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살아남아 버렸어요2021.07.19.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칼리고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몸을 낮췄다. 그 순간 이우라의 손이 허리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검을 뽑으려는 찰나, 레나가 그의 손을 내리치며 검을 도로 밀어 넣었다. 그 단호한 저지에 이우라가 불쾌한 듯 레나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레나도 못지않게 날카로운 눈으로 경고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레나는 한차례 눈싸움을 한 후 엎드린 칼리고에게 말했다.
“태도가 변했네요.”
―살려주십시오. 부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몸을 잔뜩 낮춘 칼리고에게선 더 이상 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은 레나에게 연거푸 죽다가 빌던 순간과 같았다. 그래, 이런 존재였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자신이 강자일 때는 온갖 포악을 부리다가 약자가 된 순간 더 없이 비굴해지는 놈이었다. 레나는 혐오감을 참으며 물었다.
“당신이 데려간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다만…….
“다만?”
―나와 생명이 연결되었습니다.
칼리고의 고백에 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칼리고는 빠르게 덧붙였다.
―내 심장을 뜯으면 그도 죽을 겁니다.
칼리고는 그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했다.
―그자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려주십시오. 목 잘린 여자에게서 나를 지켜주십시오.
가만히 듣던 이우라는 다시 검을 뽑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먼저 레나가 칼리고의 몸을 내리쳤다. 콰직! 장작 패는 소리가 나며 칼리고의 몸이 토막났고, 그 돌발행동에 이우라와 루비드는 짐짓 놀랐다. 칼리고의 잘려나간 몸은 뱀으로 변해 흩어졌다. 칼리고가 아직 남아 있는 입으로 중얼댔다.
―약혼자의 신변은…… 아무래도 좋단 뜻인가……?
“협상을 하고 싶으면 직접 나와서 해.”
레나는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놈들의 음습한 습성을,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기고만장해지는 야비한 본능을. 그래서 레나는 단호하게 칼리고를 쳤고, 칼리고는 레나의 냉정함에 서글피 웃었다.
―그럼 찾아오십시오……. 문은 이미 열렸으니…….
그 말을 끝으로 뱀들은 완전히 흩어졌다. 칼리고의 분신이 사라지자 레나와 북부 형제는 이미 열린 성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그들의 눈앞에 놓인 것은 드넓은 정원과 잘 정돈된 연못,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이국의 아리따운 궁전이었다. 입구에 선 세 사람은 궁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고 짐짓 당황했다. 화사하게 꾸며진 길은 빽빽한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끝까지 이런 장난질을…….’
레나가 혀를 차는 사이 이우라가 검을 뽑아 참격을 날렸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할 바엔 차라리 부수고 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듯 참격은 정원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파문이 일더니 날아온 참격을 집어삼켰다.
‘자기 영역이라 이건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안전에서 다른 왕의 권능을 허용하는 왕은 없으니. 참격이 통하지 않는 걸 확인한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미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데 미궁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레나는 걸음을 떼며 잠시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이우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힐끗 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몇 걸음 나아가자 갈림길이 나왔다. 루비드가 어느 쪽으로 갈 건지 물으려 할 때였다. 레나와 이우라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
뒤에 혼자 남은 루비드는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망할……!”
망설이던 루비드는 어쩔 수 없이 한 명을 쫓아갔다. 입장상으로는 이우라의 뒤를 따라야 하지만, 결국 루비드가 선택한 건 레나였다.
“야!”
루비드가 뒤에서 소리치자 레나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루비드와 보조를 맞추려는 듯 속도를 약간 늦췄다.
“이쪽으로 오셨네요.”
“뭐야, 왜 갑자기 달리는데!”
루비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갈라진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외감을 느낀 루비드가 화내며 묻자 레나는 짧게 대답했다.
“먼저 찾아야 하니까요.”
“뭘?”
“동부공과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요.”
“그건 어차피…….”
