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시동과 목검2021.07.22.
그렇게 한 해가 흘렀다. 그 1년간 소년들은 제국의 언어를 익혔고, 제국 상류층과 다를 바 없는 학식과 예법을 쌓았다. 그 기간의 삶은 분명 안락했지만 그로 인해 쌓여가는 죄의식과 부채감은 오히려 지옥에 가까웠다. 소년들은 불타버린 고국을 뒤로한 채 이토록 태연히 지내도 괜찮은지 하루하루 의문을 품었다. 린 역시 그러한 의문 속에서 떠밀리듯 살아가고 있었다.
“린 님, 계십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기사 찾아와 린을 따로 불렀다. 그 기사는 린이 제국에서 본 기사 중에 가장 젊었고, 데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린이 눈치를 보며 복도로 나오자 데카가 정중히 말했다.
“동부공 저하께서 부르십니다.”
뜻밖의 말에 린은 설핏 얼어붙었다. 동부공이라니. 동부공의 성에서 1년째 기거하고 있지만 소년들은 이제껏 동부공을 본 적이 없었다. 동부공은 연이은 전쟁으로 항상 부재중이었다. 그때는 동부의 모든 나라가 제국에 편입되고, 망자와의 전쟁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동부공이 균열에서 밀려 나오던 망자들을 폐쇄된 계곡지역까지 밀어 넣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토벌을 앞두고 재정비차 잠시 성에 들른다는 소식도. 그런 동부공이 부른다니. 게다가 자신만 따로. 린은 까닭을 몰라 잔뜩 긴장했다. 그러곤 데카를 따라 난생처음 본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만 부르신 건가요?”
긴 복도를 지나며 린이 물었다. 그 긴장한 음성에 데카는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부공 저하께서 시동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린 님은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저하의 시중을 들게 될 겁니다.”
“시중이요?”
데카의 대답에 린은 더 얼떨떨해졌다. 갑작스러웠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제국에서 제법 좋은 취급을 받아온 덕분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침착했던 얼굴은, 동부공을 마주한 순간 창백히 질려버렸다.
‘말도 안 돼…….’
저 사람이 동부공이라고? 린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부공의 집무실에서 린을 기다린 것은 맹수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황금색 눈동자와 검은 제복을 입은, 꿈에서조차 린을 겁먹게 하던 사람. 그를 알아본 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그대로 얼어붙었다.
“예를 갖추십시오. 이 성에서 가장 높은 분이십니다.”
데카가 작게 속삭였지만 린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린을 지배한 것은 분노도 비통도 아닌 공포였다. 책상에 앉아 있던 동부공이 힐끗 눈을 들어 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린은 덜컥 무릎이 꺾여 주저앉고 말았다. 데카가 급히 일으킬 때, 린은 손과 어깨를 후들대며 떨고 있었다. 아이는 가까스로 다시 일어나 앞을 보았다. 하지만 동부공은 이미 이쪽에 흥미를 잃은 듯 무심히 서류를 훑고 있었다. 동부공이 린을 본체만체하자, 데카는 린을 집무실 측면에 배치된 책상으로 인도했다.
“앞으로 여기서 저하의 일을 거드는 겁니다.”
데카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분류하는 방법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린은 거기서 한 시간가량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묻는 말에 답하고 시키는 것을 하긴 했지만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흐르며 가슴이 요동쳤다.
‘그 사람이야……!’
맹수 같은 눈을 가진 사람, 아버님과 어머님을 무참히 베어버린 사람. 그리고 숨어 있던 나를 발견한 사람. 그 사람이 동부공이었다니…….
‘그런데 왜 날…….’
시동으로 삼았지? 자기가 찔러 죽인 사람들의 자식인데. 화근으로 여겨 없애버려도 모자랄 판인데. 숨 막히게 생각하던 린은 퍼뜩 깨달았다.
‘날 기억 못 해?’
그래, 기억을 못 하는 거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짓밟았을 테니까, 그 무수한 피해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분하지 못 하는 거다. 그럼 내가 시동으로 선택된 건 단지 우연인 걸까? 가장 어리니까, 다루기 쉬울 것 같아서, 그래서? 린은 그날 종일 겁에 질려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침대에서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꿈이었다. 집 안으로 들이닥친 새카만 군인들.
―너는…….
경악에 찬 아버님의 목소리.
―네가 감히……!
찢어질 듯한 어머님의 절규. 그리고 사방에서 흘러넘쳐 세상을 가득 채운 붉은 피. 린은 숨을 크게 마시며 깨어났다. 그리고 기억을 고스란히 투영한 꿈을 통해 1년 만에 깨달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동부공을 알고 계셨어…….’
린은 식은땀에 젖은 채,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그날, 부모님은 동부공을 알아봤다. 그래서 그의 등장에 놀라고 그의 행동에 경악했다.
‘우리 부모님과 아는 사이였어…….’
뒤늦은 깨달음은 곧 새로운 공포로 돌아왔다.
‘그런데 죽인 거야?’
아는 사람을, 굳이 찾아와서, 자기 손으로 직접 베었다. 대체 어떤 관계인데 그런 짓을 하지?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원수. 그것도 정말 끔찍한 원수. 그리고 나는, 동부공이 증오한 이들의 자식.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린은 그날 이불 속에서 밤새 떨었다. 동부공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겁났다. 동시에 그런 자신이 역겨울 만큼 미웠다. 그래서 밤새 떨며 되뇌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혼자 살아가고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해서. 겁먹어서. 정말 죄송해요.
