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본심 따위2021.07.29.
벽을 깨며 직진하는 이우라의 기세는 매서웠다. 그걸 본 레나는 칼리고에게 본체로 돌아가라고 소리쳤고, 칼리고는 이견 없이 뱀으로 만든 가짜 몸을 허물어트렸다.
“잠깐.”
그런데 돌연 레나가 칼리고를 붙잡았다. 칼리고가 영문을 묻듯 다급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나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그가 한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다만 나와 생명이 연결되었습니다.
―내 심장을 뜯으면 그도 죽을 겁니다.
레나가 린에 대해 물었을 때 칼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레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확실히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길 꺼내면 린을 걱정하는 걸 들키게 된다.
“……합류 장소를 정하고 가.”
결국 레나는 본심을 숨긴 채 말을 돌렸다. 그에 칼리고는 궁전의 왼편 첨탑에 있겠다고 대답한 후 다시 떠나려 했다. 다른 구실이 없던 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루비드였다. 대뜸 칼리고를 붙잡은 루비드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가기 전에 설명해, 동부공이랑 생명이 연결됐다는 게 뭔 소린지.”
레나는 자신이 삼킨 질문을 루비드가 대신하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비드도 레나를 보며 칼리고를 눈짓했다. 칼리고는 루비드의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어 침묵하고 있었다. 레나는 루비드가 기회를 만들어준 걸 깨닫고 칼리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의 무심한 명령에 칼리고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에게 내 피를 주입했습니다. 나의 피는 다스림이고, 나는 그에게 나와 생과 사를 함께할 것을 명했습니다.”
“……번거로운 짓을 했군.”
레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곤 칼리고에게 꺼질 것을 명했고, 칼리고는 비굴하게 복종하며 모습을 지웠다. 칼리고가 사라지자 레나는 미로의 벽 건너편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아직 벽 위에 선 루비드에게 말했다.
“가요.”
루비드는 순순히 레나를 따라 뛰어내렸다. 루비드가 내려오자 레나는 채찍을 말며 내달렸다. 그러곤 벽이 앞을 막을 때마다 채찍으로 뛰어넘으며 궁전으로 향했다. 그러길 얼마, 얌전히 따라오던 루비드가 운을 뗐다.
“야.”
“중요한 얘긴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어디서 듣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레나는 단호했고, 입막음을 당한 루비드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본 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뭐래.”
루비드는 이미 기분이 상한 듯 신경질을 냈다. 레나가 미안한 듯 돌아봐도 못 본척했다. 그때 저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이우라가 만드는 소리는 레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레나는 루비드를 뒤로한 채 다시 내달렸다. 루비드는 그 뒤를 쫓으며 앞서가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한차례 짜증을 내긴 했지만 진지하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궁금했다. 아까 레나 루벨이 ‘동부공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한 말이. 사실 그때 루비드는 조금 놀랐다. 연기인 걸 곧 눈치챘지만, 잠깐이나마 진심인 줄 알고 당황했다. 루비드는 함부로 화를 내긴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도 그만큼 쉽게 믿는다. 그런데 레나가 본심과 다르게 말하는 걸 보며 새삼 깨달았다. 필요하다면 검은 것도 희다고 할 수 있는 게 사람인 것을. 물론 이전에도 사람들이 거짓말이나 입발림을 쉽게 한다는 걸 알긴 알았다. 다만 그건 약하고 미천한 자들의 일이라 왕자인 루비드에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저 녀석이,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레나 루벨이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걸 보며 그게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문득, 정말 문득 이우라가 떠올랐다. 콰앙! 마침 또 한 번 굉음이 울렸다. 빌어먹을 형 놈이 돌진하는 소리였다. 루비드는 혼자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을 이우라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그때 앞서 달려가던 레나가 말했다. 뜻 모를 제안에 루비드는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
“물어보면?”
“대답해줄게요. 한두 개 정도는.”
“젠장, 열 받게 굴지 마. 짜증 나게 슬금슬금 숨기기나 하고.”
“새삼스럽네요. 우리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래, 너 잘났다.”
루비드의 투덜댐에 레나는 조심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레나는 아까 루비드가 린에 대해 물어봐 준 게 고마웠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눈치껏 끼어든 거였다. 그렇게 신경을 써줬는데 인사는커녕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내심 미안했다. 그래서 얄밉게 틱틱대는 걸 참고 기다렸다. 이러면 곧 알아서 주절댈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꿍하게 있던 루비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레나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이우라 플레누스는 개새끼냐?”
“설마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망자의 왕이나 무덤에 대한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레나가 뜬금없다는 듯 쳐다보자 루비드가 다시 버럭댔다.
“물어보라며!”
“그랬죠. 음, 이우라 플레누스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
“솔직히 말하면 싫은 사람이에요.”
레나는 루비드가 왜 갑자기 이우라 얘길 꺼내나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냉정하고 깐깐하고 예리하고, 몇 마디만 나눠도 살얼음 위에 선 기분이라 불편해요. 저하곤 확실히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
레나의 대답에 루비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답지 않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의 안색을 살피다 덧붙였다.
“그래도 형은 형이던데요?”
“뭐?”
“물론 가족에게도 진짜 멍멍이처럼 구는 사람이 있기는 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아버지.
