jpg“크윽!”

손쓸 겨를도 없이 뱀들이 린과 루비드의 몸을 휘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용에서 미끄러졌고, 그사이 휘장은 땅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왔다.

16562824398007.jpg‘늦었어……!’

린은 절망하면서도 용을 휘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놈이 원한 건 애당초 인간뿐인지 휘장은 더 이상 뱀들을 토해내 용을 쫓지 않았다. 린과 루비드는 뱀에게 포박된 채 떨어졌다. 상당한 높이였지만 충격에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짙은 향기와 함께 어둠이 내렸기 때문이다. . . . 다급히 찾아온 어둠이 도로 물러갔을 때, 루비드는 울창한 숲속에 서 있었다. 크고 화려한 꽃이 만발한, 그리고 이국적인 향기가 진동하는 숲이었다.

16562824397997.jpg“뭐야, 이건 또…….”

루비드는 갑자기 변해버린 주변을 얼떨떨하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낯선 식물 사이에서 동부공을 발견했다. 어째선지 그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16562824397997.jpg“자…….”

습관처럼 잡견이라고 부르려던 루비드는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앞선 실수를 교훈 삼아 요령껏 다시 말했다.

16562824397997.jpg“뭐, 뭐하냐?”

16562824398007.jpg“오지 마!”

기껏 신경 써서 말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거칠었다. 그래서 루비드는 짜증을 내며 중얼댔다.

16562824397997.jpg“무슨 개소리야?”

그 중얼댐에 린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 이 명불허전 치자 새끼. 바로 알아들으면 루비드 플레누스가 아니지.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린은 부득 이를 갈며 제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열기가 혈관을 타고 도는 게 느껴졌다. 숨이 가빠지며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린은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했다. 다른 모두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너하곤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고.

16562824398007.jpg“제발 오지 마……!”

그래서 애원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루비드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기웃대며 다가왔고, 그의 발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순간 린은 결국 이성을 잃었다. 린이 루비드의 가는 목을 휘어잡고 쓰러트렸다. 그때 그의 눈은 피 같은 붉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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