. . . 죄책감은 결국 두려움을 이겼다. 아니, 억누르고 억압했다. 동부공의 시중을 들게 된 지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동부공의 집무실로 불려간 린은, 자신의 책상에서 봉투 자르는 칼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칼. 이걸로 저 사람을 찌를 수 있을까? 서류를 가져다주면서 이걸로 저 사람을 찌르면……. 그때 린은 강박에 가까운 복수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록 어리지만 명망 높은 무가의 아들이었다. 나름의 긍지를 가진 아이는 원수를 앞두고 겁먹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증오심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자신을 채찍질했다. 저 사람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부모님을 죽였어. 복수해야 해, 복수, 부모님을 위해, 복수…….
“그만둬라.”
그때 불현듯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낮고 차가운,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 처음 듣는 목소리에 린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부공, 나자 아이테르너와 눈이 마주쳤다. 첫날 이후 그가 린에게 시선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량 차를 모르고 덤비다간 죽는다.”
나자의 경고에 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들켰다. 들켜버렸다. 죽어? 죽는 건가……? 린이 그대로 얼어붙자, 동부공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렀다.
“내가 미운가?”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린은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부단히 자신을 다그쳤다. 겁먹지 마, 겁먹으면 안 돼. 두려움보다는 죄책감이 더 무겁던 아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차마 입으로는 밉다고 말할 수가 없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심판을 기다리는데, 또 한 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럼 분풀이라도 해봐라. 검을 잡는 법 정도는 배웠겠지.”
나자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의자가 바닥에 드르륵 끌릴 때 린의 심장도 드르륵 긁히는 것만 같았다. 나자는 린에게 긴 막대를 던졌다. 목검이었다. 그걸 얼떨결에 받은 린은 직전의 용기가 무색하게 또 하얗게 질려버렸다.
‘날 죽일 거야…….’
그러자 겁먹은 아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나자가 말했다.
“가벼운 여흥이다. 내 옷자락이라도 스치면 소원을 들어주마.”
여흥이라니, 평소라면 저 무시무시한 동부공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까맣게 모르는 린은 악에 받쳐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는 연약한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용기를 쥐어짰다. 그러곤 배운 대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나자는 팔을 늘어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고, 린은 갈등하다가 목검을 힘껏 내질렀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린의 목검은 저편으로 날아갔다. 린의 목검을 보이지도 않게 쳐낸 나자가 무심히 말했다.
“다시.”
린은 손목의 저릿함을 참으며 다시 목검을 잡았다. 그러곤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따각대는 소리와 함께 두 목검이 제법 빠르게 부딪쳤다. 린은 할 줄 아는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나자는 숨소리도 흘리지 않고 모두 태연히 받아치더니 빈틈을 노려 아이의 목덜미로 목검을 쑥 들이밀었다. 린이 주춤 얼어붙자 나자가 목검을 거두며 중얼댔다.
“다시.”
나자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건 마치 린을 가지고 노는 것도 같고, 시험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린은 나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쩌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기 전에 가지고 노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는 덤빌 엄두를 못 내고 자세만 애써 잡은 채 서 있었다. 소년이 겁을 먹었다는 건 그의 흔들리는 검 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자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목검을 휘둘렀다. 딱, 딱. 가벼운 소리가 울리며 린의 손에서 다시금 목검이 날아갔다. 속절없이 검을 놓친 린은 판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자가 돌연 돌아섰다.
‘어?’
린이 놀라서 눈을 깜빡였지만, 나자는 태연히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더니 언제 목검을 휘둘렀냐는 듯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뭐지?’
이렇게 넘어가는 건가? 나자를 찌르려고 마음먹었고,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들켰던 린은 나자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럽다고 불리한 이 상황을 굳이 끌고갈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린도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우며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아직 숨이 찼다. 그래서 린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짚어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콩닥대며 뛰는 가슴이 묘하게 편안했다. . . . 그날부터 린은 동부공의 집무실에 갈 때마다 목검을 휘둘렀다. 물론 린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앉아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부공이 뜬금없이 목검을 들고 일어났다. 나자는 저번처럼 덤벼봐라, 몸을 좀 풀겠다, 따분하다며 다짜고짜 린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린은 왜 이러시냐는 표정으로 나자를 바라보며 미약하게 반항했다. 하지만 그 눈싸움에서 승리하는 건 언제나 나자였고, 힘없는 소년은 괴롭힘 당하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목검을 잡았다. 매번 몸부림치다 패한 소년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슬슬 이기고 싶어졌다. 나자가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오기가 발동해 그의 옷자락이라도 쳐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나자 아이테르너는 제국의 최강자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게, 동시에 몹시 부끄럽게도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번도 져주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소원이 없나 보군.”
그날도 린은 나자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자가 그 모습을 보며 중얼대자 린은 울컥해서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방심하고 선 나자의 허리를 밑에서부터 노린, 나름 회심의 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자는 가볍게 피했고, 대범하게 올려치다 목표를 잃은 린은 그만 헛발을 딛고 말았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린은 두 팔로 앞을 막았다. 넘어지는 걸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기울던 몸이 덜컥 멈췄다. 대신 어깨를 단단히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예상도 못한 접촉에 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나자가 넘어지던 린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린은 나자에게 거의 안긴 꼴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붙잡힌 린은 그만 얼어붙었다. 나자가 무서운 건 여전했다. 하지만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착각할 것 같았다. 그때 나자의 체향이 린의 코끝을 스쳤다. 린은 그 냄새를 맡고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냄새가…….’
익숙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