“목표가 달라요. 이우라 씨하고 저는.”
레나는 린을 구해야 하지만 이우라는 왕만 죽이면 끝이다. 결국 상황에 따라 서로가 걸림돌이 될 확률이 농후하다. 게다가 이들은 피차 아주 성가신 적수다. 그래서 레나는 이우라보다 먼저 린과 칼리고를 찾아내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우라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아까 뒤도 안 돌아보고 갈림길로 들어선 걸 보면 말이다.
“이쪽으로 와줘서 고마워요.”
레나가 가볍게 달리며 말했다. 루비드는 콧방귀를 뀌더니 딱히 널 도울 생각은 없다며 투덜댔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넌 저 뱀 놈이랑 뭔 사이냐?”
“사이?”
“아깐 주인이라고 하질 않나, 전에는 신부니 뭐니 하던데.”
“미친놈의 헛소리인 게 당연하잖아요.”
레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고, 루비드는 거기서 살기를 느꼈다. 루비드가 오싹해하며 쳐다보자 레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왜 이우라는 아무 말이 없었지?’
루비드가 미심쩍어할 호칭을 이우라가 그냥 넘어갈 리 없는데. 평소라면 왜 주인이냐, 망자의 왕과 왜 구면인 거냐라며 하나하나 따져 물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 넘어간 건가?
‘설마, 그럴 리가.’
레나가 의심스러워하는 사이, 두 사람 앞에 휘장이 나타났다. 가볍게 달리던 레나와 루비드는 그것을 단호히 걷으며 돌진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또 다른 광경이 그들의 시야를 채웠다. 이어지던 길은 사라지고 아늑한 궁전의 내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있었다. 크고 화려한 방에 혼자 외롭게 앉은 아이. 많은 심장을 가진 왕, 칼리고였다. 그가 뭘 보여주려고 하는지 눈치챈 레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 그 시각, 린은 수갑에 달린 사슬을 타고 있었다.
‘꼴사납게 구조를 기다릴 순 없어.’
그래선 내 강력한 여자친구에게 면이 서질 않는다. 어차피 인질이라 저쪽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터, 그래서 린은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린은 자신을 포박한 사슬을 잡고 벽을 올랐다. 쭉 올라가니 벽에 고정된 고리가 보였다. 린을 묶은 사슬은 그 고리에 걸려 있었다. 린은 벽돌 틈에 발을 대고 사슬을 고리에서 빼냈다. 그러곤 다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그로써 매달린 신세를 면한 그는 벽에 걸린 등을 내려 뒤집었다. 거기서 흐른 기름이 린의 손을 적셨고, 린은 손과 손목을 미끄럽게 만들어 수갑까지 벗어 던졌다. 구속을 푸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린은 한숨을 쉬며 기름등의 유리에 자신의 목덜미를 비춰보았다. 그의 목엔 이빨 모양의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을…….’
칼리고가 남긴 상처에 린은 불안해졌다. 생각해보면 칼리고에게 지배당한 것도 뱀에게 물린 다음 일이었다. 동부공의 권능은 지배,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피를 먹인 자에게 발휘된다. 그리고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그 힘의 원래 주인. 그러니 권능을 사용하는 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탈출해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건가.’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렇게 묶어두고 가둬둔 걸 보면. 어쨌든 칼리고는 인질이 감옥에 얌전히 있길 바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지배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대로 있다간 칼리고에게 유리한 패로 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린은 철장에 사슬을 걸었다. 그러곤 사슬을 밧줄처럼 꼬며 철장을 우그러트렸다. 철장이 적당히 벌어지자 린은 그 틈으로 몸을 빼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린은 나자와 필연적으로 더 가까워졌다. 나자는 여전히 린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문득 생각났다. 무덤에서 나자를 다시 봤을 때 숨조차 쉬지 못한 일이. 실은 지금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두렵고 불편하다.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7년 전에 죽었을 뿐, 아직 아무런 매듭도 짓지 못했으니까. . . . 10년 전, 나자 아이테르너는 대륙 동부를 제국에 편입시켰다. 지도상으로는 제국의 국경선을 한마디 움직인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 그가 불태운 것은 동방의 무고한 민족과 유구한 역사였다. 나라를 잃은 그해, 린은 동부공의 성으로 끌려왔다. 식민지의 포로 신분이었다.