“하지만 그쪽 형님이 그 정도는 아니지 싶네요.”
“무슨 근거로?”
“구하러 왔었다면서요. 히엠스 그라샤의 성까지.”
그때 설마 레나 루벨을 구하러 왔을까. 당연히 제 동생을 챙기러 왔지. 게다가 동생을 욕하니까 바로 발끈해서 덤벼들던데. 동생을 가진 레나는 그 심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했다.
“표현력은 최악이지만 본심은 다르지 싶어요.”
동생에게 거리를 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우라 플레누스는 아직 형이다. 동생을 성가시게 여기면서도 어디서 맞을 것 같으면 기어이 찾으러 가는, 어쨌든 뒷바라지하는 그런 형. 레나의 추측에 루비드의 표정은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야.”
루비드는 그게 더 짜증난다는 듯 작게 중얼댔다.
“말을 안 하는데 본심 따위 어떻게 아냐고.”
그때 또 한 번 굉음이 울려왔다. 그 단호한 소리가 마치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 같아, 루비드는 조금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 한편, 지축을 흔드는 소리는 테메툼 칼리고의 궁까지 뒤흔들었다.
‘소리가 가깝다.’
칼리고는 이우라가 점점 다가오는 걸 느끼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우라 플레누스가 레나 루벨 못지않게 두려웠다. 아니, 실은 레나보다 더 무서웠다. 애당초 무덤의 왕들은 제국의 공작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힘을 훔쳐 쓰는 주제에 권능이니 공작이니 하며 거들먹대는 놈들. 그마저도 몇 년 지나면 말라비틀어져 사라지는 것들. 영겁을 사는 망자의 왕에게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제국의 공작들은 구름의 모양처럼 덧없고 하찮았다. 그럼에도 왕들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공작이 몇 있었는데, 나자 아이테르너와 이우라 플레누스가 바로 거기에 속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서 균열 너머의 왕들도 흥미를 느끼게 했다. 그들이 무덤으로 내려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던 시절,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품었던 흥미였다. 그런데 오늘 그 불길이 강을 훌쩍 넘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때문에 칼리고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죽던 날을 떠올렸다.
‘죽고 싶지 않다, 이렇게 또……!’
칼리고는 겁에 질려 궁전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나자의 아들을 챙겨서 레나 루벨에게 가야 한다. 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 레나 루벨이 과연 나를 지켜줄까? 끝까지, 완벽하게 보호할까? 아니, 그건 피도 눈물도 없는 계집이다. 여자들은 다 그렇지, 저가 불리할 땐 울면서 매달리지만 상황이 변하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다. 불쌍한 사내를 배신하고 쓰레기처럼 내버린다. 그런 여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다.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레나 루벨 말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다른 장치.
‘아까 그 금발…….’
사내 주제에 요염하게 생긴 녀석, 루비드라고 했나? 참격을 썼다. 그건 이우라 플레누스와 같은 권능.
‘형제인가?’
그럼 그놈도 잡아서 인질로 삼으면? 아니, 녀석의 옆엔 레나 루벨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나운 계집마저 적으로 돌리게 된다. 칼리고는 전전긍긍하며 연신 머리를 굴렸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번뜩 스쳤다.
‘놈들은 목 잘린 여자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
니힐의 정체도, 그에게 받은 힘의 정체도 제국의 공작들은 모른다. 그래서 천하의 나자 아이테르너도 무덤에서 진실을 알고 혼란에 빠졌다. 칼리고가 여전히 많은 심장을 가진 왕으로 존재하는 건 그 덕분이기도 했다.
‘이우라 플레누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그걸로 내 안전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다만 빈틈을 만들 수는 있다. 분명히 동요할 터, 그 틈을 타 허를 찌르는 거다. 나자 아이테르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궁리를 거듭하던 칼리고는 비로소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파른 나선계단을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한 광경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감옥에 묶여 있어야 할 나자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칼리고는 눈을 부릅뜨고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허둥대며 감옥 앞까지 달려갔다.
‘이 찢어 죽일……!’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실제로 감옥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버려진 사슬과 휘어진 창살이 도주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칼리고는 격분하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텅 빈 감옥 맞은편 우리엔 나자 아이테르너가 여전히 묶여 있었다. 칼리고는 유일한 목격자인 그에게 성큼대며 다가갔다.
“네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고해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하지만 칼리고는 하려던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나자의 그림자 뒤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칼리고는 숨을 거칠게 뱉으며 자신을 찌른 이를 바라보았다.
“너, 이놈……!”
칼리고의 가슴을 창으로 꿰뚫은 것은 다름 아닌 나자의 아들, 린이었다.
격분한 칼리고의 두 눈에 핏발이 일어났다. 그걸 마주 보는 린의 얼굴은 언뜻 침착했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의 눈동자 역시 싸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린이 칼리고의 몸에 박힌 창을 비틀었다. 이대로 그를 도륙할 작정이었다. 칼리고가 움직이는 창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더니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아둔한 놈…….”
칼리고가 린을 조롱한 순간,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한결 붉어진 순간 린의 심장으로 이질적인 통증이 쏟아졌다.
“윽……!”
린은 이를 악물며 칼리고를 바라보았다. 견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격통에, 린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