“우릴 제국인으로 가르친 다음 감찰 일을 시킬 거래.”
한 소년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소년이 대답했다.
“제국의 개로 키우겠다는 거지.”
“우릴 분열시키려는 거야.”
“더러운 놈들, 난 절대 그놈들 뜻대로 안 해.”
조용히 결연하는 소년들은 모두 동방에서 끌려온 포로들이었다. 무도한 침략자들은 문벌가의 아들을 선별하여 동부공의 성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한데 모인 소년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런데 그중 유독 말이 없는 소년이 있었다.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야, 걘 건드리지 마.”
한 소년이 관심을 보이자 다른 소년이 막았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그의 귀에 속삭였다.
“가족이 전부 죽고 혼자 남았대.”
“여기 생이별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어?”
“아니, 쟤는 부모님이 죽는 걸 눈앞에서 봤대.”
“뭐?”
“그러니까 가만히 둬.”
안 그래도 밤마다 몰래 울더라. 뭘 먹지도 않고. 나이도 여기서 제일 어리잖아. 소년들은 그렇게 속삭이며 구석에 웅크린 소년에게서 돌아섰다. 그로써 혼자 남은 소년, 린은 서러운 기분을 참지 못하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직도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마치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시고 형님이 돌아올 것만 같은데. 하지만 눈은 도무지 떠지지 않고 도리어 눈을 감으면 맹수 같은 눈동자가 그를 노려본다. 린은 몸서리치며 눈물을 참았다. 반년 전이었다. 어수선한 소문이 들려오고 형님이 전쟁터로 향한 건. 불과 반년 만에 린의 고국은 제국에 패했다.
‘형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받아들이지 못할 뿐.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죄송해요…….’
죄송해요, 혼자 살아남아서, 죄송해요, 나만 살아 있어서. 정말 죄송해요, 겁먹어서. 애써 참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린은 숨소리를 삼키며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눈앞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살해되었다. 심지어 부모님을 살해한 자의 얼굴도 똑똑히 봤다. 하지만 린은 그 얼굴을 곱씹으며 복수를 다짐할 수 없었다. 그때 마주친 눈을 떠올리면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서 가슴을 옥죄였다. 아이는 그 맹수 같은 사람이 무서워서, 정말이지 너무나 무서워서…….
“다들 주목하십시오.”
린이 홀로 괴로움을 견딜 때였다. 한 제국인이 소년들의 방으로 들어왔다.
“귀공들에게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제부터 귀공들은 제국 명문가의 자제들과 같은 수준의 대우와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제국인은 어색한 동부어로 소년들을 불러모으더니 이렇게 말했다.
“귀공들이 선별된 까닭은 특별한 역할을 맡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귀공들은 제국과 동부를 잇는 교량이 될 것입니다. 망자들이 대륙을 노리는 이 엄중한 시기에 화합의 상징으로서 말입니다.”
이어진 감언이설에 소년들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화합의 상징이라니. 남의 멀쩡한 나라를 짓밟은 주제에 어디서 감히. 소년들은 제국인이 같잖은 눈가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보여주기 식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소년들의 예상과 달리 그 제국인의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소년들은 제국의 귀족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고상하지만 입에 통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제국 상류층의 교육을 받았다. 린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전복된 삶은 또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그 윤택함 앞에서 린은 슬픈 눈으로 속삭였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는 이렇게 살아남아 버렸어요. 그렇게 되뇌던 시절 그는 열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